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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바머' : 우편물 살인마

MeRCuRyNim 2023. 3. 17.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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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이야기할 살인마

'유나바머(UNA Bomber)'

'시어도어 카진스키(Theodore John kaczynski)'는 실제로 하버드 대학 수학천재 출신에 나름 자기만의 신념도 있는 자였다.

그렇다면 범접할 수 없는 지능의 소유자였던 '우편물 살인마, 유나바머'는 어떠한 이유로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일까?


1978년부터 1996년까지 시어도어 카진스키가 만든 사제 폭탄은 무고한 생명과 국가를 위협했다.

그 방식은 우편물을 이용한 것이었으며, 수취인이 가족과 함께 탁자에 둘러앉아 소포를 개봉하는 순간 안에 들어있던 폭발물이 폭발했다.

그는 어떻게 최고 법 집행 기관의 수사망을 20년 가까이 피해 다닐 수 있었을까?

아마도 수사관들은 명망 높은 수학 박사가 무자비한 폭발물 살인범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더욱이 카진스키는 수도와 전기는 물론이며 실생활에 필요한 기기들도 없이 생활하며 사제 폭탄을 만들어 범죄를 일으켰으니 도리어 카진스키를 의심하는 것이 이상해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그를 살인자로 만들었던 것일까?

사건이 종결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카진스키를  미치광이로 살인자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카진스키를 단순한 미치광이로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복잡한 인간이었으며, 악명 높은 이 범죄자는 가족들의 도의적인 행동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잡히지 않았을 것이다.

시어도어 카진스키는 실제 그의 이름보다 유나바머란 별명으로 세상에 유명세를 떨쳤다.


1996년 봄, FBI와 다른 기관들의 비밀 요원들이 몬태나 주 링컨의 작은 산악 마을과 시어도어 카진스키의 오두막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카진스키가 미국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었던 범죄자 유나바머라고 믿었다.

그는 20년 가까운 기간 동안 무자비한 폭탄 테러를 자행하며 무고한 사상자를 냈고, 그를 쫓는 FBI의 수사망을 유유히 빠져나가고는 했는데 흥미롭게도 카진스키는 미 정부를 조롱하고 반기술주의를 주장하는 편지를 보내며 미국 지명수배자 명단에 올라가 있었다.

그렇게 수사관들은 미국에서 최장기간 동안 자행된 범죄를 종결짓기 위해 4월 2일 정오부터 자정까지

FBI 및 특수 기동대와 미군의 폭발물 처리반을 포함해 요원 100여 명이 몬태나 주 링컨의 오두막 근처로 숨어들었다.

요원들은 카진스키의 의심을 사지 않고 그를 오두막 밖으로 유인하려 했는데 혹여 카진스키가 총기와 폭탄을 소지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유나바머의 오두막


수사반장인 맥스 노엘(Max Noel)은 산림 경비 대원인 제리 번즈(Jerry Burns)의 도움을 받아 카진스키를 밖으로 유인하려 했다.

제리는 카진스키의 문 앞에 서서 이렇게 소리쳤다.

"카진스키 씨 안에 있나요?

산림 경비 대원 제르 번즈입니다.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번즈는 오두막 밖에 서서 밖으로 나와달라며 정중히 부탁했고,이에 카진스키가 외투를 챙기려 등을 보이는 순간 요원들은 재빠르게 침투하며 그를 체포했다.

카진스키는 그동안 도피하며 쌓아온 악명이 무색해질 정도로 너무도 쉽게 붙잡혀 버렸다.

FBI 역사상 최대의 수색작전은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유나바머의 범죄행각들은 이미 미국 사회에 씻지 못할 상처를 남긴 후였다.


1978년 어느 날,
한 여성이 일리노이 대학 주차장에서 버려진 소포를 습득했다.

이 소포는 교내 경비원에게 맡겨졌고, 그가 소포를 개봉하는 순간 폭발했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경미한 부상만 입었다.

약 1년 후 노스웨스턴 대학의 교정에서 한 대학원생이 기이한 모양의 담배 상자를 열었고, 이전의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 상자는 폭발했지만 이번에도 사상자는 없었다.

