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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 고타마 싯다르타

MeRCuRyNim 2023. 8. 7.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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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釋迦, B.C. 563~B.C. 483년) 본명은 고타마 싯다르타(悉達多 喬達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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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釋迦, B.C. 563~B.C. 483년) 본명은 고타마 싯다르타(悉達多 喬達摩)로 인도 카필라바스타의 왕자로 태어났으며 인간의 괴로움의 근원을 깨닫고 구원의 방법으로 팔정도(八正道)를 제시하였다.

카스트 제도


귀족 계급 중심으로 이어지던 인도 종교와 달리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였고 신을 부정하였으며
(無神論) 누구라도 수행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설파해 하층민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나 온갖 부귀영화를 약속받았던 고타마 싯다르타가 보리수 밑에서 세상의 괴로움이 무엇인지 깨달음을 얻어 창시한 불교는 당시 인도 사회를 지배하던 브라만교나 힌두교와는 중대한 차이
가 있었다.

'누구나 수행만 하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다’

‘계급은 중요하지 않고 값진 제물도 바칠 필요가 없다'

라는 불교의 특성은 카스트 제도라는 엄격한 신분제도하에서 고통을 겪던 인도 하층민들에게 새
로운 탈출구로 여겨졌을 것이다.

하얀 코끼리


고타마 싯다르타는 기원전 563년 인도 북쪽 네팔 국경 근처에 있던 카필라바스타에서 슈도다나 왕과 마야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왕에게는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지만 마야부인이 하얀 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꾼 후 아이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룸비니 동산


출산이 임박하자 마야부인은 당시 풍습에 따라 고향으로 향했으나 고향에 도착하기 전 룸비니 동산에 이르렀을 때 산기가 와서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이는 아소카 왕이 석가모니의 성지를 순례하며 세웠던 석주가 1896년에 발견되며 증명되었다.

가릉빈가(迦陵頻伽)


경전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태어나자 하늘에
오색구름과 무지개가 피었으며 가릉빈가가 왕자의 탄생을 축하했다고 한다.

석가모니 왕자는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어가 오른손은 하늘을 향하고 왼손은 땅을 향한 채

"천상천하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는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오직 나 홀로 존귀(尊貴)하도다.
삼계(三界)가 모두 고통스러우니 내가 마땅히 이를 평안히 하리라" ​

라는 뜻이다.

태어난 지 이레 만에 마야부인이 산후병으로 세상을 뜨고, 어린 싯다르타는 이모의 손에서 자라며 왕족에게 필요한 학문과 기예를 배웠다.

당시 풍습에 따라 16세에 동갑인 사촌 야쇼다라와 혼인하여 아들 라훌라를 얻으며 평온한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석가모니는 인생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괴로운 문제에 직면한다.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사문출유(四門出遊) 또는 사문유관(四門遊觀)으로 알려져 있는 이 일화에서 석가모니는 성에 있는 4개의 문으로 나갔다가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 모습, 사람들이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 이후 그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그물 속에서 살아 있는 동안 끝없는 고뇌와 괴로움을 겪어야 하는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이며 이런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이런 허무한 인생보다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진정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그는 29세에 가족과 지위를 모두 버리고 출가하여 남쪽에 있는 마가다국으로 내려가 알라라칼라마와 우다카라마푸타라는 두 명의 선인을 차례로 찾아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라는 선정(禪定) 을 배웠다.

그것은 정신통일을 통해 하늘에 이르는 방법이었으나 석가모니는 이런 방법으로는 생사의 괴로움을 해
탈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다시 산으로 들어가 당시 출가자의 풍습이었던 고행에 전념했다.

보리수 아래의 싯다르타


하루에 쌀 한 톨, 물 한 모금 정도만 먹으며 수행을 하였지만 극단적인 절식과 금욕생활은 싯다르타에게 육체적인 고통 외에는 아무것도 안겨주지 못했고, 갖은 고통을 겪은 후 싯다르타는 당시 사람들이 믿어온 금욕생활은 결코 구원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좌선을 통해 구원의 방법을 찾기로 결심하고 보리수 밑에 앉아 참선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렇게
49일 만에 이 세상에서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터득하게 되었다.

그는 이제 깨달은 사람, 곧 불타 (佛陀)가 되었으며
'타타가타(진리에 도달한자)', 혹은 '석가모니'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석가'는 그가 속한 '샤키아(sakya)' 라는 민족의 이름이며, '모니(牟尼)'는 성자라는 의미의 '무늬(muni)'의 음사로 '석가족 출신의 성자'라는 뜻이다.

그 후 45년간 전국을 돌며 교화를 계속한 석가모니는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숲에서 죽음이 임박했음을 깨달았던 그는 제자들에게

"슬퍼하지 마라.

내가 언제나 말하지 않았느냐.

사랑하는 모든 것은 곧 헤어지지 않으면 아니되느니라.

제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말하리라.

제행(諸行)은 필히 멸하여 없어지는 무상법(無常法)이니라.

