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 양

바이킹의 기술과 전략(1부)

MeRCuRyNim 2023. 4. 14.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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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으며 그 무자비함으로
시대의 아이콘이 된 바이킹(Viking).

그들은 1200년 동안 피를 부르는 잔인함과 야만성
특히 전쟁터에서의 용맹함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당시 바이킹들이 얻었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에게 거론되며, 그들의 전설과 역사를 바탕으로 한 인기 드라마 바이킹스(Vikings)가 제작되었다는 점만 헤아리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많은 매체와 정보를 통해 우리에게 각인된 바이킹의 모습 중 과연 어느 정도가 사실일까?

이를 보다 명확히 밝히기 위해 많은 과학자와 고고학자들은 바이킹이 바다 멀리 떨어진 곳까지 습격하기 위해 사용했던 기술에 대해 주목했고, 오랜 기간 연구를 진행해 왔다.

연구 과정에서 다른 기술적인 부분보다 그들이 사용했던 배를 살펴보던 중 줄곧 원시적 민족으로 그려져 왔던 이미지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이 발견되었다.

나아가 현대의 기술자들은 고성능 무기 제조 방법도 생소했던 그 시대에 바이킹이 사용했던 여러 기술들에 대해 오히려 감탄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바이킹 족이 자랑했던 그들의 전략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서기 793년 6월 8일 토요일.

영국의 한 해안가에 자리한 린디스판 수도원
(Lindisfarne Monastery)에선 평소처럼 수도사들의 기도가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수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까마득한 수평선 너머로 몇 척의 배가 나타나는가 싶더니 곧장 수도원으로 뱃머리가 향했고  이내 무장한 병사들이 수도원을 급습해 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고 없는 침입자들의 출몰로 인해 수도사들은 굉장히 당황했지만 곧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아볼 수 있었다

소문으로 익히 들어온 그들은 바로 북쪽 멀리 떨어진 땅, 현재의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알려진 곳에 거주하고 있던 악명 높은 무역업자들이자 '해적' 또는 '약탈자'
라는 의미의 고대 언어 'Vikingr'에서 유래된 말로써 흔히 바이킹(Viking)이라 불리던 자들이었다.

그들이 들이닥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원은 혼돈과 광기에 휩싸이게  되었고, 침입자들은 수도원에 있던 많은 양의 보물들을 약탈당함과 동시에 수행 중이던 수도사들도 모조리 학살해 버렸다.

이날 행해진 급습은 그때까지 잉글랜드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난폭하고 파렴치했으며 치밀하게 계획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린디스판은 당시 노섬브리아(Northumbria) 왕국에서도 주요 수도원들이 자리했던 곳으로써 굉장히 중요하게 간주되던 장소인 만큼 약탈이 주된 수입원이었던 바이킹이 아무런 계획 없이 무작정 침입했다고는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편 이 참담한 소식을 접한 노섬브리아 왕국은 이와 같은 일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그 바람과는 다르게 린디스판 급습은 앞으로 잉글랜드 땅에 내려질 끔찍한 악몽의 서막이었으며,
잉글랜드에 대한 약탈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던 바이킹은 결국 차례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프랑스까지 침략해 나갔다.

당시 그들의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은 색슨 족과 프랑크 족의 도시는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그럼 이토록 끔찍한 참상을 불러일으킨 바이킹 족의 급습은 약탈이 목적의 전부였을까?

몇몇 역사학자들은 이를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서유럽 교회에 쌓여있던 보물은 누구라도 충분히 탐낼 만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정치적인 목적이 강했다고 주장하는 쪽은
당시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은 기독교 문화권이었지만 바이킹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둔다.

유럽 내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녔던 프랑크 국왕 '카를로스(Carolus Magnus 혹은 Charlemagne) 대제'가 북부의 이교도들과 전쟁을 벌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위의 가설도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가지는데
바이킹의 침략은 기독교도들에게 대한 경고 메시지였던 것이다.

이 외에도 많은 주장과 학설이 있지만 이 모든 가설들보다 가장 확실한 사실은 바로 바이킹 시대의 개막이 중세 유럽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바이킹 족은 첫 침략으로부터 50년이 채 되기 전에 잉글랜드 대부분의 영토를 정복하였고, 100년의 세월이 지났을 즈음엔 찬란하리만큼 번성했던 비잔틴 제국을 침략했으며, 200년이 지난 때에는 무려 대서양을 건너 그린란드를 비롯해 북아메리카 지역까지 그 영역을 넓혔으니 가히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단 말이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과거 바이킹이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수많은 흔적을 남겼음에도 여전히 의문점은 남아있는 것은
그들이 시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성공의 비결들이다.