폭발로 인한 큰 희생자가 없었기 때문에 분명 의도적인 폭발 사고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수사당국은 이 두 건의 테러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79년 11월 15일,
FBI의 이목을 집중시킨 유나바머에 의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시카고 공항에서 출발하는 아메리칸 항공 444편은 워싱턴 DC를 향해 이륙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승객들은 기내에서 쾅! 하는 커다란 굉음을 들었고 , 우편물들이 적재되어 있던 화물칸으로부터 올라온 연기가 객실을 가득 채우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번에도 역시 운이 좋았던 탓인지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보내진 폭탄은 밀봉 결함으로 인해 뇌관이 터졌을 때 폭발하지 않고 불길만 타올랐을 뿐이었다

덕분에 비행기의 기체 손상은 없었고 승무원들은 연기를 인지함과 동시에 비행기를 즉시 착륙시키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초기 수사관이었던 존 콘웨이(John Conway)
는 폭탄이 대형 참사를 일으켰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그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는데, 만약 폭탄의 결함이 아니었다면 비행기는 추락했을 것이고 승객들이 전원 사망하는 큰 비극을 초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존 콘웨이


FBI는 소포가 시카고에서 발송되었으며, 폭탄이 나무상자, 전등선, 건전지 그리고 나무 못 등 이전 사건들과 동일한 재료로 제작되었다는 것과 과학 수사대의 조사 결과 연속된 3건의 폭발 사건이 동일범의 소행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폭발물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건전지나 고무줄, 성냥 머리 등 매우 원시적인 재료들로 제작된 것들이었다.

또한 범인은 발각될 단서를 없애기 위해 부품들에서 식별이 가능한 표식들을 전부 제거하거나 부품을 직접 제작해 사용했던 것으로 여겨졌다.

4번째 폭탄에 사용된 부품들은 더 불가사의했다.

1980년 6월 10일

유나이티드 항공의 퍼시우드 사장(United Airlines President Percy Wood)은 얼음 형제(Ice Brothers)라 적힌 책이 담긴 소포를 뜯었다.

그 순간 강한 폭발과 함께 금속과 나무 파편이 그의
얼굴과 다리에 박혔지만 빠른 시간 내에 구조대가 도착하면서 퍼시우드는 겨우 목숨을 건졌다.

퍼시우드 사장이 폭탄보다 먼저 받은 편지에는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책을 받게 될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얼음 형제와 이 편지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번 폭발사건은 나무에 많은 암시가 담겨 있었는데
폭탄의 재료가 나무였고, 피해자의 이름 또한 나무를 뜻하는 우드(Wood)였으며 반송지 주소에도 우드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책 안쪽에 꽂아 두었던 작은 금속 판엔 'FC'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는 이후 매 테러마다 폭탄 제조자가 자신임을 알리는 징표가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피해자 퍼시우드의 경력이었다.

유나이티드 항공의 사장이었던 그는 최근 항공사 직원 수천 명을 해고하며 신문에 그 이름이 오르내렸던 자였다.

이는 초기 FBI의 수사 방향을 설정해 줄 단 하나의 중요한 단서였고 수사기관들은 해고에 불만을 품은 항공사 직원의 소행일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이 가설에 힘을 실어준 것은 법의학적으로 봤을 때 사용되었던 폭탄의 제조 방식이 항공 산업의 특정 분야에서 사용되는 방식과 유사하다는 점이었다.

처음부터 4번째 공격까지 범인은 우편물을 이용해 범행을 저질렀으며 앞선 두 번은 대학 관계자를 노렸고, 나머지 두 번은 항공업계 종사자를 노렸다.

그래서 FBI는 대학(UNiversity), 항공사(Airlines) 단어의 앞 글자를 따 이 사건을 유나밤(UNA Bomb)이라 명명하고 추후 이어질 폭발 테러를 막기 위해 사건 해결에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처럼 서서히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던 이 테러리스트는 이후 강박 관념, 뛰어난 두뇌와 교란 능력으로 미국 역사상 가장 도발적인 범죄자로 꼽히게 된다.​


유나바머가 범죄의 전문가라는 점은 처음부터 분명해 보였는데 사용된 사제 폭탄은 영리하고 수완이 뛰어나며 남을 속이는 능력까지 겸비한 자의 솜씨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체국 직원의 지문이 우표에 남아 있을 경우 지문으로 우표를 구한 우체국을 추적할 수 있다는 것을 내다보았고 자신을 추적하지 찾지 못하도록 특수한 방법으로 우표를 처리하기도 했다.

