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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도 되는 몰랐던 이야기들(3화)

MeRCuRyNim 2023. 5. 29.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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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래

 

돌고래는 수수께끼 같은 동물이다.

 

포유류 가운데서도 돌고래는 몸집에 비해 뇌의 부피가 가장 큰 편에 속하며 침팬지의 뇌 무게가 보통 3백 75그램이고, 사람의 뇌 무게가 1천 4백 50그램인데 비해, 돌고래의 것은 1천 7백 그램이다.

 

그런 정도의 뇌를 가지고 있으니, 돌고래는 기호를 이해하고 언어를 만들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지만 그럼에도 돌고래는 그 지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 처럼 보인다.

 

인간에게 포획되어 동물원이나 수족관에서 벌이는 쇼에 출연하여 사람들의 놀이를 흉내내거나 서커스 묘기를 보여 주고 있는 돌고래들을 보고 있자면 '그들의 지능은 정말로 스스로에게 아무런 도움을 못 주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돌고래는 포유강(綱) 고래목(目)에 속하는 바다에 사는 포유류 동물이다.

 

그들도 우리처럼 공기를 들이마시고, 암컷들은 새끼에게 젖을 먹인다.

 

알을 낳지 않고 임신과 출산을 했던 돌고래의 조상은 다리가 있었고, 땅 위를 걷고 뛰어다녔다.

 

그들은 아마도 악어나 바다표범과 비슷했을 것이다.

 

그렇게 땅 위에서 살아가던 그들이 어느 날, 무슨 까닭에서인지 물 속으로 되돌아갔다.

 

마치 육지 생활에 염증을 느끼기라도 한 것 같았다.

 

우리처럼 물에서 나와 육지에 잘 적응해 가더니, 그래도 역시 물이 더 살기 좋다고 생각하고 훌쩍 떠나 버린 것일까?

 

1천 7백 그램에 달하는 커다란 뇌를 가진 그들이 바다로 돌아가지 않고 육지에 남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들은 우리의 경쟁자나 선구자가 되었을 것이고, 전자 보다는 후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런데 왜 그들은 바다를 택했을까?

 

바다는 확실히 육지보다 유리한 점을 지니고 있다.

 

육지에서 우리는 땅바닥에 붙어 살지만, 바다에서는 3차원 속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으며 의복이 필요하지 않고 집과 난방 설비도 필요치 않다.

 

바다에는 먹이도 풍족하다.

 

돌고래가 정어리 떼에 다가가는 것은 우리가 슈퍼마켓에 가는 것과 같으며 단지 돌고래는 공짜로 먹이를 구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돌고래의 뼈대를 조사해 보면, 지느러미 안에 길쭉한 손가락 뼈가 아직 들어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육지 생활의 마지막 흔적이다.

 

그 부분의 변화가 돌고래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는 지도 모른다.

 

손이 지느러미로 바뀜으로써 돌고래는 물 속에서 대단히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었겠지만, 그 대신 더 이상 도구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 기관의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도구를 만들어 내는 데 그토록 열을 올렸던 것은, 우리 환경이 우리에게 그다지 적합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물 속에서 행복을 되찾은 돌고래는 자동차나 텔레비전, 총, 컴퓨터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언어의 필요성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돌고래들은 자기들 고유의 언어를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시킨 듯하다.

 

그들의 언어는 소리를 통해 교신하는 음향 언어이며 돌고래가 내는 소리는 음역이 대단히 넓다.

 

사람의 음성 언어는 주파수 1백 헤르츠에서 5천 헤르츠 사이에서 소통되지만, 돌고래의 교신은 3천 헤르츠에서 12만 헤르츠에 이르는 넓은 범위에서 이루어지며 음향 언어는 아주 풍부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나자렛 베이 커뮤니케이션 연구소 소장인 존 릴리 박사의 견해에 따르면, 돌고래들은 오래 전부터 우리와 교신하기를 갈망해 온 듯하다고 한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해변에 있는 사람들과 우리 선박들에 다가와서는, 마치 우리에게 알려 줄 게 있다는 듯이 펄쩍 뛰어오르기도 하며, 어떤 몸짓을 하기도하고,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돌고래들은 우리가 자기들을 이해하지 못할 때면, 이따금 역정을 내기도 하는 것 같다"라고 존 릴리 박사는 말한다.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치고 싶어하는 그런 행동은 동물 세계 전체를 통틀어 오직 돌고래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다.