영국 셰필드 대학(University of Sheffield) 중세 역사가인 사라 풋(Sarah Foot) 교수는
바이킹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작성한 고문서에 그 해답이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실제로 문서 분석에 중점을 둔 사라의 연구는 지금까지 바이킹의 성공에 일조한 대상들에 대해 꽤나 가치 있는 단서들을 많이 발견해 냈다.

그녀가 주목하는 기록들 중에서도 성 바스트의 884년도 연대기는 바이킹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스칸디나비아 인들은 기독교인들을 노예로 만들거나 죽였다.

교회를 무너뜨리고 요새를 함락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거리에는 성직자와 신도들의 시체뿐 아니라 귀족과 서민, 여자, 젊은이, 심지어 아기의 시체까지 즐비했다. '


얼핏 보면 1100년이나 지난 위의 기록들은 단지 무자비한 야만인으로만 표현된 일반적인 바이킹의 이미지를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다.

또한 동시대 다른 문서에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내용은
바이킹의 약탈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뿐이다.

사라교수는 이들 문서로부터 8세기 유럽 전역의 기독교인들이 바이킹에 대한 분노의 표출뿐만 아니라 그들의  급습에 대해 굉장한 두려움까지 파악해 냈다.

바이킹이란 존재의 출몰이 중세 유럽에 그토록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이유 중 하나가 수도사들에게 있다는 관점이 있는데 당시 기독교 포교자인 그들이 바이킹 족을 신이 인간을 벌하기 위해 내린 창궐로 묘사하는 아이러니한 경우가 꽤 있었기 때문이다.

사라교수는 바이킹의 뛰어난 약탈 능력에는 군사적인 특이점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문서에는 바이킹의 약탈에 특이한 점이 있다고 암시되어 있어요.

다른 종류의 무기가 있었다고 말이죠.

이건 분명 바다에서 순식간에 나타나 공격해 오는 바이킹의 신속한 급습 능력을 의미하는 것일 겁니다.

실제로도 당시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했으며 흥미롭게 여긴 부분이 바로 이 점이니까요.

그들이 얼마나 신출귀몰했으면 바이킹을 거론하는 문서 대부분이 이들을 '바다에서 태어난 전사(Sea-born warrior)'라 표현하겠습니까."


다른 침략자들과는 다른 바이킹의 특징은 바로 바다에서 정면으로 공격해 왔다는 점이며, 이것은 그들이 상당히 특별한 배를 타고 항해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9세기 문헌에는 바이킹이 사용한 배의 디자인에 대한 별다른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11세기 후반 문헌엔 그걸 굉장히 문학적으로 표현해 낸 부분이 있죠.

그 기록은 특히나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용골의 우아한 장식에 대해 보다 강조하며 언급하고 있어요.

더불어 '무기에서 반사되는 번쩍임과 방패에서 보이는 불길' 등의 표현들은 당연히 문학적으로 미화된 것이라 간주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킹의 선박들이 유럽에서 만들어지던 배와는 굉장히 다르다고 생각되는 점이 이 문헌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중요점이라 판단됩니다."


사라교수의 문헌 연구는 바이킹 족의 강점과 서유럽 측의 약점을 확연하게 드러내 주었다.

실제, 당시 무방비로 방치되어 있던  유럽 연안 사회가 갑작스러운 바이킹 선의 출현에도 아무런 대처를 할 수 없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던 것이었다.

유럽은 바이킹의 출현 이전에도 다양한 외세의
침략자들로부터 고통받고 있었다.

다만 바이킹 족이 그들과 달랐던 것은 앞서 언급했듯 바다에서 상대를 향해 정면으로 공격해 왔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바이킹 선의 어떤 면이 약탈에 최적화된 이들의 '치고 빠지기' 전략에 적용된 것일까?

위 사진은 노르웨이 오슬로(Oslo)의 바이킹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바이킹 선으로서 배의 구조를 상세히 보여주는 훌륭한 모델이다.

위의 배는 진흙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1100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배의 이름은 '곡스타드(Gokstad)'이며 1880년 이 배가 발굴된 장소의 지명을 딴 것이라고 한다.