그 덕분인지 실제로 4번의 폭발 사건이 발생한 후에도 FBI는 이렇다 할 단서를 찾지 못했다.

그나마 그들이 수상하게 여긴 단서들은 수사망을 빠져나가기  위해 흘렸던 거짓 단서에 불과했고,
유나바머는 수사관들을 유린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퍼시우드를 공격한 사건 이후에도 수사에 진전을 보이지 못했던 FBI는 결국 행동분석 전문가들에게 의뢰해 범인을 프로파일링 해보기로 결정했다.

분석 결과로 지목된 용의자는 18살에서 22살 사이의 남성으로 물리학이나 공학 교육을 받은 중상류층의 학생으로 완벽히 실패한 분석이었다.

퍼시우드를 공격했을 당시 카진스키는 마흔 살에 가까운 중년이었던 데다 무일푼으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유나바머, 시어도어 카진스키는 친동생 데이비드 카진스키(David kaczynski)를 비롯한 가족들에게도 신비에 둘러싸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시카고에 살았던 폴란드 계 부모에게서 태어난 카진스키는 어릴 적에는 신동으로 불렸는데 그는
5학년 때 받은 아이큐 테스트에서 167이라는 놀라운 수치를 기록하며 줄곧 천재 소리를 들었다.​

그는 두 학년이나 건너뛰며 무려 15살에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다.

열악했던 주거 환경을 고려해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개천에서 용난 셈'이었다.

그는 입학 후에도 모든 방면에서 두루두루 뛰어난 학업 성취도를 보였다.

왼쪽이 어릴 적의 유나바머, 시어도어 카진스키


그리고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그는 담당 교수들을 오랫동안 괴롭혀 왔던 복잡한 수학 정리를 풀어내며 미시건 대학에서 수학 박사 학위도 수여받았다.

그는 이 논문으로 상을 받았으며 논문은 출판되기도 했다.​

수학계의 떠오르는 스타였던 카진스키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한 버클리 대학은 그에게 종신 교수직을 제안했지만 카진스키는 1960년대 대학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금방 그곳을 떠나고 말았다.​


학자의 삶으로는 자신이 이룩하고픈 야망을 충족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던 카진스키는 마침내 유나바머란 테러범으로 새롭게 그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반기술주의 운동을 위한 자금을 마련할 동안만 대학에 머물렀고, 그동안에도 착실히 자신의 폭발 테러 계획을 준비해 나갔다.

1971년의 어느 날,
카진스키는 몬태나 주 링컨 외곽에 작은 오두막을 지었다.

처음에는 문명과 동떨어져 고요한 숲속 생활의 행복감에 취해 마음이 흔들렸던 그였지만, 이따금씩
들려오는 오토바이 소리와 비행기 소리 등 기술 사회의 침입을 받자 그는 이내 사람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계획을 계속 진행해 나갔다.


카진스키는 자신의 오두막에서 자전거를 타고 링컨 시내로 이동 후 그다음엔 버스 정류장에서 서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몬태나 주의 미줄라로 갔다.

이것이 그가 폭탄 테러를 감행함에 있어 이동했던 일반적인 동선이었다.

주도면밀했던 그는 평상복을 따로 챙겨오곤 했는데 주로 정장과 흰색 셔츠였고 넥타이까지 착용했다.

그는 미줄라의 모텔에서 몸을 씻고 버스에 올라탄 후
추적을 피하기 위해 베이 지역이나 새크라멘토 등 아무 곳으로 나가 폭발물이 든 소포를 우체통 안에 넣어두곤 했다.


앞선 4건의 테러 이후에도 1981년부터 1985년까지
대학을 겨냥한 폭탄 공격은 4차례 더 이어졌지만,
살상을 목적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폭탄 테러들은 경미한 부상만을 남겼을 뿐이었다.