그대들은 중단 없이 정진하라.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이니라"​

라고 말한 후 눈을 감았는데 이것이 기원전 483년의 일이다.

석가모니의 사후 그의 유해는 다비(茶毘, 화장)되고, 유골은 중부 인도의 여덟 부족에게 분배되어 사리탑에 분장되었고, 이 사리탑은 중요한 예배 대상이 되어 후에 불탑신앙으로 발전하였다.

석가는 인도의 전통적인 종교관인 윤회와 업(業)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근본 가르침은 사성체설(四聖諦說)에 있다.

사성체란 이 세상은 괴로움으로 차 있다는 고체(苦諦), 괴로움의 원인은 욕망과 애착 때문이라는 집체(集諦), 괴로움을 떨침으로써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멸체(滅諦), 해탈된 상태를 얻기 위해서
는 팔정도를 행해야 한다는 도체(導體) 등을 말한다.

즉,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데 이것의 원인은 욕망과 애착이며 팔정도를 통해 이를 떨침으로써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팔정도는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신념, 바른 좌선을 말
한다.

락 밴드 '열반'(Nirvana)


즉, 부처의 근본 가르침은 인간 고통의 근본 원인인 애착과 욕심을 떨쳐버리고 마음의 평정, 높은 지식의 상태로 나아가 열반(涅槃)에 이르라는 것이다.

석가는 또 인도의 고유 계급구조인 카스트 제도를 부정했으며, 누구나 참선을 통해서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만민평등사상을 펴나갔다.

풀(full)소유


값진 제물도 필요하지 않고, 오직 정진과 참선만이 유일한 득도의 길로 제시되었으며 힌두교는 개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신이 간여하는 것으로 믿었으나 불교는 신을 믿지 않았으며 운명은 전생의 죄업의 결과로 여기며 무신론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다.

불교의 전파


석가모니가 죽은 후 불교는 점차 주변 국가들로 퍼져나가다가 기원전 3세기경에 이르러 아소카 왕이 불교로 개종한 후 전 인도에 급속하게 보급되었고,
그 후에는 동남아시아 전 지역과 아프리카, 중국과 한국, 일본에까지 전파되었으나 오히려 인도 본국에서는 그 세력이 쇠퇴하였다.

기원전 500년경부터 소멸되는 듯하더니 1200년대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소멸되었고, 그 자리를 힌두교가 대신 차지했다.

세계 4대 종교 중 하나인 불교는 이렇게 탄생하여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깨달음의 등불을 밝히고 있다.

한 왕자의 인생에 대한 물음과 고행, 참선을 통한 깨달음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열반으로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가 살았던 시대의 배경

아리아 민족의 유물


기원전 1500년경, 페르시아 북부를 중심으로 모여 살던 유목 민족인 아리아 족이 가축의 먹이를 구하기 위해 이동했다.

아리아 족의 이동은 선주민인 드라비다족과의 마찰을 불러일으켜 전쟁으로 비화되었고, 결국 무력충돌에서 승리한 아리아 족은 인도의 새 주인이 되었다.


선주민이던 드라비다 족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는데
아리아 족의 인도 침입과 그 후의 생활에 대해서는 문학작품 《베다veca》에서 참조할 수 있으며 이 시대를 '베다 시대'라고도 일컬으며 베다란 '성스러운 정신적 지식'을 의미한다.

아리아 족은 농경민으로 정착했다.

그러나, 주변 민족과의 전쟁이 잦아짐에 따라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게 되었고, 단순한 부족 공동체에서 군주제(君主制)로 이행되었다.

왕위는 세습적으로 계승되었고 부족회의나 원로회의가 왕권을 견제하였다.

또한 인종적 편견 주의를 도입시킨 카스트 제도를 만들었는데, 이는 인도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신분제도이다.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의 4계급으로 나누어지는 이 제도는 철저히 출생에 의해서 신분이 결정되었으며 계급 간의 이동이나 결혼 등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했다.


사제 계급인 브라만, 군인 혹은 정치적 지배 계급이었던 크샤트리아, 농공 상인인 바이샤는 아리아 족이 차지했으며 노예 계급이었던 수드라는 비(非) 아리아 족으로 이루어졌다.

이 신분제도는 인도의 일상생활, 풍습, 사상 전반을 폭넓게 지배했다.

이런 배경에서 석가모니가 태어날 당시까지 인도를 폭넓게 지배하던 종교는 브라만교였는데 브라만교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자연숭배라는 원시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들은 특히 제물을 바치는 것을 강조했는데 가족 단위로 제사를 올리기도 하고 전 부족이 대규모로 희생물을 바치기도 했다.

이런 브라만교의 형식적인 종교의식에서 이탈하려는 새로운 종교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우파니샤드 철학이다.

이들은 제물을 바치는 종교의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참된 지식을 통해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브라만교는 만인을 포용할 수 있는 종교가 아니었기에 값비싼 제례와 엄격한 계급제도, 사제 계급의 횡포는 하층민들에게 분노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고, 자이나교와 불교 같은 신흥종교들이 일어난 원인이 돼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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