다른 많은 배들 중 유독 곡스타드가 유명한 것은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뿐 아니라 지금까지 발견된 바이킹 선 중 규모가 가장 크다는 점이 그 이유이다.

지금은 은퇴한 바이킹 박물관의 큐레이터였던 '안 에밀 크리스텐슨(Arne Emil Christensen)'은 이 배에 대한 모든 세부적인 사항을 알고 있었다.

"곡스타드의 길이는 24m예요. 80피트쯤 되는 셈이죠.

배 중앙의 폭은 5m로 즉 16피트이고 양쪽 각각 16명씩 총 32명이 노를 저었어요. 

그리고 곡스타드는 바이킹의 묘실로 사용되었던 배이기 때문에 발굴 당시 많은 양의 바이킹 유물이 실려 있었죠"


바이킹이 전성기를 맞을 수 있었던 성공의 비결을 알기 위해서는 이 곡스타드 선을 세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곡스타드 선의 중요성을 파악한 전문가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이 배의 선체 디자인 및 구조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왔는데,

전문가들의 연구기간 중 첫 번째로 주목받은 것은 바이킹 선 선체의 판자가 매우 얇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곡스타드 선 판자의 두께는 약 1인치 즉 2.5cm 정도였는데 24m 길이에 달하는 그 크기에 비하면 이는 굉장히 얇은 편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기 역학적 외관을 띤 비교적 좁고 높은 뱃머리를 가진 선체의 외형도 시선을 사로잡았다.

 "얇은 선체의 판자와 높은 뱃머리를 가진 외형.

이 두 가지 특징이 종합돼 만들어진 곡스타드 선은 엄청난 강점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속도' 말이죠.

이처럼 유연하고 가벼운 선체는 보통 물 위로 떠올라 움직입니다.

현대의 쾌속정과 완전히 같다고 할 순 없지만 비슷한 개념이죠.

즉 선수파 때문에 배 앞머리가 살짝 들리고 덕분에 엄청난 속력을 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배는 오히려 속도가 높아질수록 더 안정적인 상태가 돼요.

실제로 곡스타드의 복제 선은 시속 30km 이상을 기록했습니다. 

범선 치고는 굉장히 빠른 속도였죠."


바이킹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수중 익선 기술을 이용했고 말 그대로 물 위에 떠오른 상태에서 항해할 수 있었다.

그들이 급습에서 보여 준 경이로운 신속함의 비결은 바로 이러한 점 덕분이었다.

영국 사우스햄프턴(Southampton) 대학은 바이킹 선의 강점이 실질적으로 적용되는 지를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해 실험용 물탱크 안에서 갠트리가 곡스타드 선의 모형을 잡고 있는 형태로 실험을 했다.

실험 결과 배가 파도에 뒤집히거나 가라앉을 것이라 생각한 이곳의 연구진들의 생각과는 달리 곡스타드가 시속 30km로 항해할 수 있다는 놀라운 결과가 도출되었다.

연구원들은 실험조건을 물탱크 내의 환경이 완전히 북해에서 항해할 때와 동일하도록 조성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일정 파도를 생성해 적용했고, 곡스타드 모형 배는 최고시속 24km에 이르도록 설정되어 실험이 진행되었다.

실험의 결과는 또 한 번 연구진들을 놀라게 하였다.

모형의 속도가 최고시속에 달하자 뱃머리가 미끄러지며 순조롭게 뻗어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는 곧 곡스타드가 고속으로 항해할 수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하지만 선체의 외형과는 관계없이 모든 배는 난류를 만들어 내고 물과 마찰하기 때문에 배가 높은 속도에 다다르기 위해선 그 마찰을 최소화하는 것이 필수이다.

이에 대한 바이킹 선의 해답은 바로 오늘날 클링커식 이음(Clinker built)이라 불리는 선체 판자를 겹치는 구조였다.

일반적으로 배의 속도가 빨라질 때 겹쳐진 선체 판자는 선체 아래로 공기를 보내게 되는데 바로 이 공기가 물 위에 떠있는 배에 완충역할을 해주며 마찰과 난류를 줄여 주는 원리를 바이킹 족은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의 형태에 대해 전문가들의 아래와 같이 말한다.

" 당시의 배는 현대의 것과 달리 스스로 파도를 뚫고 나아갈 수 없었어요.

대신 파도 위로 미끄러지는 형태로 항해했던 것이죠.