9번째 폭탄이 워싱턴 주에 있는 보잉의 항공기 생산 시설에 발송되었을 때는 이를 주의 깊게 관찰했던 관련 직원의 신고로 인해 역시 실패로 끝났는데 현장에
도착한 폭발물 해체반은 무려 6시간에 걸친 긴 작업 끝에야 카진스키의 폭탄을 무력화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사용된 폭탄은 살상 반경이 6m에 이를 정도로 강력했는데 이를 본 법의학자들은 상황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해가 거듭할수록 그의 폭탄 제조 기술은 더욱 정교해졌고, 성냥 머리와 무연 화약을 이용하여 제조한 보잘것없었던 폭탄들이 이제는 알루미늄 분말과 질산나트륨을 이용한 폭탄으로까지 발전했기 때문이었다.


1985년 12월,
결국 첫 번째 사망자가 발생했다.

컴퓨터 상점을 운영했던 휴 스크루튼(Hugh C. Scrutton)은 못을 박아놓은 강력한 폭탄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의 폭탄 제조 기술은 파편으로 사람을 죽이기 위한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고, 이는 나중에 발견된 그의 일기 내용 상에도 '마침내 자비로운 살인 방법을 찾아냈다'라고 적힌바 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첫 번째 사망자 휴 스크루튼.

결국 사망자까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한 당국은 실낱같은 단서라도 필요했기에 시민들에게 적극적인 신고를 부탁하며 24시 직통 제보 시설을 개설하고 현상금을 내걸었다.

유나바머의 테러가 시작된 지 10년 가까이 될 무렵까지도 FBI는 여전히 사건 해결의 가닥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당시 수사관이었던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유나바머가 마치 투명 인간인 것 같았다고 한다.

하지만 1987년,
솔트레이크 시티에 12번째 폭탄이 설치되었을 때 드디어 첫 번째 단서가 포착되었다.

마침내 목격자가 나타난 것이었다.


당시 현장 근처에서 창밖을 보고 있던 한 젊은 여성은 폭탄을 두고 사라지는 유나바머를 눈앞에서 목격했는데 이 폭발로 인해 컴퓨터 상점 사장이었던 개리 라이트(Gary Wright)는 목숨을 잃을 뻔했다.

수사관들이 확보한 인상착의로 그려진 것이 바로 아래의 몽타주다.

이제 수사관들은 수사가 시작된 이래로 처음 희망을 갖게 되었고, 미국 우편국이 유나바머의 현상금으로 5만 달러를 내걸자 신고 전화는 더욱 빗발쳤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FBI는 더 이상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의 행동은 계속해서 수사관들을 혼란에 빠뜨렸는데
일반적으로 자신의 범행을 과시하려는 다른 연쇄살인범들과 달리 그는 당국에 어떤 연락도 하지 않았으며 철저히 자신을 감추고 다녔다.

그러던 1988년의 어느 날,
그는 더욱 놀라운 행동을 보이는데 바로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는 것이었다.

이후 6년 동안 그는 더 이상 폭탄 테러를 감행하지 않았고, 유나바머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차차 잊혀만 갔다.


연쇄살인 사건은 대부분이 젊은 시절의 범죄로 끝이 나는데, 어떠한 경우에는 범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적지 않기에 대체로 연쇄살인범의 생애는 매우 짧은 편이라고 한다.

그 때문이었는지 많은 수사관들은 그가 우발적인 자살이나 또는 자연사로 생을 마감했거나 아니면 마음을 고쳐먹었을 것이라 생각했고 자연히 수사는 시들해져 갔다.

대부분의 수사관들은 이 사건은 이미 종결된 것과 다름없다고 간주하였고, 그러한 분위기 탓에 당국에서도 이 사건은 더 이상의 수사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존 콘웨이는 범인이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며 사건을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다.

결국 존의 생각은 옳았다.​

테러가 멈춘 6년 동안 사건에 투입된 요원의 수는 줄어든 반면, 유나바머는 자신의 폭탄 제조 기술을 더욱 발전시켰다.