 

 

한증막

이러쿼이 족이나 휴런 족을 비롯한 북미 인디언의 많은 부족들은 어떤 결정을 내릴 때면 한증막을 활용하곤 했다. 

 

그들의 한증막은 높이가 1미터쯤 되고 짐승의 가죽을 이용해 반구형으로 만든 작은 오두막으로 복판에는 네 방위를 상징하는 돌과 함께 불 때는 자리가 있었고, 문은 동쪽으로 나 있었다. 

 

인디언들은 그 오두막 안에 두세 명이 함께 들어가 세 시간 동안 머물러 있곤 했는데 열기와 연기 때문에 그들은 대개 환각 상태에 빠지게 마련이었다.

 

인디언 샤먼들은, 그런 상태에서 정신이 육체를 빠져 나가고 그 자리에 초자연적 존재인 마니투가 들어와 도움말을 준다고 생각했다.

 

캐나다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그런 관습을 타파하고 싶어했는데 그들은 벌거벗은 남녀가 한데 섞여 몇 시간 동안 그렇게 좁은 장소에 머물러 있는 것을 마뜩치 않게 여겼다.

 

그러나 정작 한증막의 관습을 타 파시킨 것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아닌 술이었다.

 

장례

 

어떤 문명이 지혜로운 문명인가 아닌가를 가름하는 첫번째 요소는 〈죽은이들에 대한 숭배〉이다.

 

인간들이 시신을 쓰레기와 함께 버렸던 시절은 짐승이나 다름없었던 시대였으며 인간들이 시신을 매장하거나 화장하기 시작한 것은 문명사에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사자(死者)를 돌보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계 위에 놓인 눈에 보이지 않는 피안의 세계를 상정하는 것이며 사자를 돌본다는 것은 인생을 이승에서 저승으로 옮겨 가는 과정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종교적인 행동은 거기에서 유래한다.

 

지금까지 조사된 바에 따르면, 사자 숭배가 가장 먼저 행해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7만 년 전인 구석기시대 중기의 일로서 당시에 몇몇 부족들은 시신을 길이 1미터 40센티미터, 너비 1미터, 높이 30센티미터인 묘혈에 매장하기 시작했다. 

 

부족의 구성원들은 시신 옆에 고깃덩어리와 부싯돌로 만든 무기들과 고인이 사냥한 동물의 머리를 놓아두었고 장례를 치르면서 부족 전체가 함께 모여 식사를 했다.

 

 

세스토드

 

세스토드는 딱따구리의 내장에 성충 상태로 살고 있는 단세포 기생충이다.

 

이 기생충은 딱따구리의 똥과 함께 배설되는데 딱따구리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 종종 개미 도시 위로 똥을 뿌린다.

 

개미들은 이 흰 배설물을 치워 내려고 하다가 그것을 먹고는 세스토드에 감염된다.

 

이 기생충은 개미들의 성장을 방해하고 딱지 색깔을 하얗게 변화 시키며 감염된 개미는 무기력해지고 자극에 대한 반응이 대단히 느려진다.

 

그래서 청딱따구리가 똥으로 개미 도시를 공격할 때는 그 개미들이 가장 먼저 희생되는데 색소 결핍증에 걸린 그 흰 딱지 개미들은 행동이 느려질 뿐만 아니라, 밝은 딱지 색깔 때문에 개미 도시의 어두운 통로 안에서도 훨씬 더 눈에 잘 띄기 때문이다.

 

몽생미셸※

 

몽생미셸 섬은 고도의 상징성을 지닌 장소이며 하늘과 땅과 물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지리적 특성 때문만이 아니다.

 

그곳은 기독교도의 순례지일 뿐만 아니라 연금술사들과 템플 기사 수도회※의 기사들, 더 거슬러 올라가 갈리아의 드루이드 사제들이 의식을 집전하던 곳이다.

 

그 고장 사람들은 몽생미셸 섬을 숭배했으며 더 옛날에는 그 섬을 죽은 이들의 섬이라는 뜻으로 〈툼바〉라고 불렀다(툼바는 갈리아 말 툼에서 나온 것으로 높은 곳, 또는 죽음의 장소를 뜻했다).