바이킹이 바다 위에서 그 특출 난 빠른 속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선체 아래로 공기를 끌어오는 클링커식 이음과 독특한 선체 외형 덕분이었습니다. "


바이킹들은 어떻게 이런 걸작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일까?

위의 사진은 덴마크에 위치한 로스킬데(Roskilde) 바이킹 박물관이다.

이곳에선 몇몇 고고학자와 배 건조 기술자들이 팀을 이루어 오래전 실제 바이킹들이 사용했던 기술과 재료를 그대로 구현한 바이킹 선의 복제품을 만들고 있다.

이는 상당한 전문 능력을 요하는 작업이었지만 바이킹 배 건조 기술의 비결을 밝힐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로스킬데 박물관 디렉터인 티나 담가르드 소렌슨(Tinna Damgård-Sørensen) 역시 복원 작업에 함께 하기를 원했고, 그렇게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이러한 건조 작업 덕분에 저희는 배의 건조술과 관련된 기술뿐만 아니라 바이킹들이 썼던 재료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체는 50피트 즉 16m에 달하는 오크(Oak) 목재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건조 기술자들은 배의 길이를 결정해 주는 용골(Keel)처럼 거대한 부품 같은 경우 오로지 한 나무로부터 제작되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 이유는 목재를 이어 붙여 사용하면 부품의 질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는데 여기서 질이란 건 바로 부서지지 않고 잘 휘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배의 재료가 유연할수록 거센 파도의 충격을 보다 잘 견딜 수 있으며 따라서 선체의 내구성이란 곧 유연성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의 온전한 목재로부터 판자를 통째로 쪼개내는 데는 과거 바이킹들이 사용했던 '클리빙'이란 기법이 사용되었다.

클리빙이란 나무에 쐐기를 박아서 본래 나무 자체에 있던 미세한 틈을 벌어지게 하는 과정을 말한다.

바이킹 선과 같이 속도와 유연성에 치중한 목선을 건조할 경우에는 현대의 톱보다 클리빙 기법이 더 좋은 이유는 톱질을 할 경우에는 나무의 결과 직각이 되게 잘리는 반면 클리빙을 이용하면 나뭇결에 따라 쪼개어지기 때문에 목재 본래의 강도를 보다 잘 보존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은 바이킹이 선박 건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즉 자연이 제공하는 재료들에 대한 그들의 탁월했던 이해 능력이 그들 스스로를 당대 최고의 건조 기술자로 만들어 준 것이다.

바이킹 족이 위용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배의 속도가 빠른 것뿐만이 아나라 그들이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습격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배의 조작에도 매우 능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래의 사진 속 석판은 천년도 더 지난 것으로 발트해(Baltic-Sea) 중앙부에 있는 스웨덴의 고틀랜드(Gotland) 섬에서 발견되었다.

석판 겉엔 항해 중인 그 당시 바이킹 선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돛은 정사각형이며 평행선의 음양은 배의 삭구(배에서 쓰는 로프 및 쇠사슬 따위의 총칭)가 얼마나 복잡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림 속 밧줄을 잡고 있는 듯한 사람들은 아마도 배의 조종을 맡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스웨덴 고틀랜드 대학 댄 칼슨(Dan Carlsson) 교수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잘 보시면 선원들이 모두 앉은 채로 밧줄을 잡고 돛 자체를 조종하고 있단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바이킹 선이 바람을 안고 돛을 움직임으로써 비교적 쉽게 배의 방향을 조종했다는 증거이기도 하죠 "


하지만 오늘날 바이킹이 어떤 방식으로 삭구를 갖췄는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는데
온전한 형태로 그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삭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고고학자들은 삭구 대신 돛의 천조각에 주목해야만 했으며, 특히 돛 조각의 재료가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연구를 진행했다.

중세시대 돛 제작엔 일반적으로 아마포(Linen)가 이용되었는데 특이하게도 바이킹의 돛은 울(Wool) 소재를 사용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고대 직물 전문가인 에이미 라이트풋(Amy Lightfoot, Tommervik Textile Truxst)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저희 팀은 지난 몇 년간 했던 3개의 큰 프로젝트 중 하나로서 울 소재를 이용해 바이킹 선의 돛을 만들었습니다.

바다를 항해하기에 적합해야 한다는 점 또한 고려하여 크기 역시 알맞게 제작되었죠.