유나바머가 실제로 제작했던 폭탄


1993년 유나바머는 맹렬한 기세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복잡한 화학물질을 이용한 소형 폭탄 두 개를 만들어 대학교로 보냈고 그곳의 과학자 두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새로운 폭탄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온도가 3800도까지 상승하는 가스가 폭발과 함께 순식간에 분출되었고, 폭탄의 파편과 기체는 인치 당 700톤의 압력과 시속 20000km가 넘는 속도로 날아가며 희생자들을 강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후 이어진 두 번의 폭탄 테러는 더 큰 희생을 초래했는데...

1994년 성탄절 2주 전,
골프용품으로 착각하고 소포를 개봉했던 뉴저지의 사업가 토마스 모저(Thomas Mosser)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이전 사건의 4개월 후인 1995년 4월 24일에는 캘리포니아의 목재업 로비스트 길버트 머레이(Gilbert Murray)가 그의 테러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길버트 머레이


범인의 정체도 밝히지 못했고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사건이 연달아 터지며 사람들이 희생되자 FBI 수사관들은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이를 지켜보며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던 법무장관 자넷 리노(Janet Reno)는 결국 유나바머 사건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두었고 연방 사법 수사기관 세 곳의 힘을 모은 유나바머 수사본부를 개설했다.

하지만 많은 요원들이 이 사건에 관여되는 것을 꺼려 했는데 당시 유나바머는 해결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견해가 그들 사이에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들 쉬쉬하고 있을 때 1994년 10월,
FBI 수사관이었던 테리 투르치(Terry D. Turchie)는 상부의 명령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유나바머 사건의 지휘권을 이어 받게 된다.​

테리 트루치


1995년 6월,
유나바머는 새로운 정체성을 드러내며 다시 등장했는데 흥미롭게도 당시 그는 '산업사회와 미래'라는 56쪽 분량의 논설을 뉴욕 타임즈와 워싱턴 포스트에 보냈는데, 이는 후에
'유나바머의 성명서'라고 불리게 된다.

수사본부가 성명서를 입수하고 유나바머가 성명서를 통해 대화를 시작한 1995년, 사건은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유나바머는 자신이 저술한 현대 기술 사회를 비난하는 35000 단어의 성명서를 당해 10월 1일까지 출판해 준다면 테러를 멈추겠노라 제안했다.

실제 유나바머의 성명서


그의 성명서는 현대 사회에 대한 굉장한 분노를 표출하는 듯했다.

"기술을 지닌 인류는 포도주 병을 들고 있는 알코올 중독자와 같고 악취를 풍기는 사회는 차라리 내다 버리는 편이 훨씬 낫다.

또한 사방에서 정신 조작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사회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인간의 인간의 행동을 통제할 것이다."


위의 글은 실제 그의 성명서에 적힌 내용이다.

더불어 그는 환경재앙을 예견하고서 이렇게 언급했다

"누구나 언젠간 죽어야 한다.

길고 의미 없는 삶을 사느니 차라리 대의를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이 낫다."



너무 단순하고 어이없는 성명서라는 주장도 많았지만
그의 반기술주의는 우리 문명사회가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유나바머의 성명서는 인터넷을 통해 광범위하게 퍼져나갔고 주요 언론매체들까지 관심을 보이며 이내 빅 이슈가 되었다.​

나아가 이 덕분에 유나바머는 당시 일부 시민들의 숭배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이제 FBI는 유나바머가 단순한 연쇄살인범이 아닌 위험한 정치 운동가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한편 상반된 범죄자 유형 분석과 쌓여있는 쓸데없는 자료들에 실망한 테리는 FBI 정보팀의 캐슬린 퍼켓(Kathleen Puckett)에게 부탁해 성명서를 더욱 면밀히 조사하게 했다.​

심리학과 대 간첩 분야에서 오랜 경력을 자랑하던 캐슬린은 이내 유나바머의 글에서 중요한 정보를 찾아낼 수 있었다.​

조사를 맡았던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유나바머는 한마디로 자아도취와 지적 우월감에 빠져있는 인간이었다.​

캐슬린은 그의 성명서를 일종의 솔직한 자서전이라고 보았고 유나바머의 사상 속에 감춰진 훨씬 많은 것들을 들춰냈다.