 

로마인들이 들어오기 전에 갈리아 지방에 살았던 켈트 인들은 겨울이 시작되는 11월 2일에 맞추어 〈사원>이라는 축제를 벌였는데 그날은 사자(死者)들이 서로 만나는 날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몽생미셸에서 보내는 그날 하루만은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노르망디의 영주들은 몽생미셸과 관련된 모든 미신을 타파하고 싶어했고 그들은 마침내 1023년 동료들을 시켜 그 섬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을 짓게 했다.

 

그런데, 이 성당 자체가 범상치 않았다.

 

이 성당은 네 면이 비탈진 바위 산 위에, 정문이 동쪽을 향하도록 세워져 있었고 정문을 들어서면 현관 홀과 중앙 홀이 나타나며 중앙 홀에는 열주(列柱)가 좌우 일곱 칸으로 늘어서 있고 양쪽에 측랑이 붙어 있다.

 

그 다음엔 둥근 천장을 가진 익랑(翼廊)이 있고, 후진(後)에는 성가대 자리와 제단이 자리잡고 있으며 중앙 홀의 측랑과 이어진 회랑이 그 성가대 자리와 제단을 둘러싸고 있다.

 

건물의 전체 길이는 80미터인데, 이 길이는 공교롭게도 성당을 받치고 있는 바위 산의 높이와 같다.

 

그러니까 바위 산의 단면과 건물의 대지(空地)가 모두 완전한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고 그 안에 성당이 들어 있는 셈이다.

 

이렇게 대지를 사각형으로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각형은 4원소와 4방위와 바위 산을 후려치는 네 방향의 바람을 가리키는데 성당을 건축한 사람들은 헤브라이의 성전(聖殿), 특히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을 본받으려고 했던 듯하다.

 

현관은 <울림>이라 불리는 헤브라이 성전의 현관과 그 위치가 동일하며 기도소(헤칼)와 지성소(데비르)도 똑같은 자리에 놓여 있다.

 

익랑으로 올라가는 일곱 계단은 솔로몬 성전의 일곱 계단과 유대교의 제례용 칠지(七枝) 촛대에 해당한다.

 

성당뿐만 아니라 몽생미셸 수도원도 어떤 상징을 담고 있다.

 

수도원의 길이와 너비의 비율은 구약 성서의 한 대목을 암시하는데 즉,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이 노아에게 길이 3백 자에 너비 50자의 방주를 만들라고 이르는 대목이 나오며 몽생미셸 수도원의 비율이 바로 6대 1이다.

 

또한 이 수도원은 노아의 방주처럼 상 · 중 · 하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노아의 방주에는 하층엔 짐승들이 탔고, 중층엔 양식이 실려 있었으며, 상층엔 노아의 가족이 타고 있었다.

 

수도원의 경우에는 하층에 순례자와 신자와 이방인들을 맞아들이는 보시처(布施處)가 있고, 중층에는 수사들의 식당이 있으며, 상층엔 공동 침실이 있다.

 

수도원을 세운 사람들은 애초부터 몽생미셸이 한낱 작은 섬이 아니라 피안을 향해 항해하는 배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모양이다.

 

※몽생미셸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의 망슈 도(道), 생말로 만 남동쪽에 있는 작은 섬, 원뿔 모양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암산으로 현재는 방파제에 난 도로로 육지에 연결되어 있다.

708년 아브랑슈의 주교 성 오베르가 대천사 미카엘(생미셸)을 환상으로 보고 미카엘의 명령에 따라 이곳에 예배당을 세웠다.

10세기 초 노르망디의 기독교화가 이루어지면서 베네딕트회 수도원이 들어서고 성당이 건립되었다.

그 후, 이곳은 프랑스 최대의 순례지이자 관광지로 발전하였다.

 

※템플 기사 수도회

 

1119년 프랑스의 기사(騎士) 위그 드 팽과 고드프루아 드 생타무르가 팔레스티나 성지의 수호를 목적으로 창립한 종교 군사 단체.

요하네스 수도 기사회, 독일 기사 수도회와 함께 십자군 시대의 3대 기사 수도회로 꼽을수 있다.

12세기 말에 전성기를 누렸으나, 왕권 신장을 노리는 필립 4세의 박해 속에서 우상 숭배와 배교의 누명을 쓰고 1312년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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