저흰 이 돛을 만들면서 울 소재가 큰 이점을 가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창할 것 없는 그 이점이란 바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보다 쉽게 항해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는 전부 부풀었다가도 원래 형태로 금세 돌아오는 울 소재의 놀라운 신축성 덕분이에요."


울 소재는 신축성을 떠나 물을 잘 흡수하기 때문에 돛을 만드는 소재로써는 부적합해 보일 수도 있다.

다만 바이킹이 이런 단점을 모른 채 사용했을 리 없기 때문에 아마도 그들은 방수 기능을 갖춘 보다 특수한 종류의 울을 사용했을 것이다.

바이킹들은 당시 노르웨이에 서식했던 '스펠스아우(Spælsau)'란 품종의 양털로 돛을 만들었다.

이 양의 털은 두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피부에 가까운 잔털이 한없이 부드러우며 겉의 거친 털은 방수 기능을 훌륭해 해낼 수 있었다.

양털은 두 종류로 분류되어 실로 제작되었으며 돛을 만들 때 두 실이 함께 엮였다.

또한 현대의 베틀이 수평이라면 바이킹의 베틀은 수직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실타래들은 그 무게에 따라 베틀 하단에 자유롭게 매달려 있었다.

"수직 베틀의 가장 큰 이점은 직조물의 단순함입니다.

그 결과물이 훨씬 촘촘하기에 수평 베틀로 짠 직물보다 더 나은 천을 만들 수 있죠.

과거 바이킹이 촘촘하게 짜낸 직물은 내구성이 좋았을 뿐 아니라 그들이 사용한 울의 성질인 유연성과 방수성을 더욱 향상시켜 줬을 겁니다."


바이킹의 전성기가 열렸던 9-11세기.

당시엔 바이킹 선은 견줄 상대가 없을 정도로 막강한 위력을 자랑했는데 과연 1000여 년 전의 바이킹 선이 현대의 배와 겨뤄도 이길 수 있을까?

이러한 의구심을 가진 사람들은 로스킬데 박물관의 해양 전문가들에게 과거 바이킹 선의 복제품과 현대 요트의 경주를 의뢰했어

의뢰에 호감을 느낀 해양 전문가들은 경주를 준비했고 현대 요트는 바이킹 선과 크기가  비슷하거나 약간 상위를 점하는 것으로 선택되었다.

또한 이들은 경주 대상인 양측 모두에게 동일한 환경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경주 장소는 로스킬데 피오르드(Fjord)가 선택되었고, 거리는 직선으로 약 1마일에 약간 못 미치는 1.5km를 달리도록 결정되었다.

드디어 경주가 시작되고 바람은 바이킹 선을 앞서 나가게 만들었다.

때마침 불어오는 거센 바람과 큼지막한 정사각형 돛은 단 바이킹 선은 마치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와 같았다.

"바이킹 선은 길고 좁은 형태를 가지고 있어서 바람만 제대로 불어주면 엄청난 속도를 낼 수 있어요."

한편 요트의 돛은 직진 코스가 아닌 지그재그 코스에 적합하도록 디자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후방에서 바람이 부는 상황에서는 큰 이점이 없었다.

하지만 현대의 기술이 접목된 요트는 마침내 점차 바이킹 선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바람이 뒤에서 불 때만큼은 우리와 비슷한 속력을 냈죠.

현대의 요트를 타고 있었음에도 앞서 나간 바이킹 배를 따라잡기란 쉽지 않았어요."

결국 경주는 간발의 차로 현대의 요트가 승리했다.

비록 바이킹 선의 입장에선 아쉬운 패배였지만 무려 천 년 전 기술로 건조된 배로 현대의 요트 못지않은 실력을 발휘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컸다.

"오늘은 아마 시속 15km에서 18.5km 정도를 기록한 것 같습니다.

딱히 기분이 상한 건 아니에요.

이 정도도 상당한 속력이니까 말이죠."


바이킹이 한때 바다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들의 뛰어난 배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성공 이면엔 뛰어난 항해력 외에도 다른 강점들이 많이 있었다.

그중 한 예로 바이킹은 일단 목적지에 상륙하면 훌륭한 전사로 돌변했다.

매체에서 그들은 보통 '사슬 갑옷을 입고 검과 도끼로 완전 무장했으며 팔에는 밝게 칠해진 나무 방패가 들린 전사'로 여겨지는데, 바이킹은 전투에 임하며 실제로 어떤 장비를 가지고 싸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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