캐슬린 퍼켓


그의 글에서 가장 일반적인 주제는 사회에서 학대당한 어린아이였는데 캐슬린은 이것이 불행한 경험을 했던 유나바머 즉 자기 자신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나아가 그녀는 유나바머가 이런 심리적 불만을 현대 기술 사회에 투영했고 반기술주의를 표방하기에 이른 것이라 보았다.

테리와 캐슬린은 이 문서를 세상에 공개할 경우 유나바머의 정체를 알아차릴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섣불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연쇄살인범과 타협해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는 최악의 전례를 남길 것일 뿐만 아니라 어떤 수사관도 테러를 중단하겠다는 유나바머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의견을 번복하길 몇 차례,
결국 테리와 수사관들 그리고 상부까지도 유나바머의 성명서 공개에 찬성했고 이내 워싱턴 포스트와 뉴욕 타임즈에 의해 문서가 출판되었다.

도박과도 같았던 이 결정은 수사기관이 악질 테러범의 손에 놀아났다는 비웃음을 살 수도 있었지만, 이미 결정은 내려졌고 이제 남은 문제는 이 위험한 도박의 성공 여부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1995년 9월,​
유나바머의 성명서는 전 세계 독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았고 그 결과 수사본부로 2만여 건의 신고 전화가 쇄도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남편, 애인 혹은 이웃이 유나바머일 것이라 의심했다.

출판된 그의 성명서가 세상에 나돌자 유니온 대학의 철학 교수인 린다 패트릭(Linda Patrik) 역시 성명서를 접하게 되었다.​

린다 패트릭은 바로 유나바머의 형제인 데이비드 카진스키의 아내로서, 성명서의 어조를 본 린다는 이내 남편이 친형 시어도어가 썼다며 보여준 편지를 떠올렸다.

데이비드 카진스키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아내는 유나바머에 관한 몇몇 기사를 읽었고 유나바머가 우리 형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어요.

처음에 저는 이렇게 말했죠.​

린다, 형에게 문제가 있긴 했지만 폭력적이진 않았어"


하지만 그 역시 성명서를 읽고 난 후에는 아내의 직감을 부정할 수 없었기에 그는 곧 형이 살아오면서 일으켰던 크고 작은 사건들을 떠올렸다.

왼쪽이 린다 패트릭, 오른쪽이 데이비드 카진스키


데이비드가 7살이 되던 해,
그는 형인 시어도어에게 친구가 별로 없는 이유를 그의 어머니께 물어보았다.

처음엔 대답을 회피하던 그녀는 데이비드가 납득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를 의자에 앉히고선 시어도어가 아기였을 적 겪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고 한다.

생후 9개월의 시어도어는 극심한 두드러기로 고생했고 두드러기가 이어졌던 열흘 동안 병원에 격리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시어도어가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병원에서 돌아온 이후 그가 더 이상 웃지도 않고 심지어 자신과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좋기 않은 기억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시어도어가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외톨이로 지낸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다른 대학 동기들보다 두 살이나 어렸고 집안이 부유한 편도 아니었다.

1950년대의 하버드 대학은 매우 고상한 곳이었는데 넥타이를 잘못 매거나 양말 위로 종아리만 보여도 그 사람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막 16살이 되던 해 셔츠와 바지 각각 두 벌씩만 챙겨들고 하버드에 입학했던 시어도어는 분명 학교 분위기에 잘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카진스키의 대학시절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사건은 불과 17살이었던 대학교 2학년 때 일어났다.

시어도어는 저명한 심리학 교수 헨리 머레이(Henry murray)가 이끄는 행동분석 연구에 참가하게 되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머레이는 CIA의 전신에서 일하곤 했는데 강도 높은 심문을 견딜 수 있는 첩보원 훈련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 후 하버드에 이 연구를 이어나가던 그에게 젊은 시어도어 카진스키는 많은 실험 대상 중 하나였다.​

심리학자 헨리 머레이


우선 연구팀은 시어도어와 다른 21명의 실험 대상자들에게 자신의 인생철학에 대한 수필을 쓰게 했다.​

그러고는 미리 준비된 다른 학생과 자신의 신념에 대해 토론케 했지만, 이것은 연구팀의 속임수였다.

연구팀이 내보낸 이들의 토론 상대는 다름 아닌 법대생이었고 각본대로 법대생들은 실험 대상자들의 견해를 비웃고 자존심을 건드리며 화를 돋우었다.

머레이가 진행한 프로젝트는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는 환경에서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극도의 스트레스에 노출시키는 부당한 실험이었다.

이러한 경험은 당시의 시어도어의 인격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그의 마음속에 심리학자에 대한 깊은 증오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증명하듯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감행된 그의 테러 대상 중 한 명은 실제로 저명한 행동 심리학자 제임스 멕코넬(James V. McConnell)이었다.

제임스 멕코넬


시어도어는 대학을 졸업한 후 성명서의 전신과 같은 23쪽의 논설을 작성했는데 여기서 자신이 참여했던 머레이의 실험같이 정부 지원을 받은 과학 연구와 기술을 맹렬히 비난했다.

더불어 그는 자신의 반기술주의 사상을 다른 학자들에게도 주입하려 했지만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고 결국 외면당해버렸다.

내성적인 성격의 그는 이에 모욕감을 느끼며 자신의 사상에 공감하지 않는 학자들을 증오하기 시작했고,
몇 년 후 유나바머가 된 그는 폭탄 테러를 협상 조건으로 내걸어 성명서의 공개를 요구했으며 마침내 그가 평생토록 원했던 반기술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약 3주 동안 린다와 저는 주의 깊게 성명서를 읽었고 쌓여있던 형의 편지들도 잔뜩 꺼냈어요.

저희는 거실 소파에 함께 앉아 린다가 성명서를 읽으면 저는 형의 편지와 그 내용을 비교했죠.

당시 저는 감정에 심각한 기복이 왔고 형을 의심하고 있는 스스로를 미쳤다고 생각했어요."


성명서를 유심히 읽어보던 데이비드의 눈에 두 문구가
눈에 띄었다.

'냉정한 논리학자(Cool-headed logicians)'와 ​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없다(You can't eat your cake and have it too)'라는 문구였는데 이는 그의 형이 자주 사용하곤 했던 문구였던 것이다.

깜짝 놀란 이들 부부는 탐정과 변호사를 고용해 전문가에게 시어도어의 필체 감정을 의뢰했다.

그리고 전문가들은 시어도어와 유나바머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감정 결과를 부부에게 전했다.


"만약 형이 유나바머란 의혹을 가졌음에도 저희가 가만히 있었다면 계속되는 우편물 폭탄에 무고한 생명들이 희생되었을 거예요.

반대로 형을 신고하고 결과적으로 유나바머임이 밝혀진다면 형은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죽거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게 될 것이었죠.

이는 제 손으로 형을 죽이는 셈이나 다름없었어요. "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데이비드와 린다는 옳은 일을 한다는 생각으로 의혹과 증거들을 가지고 FBI와
접선했고, 이렇게 시어도어 카진스키는 유나바머 수사본부에 2416번째 용의자로 등록되었다.


하지만 FBI 최고위층 수사관들조차도 시어도어 카진스키가 유나바머일 수 있다는 점에 의혹을 품었다.

언어적인 성향을 분석했을 때 시어도어 카진스키의 글에 성명서와 비슷한 사상이 담겨있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 모두 정황 증거일 뿐이었고, 사건 관련 전문가들조차도 역시 회의적이었다.

폭탄 제조범이 알루미늄 구성물을 만들려면 전문적인 주조소가 필요했지만 카진스키의 오두막엔 전기나 수도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사관들에게 있어 변변한 교통수단 하나 없는 용의자였던 시어도어는 처음에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용의자였다.

수사관들이 본격적으로 시어도어에게 집중하게 된 계기는 그가 대학 시절 작성했던 23쪽 분량의 반기술주의 표방 논문이었고, 논문의 내용에서 유나바머의 성명서와 유사한 내용을 발견한 수사관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침내 시어도어에게 모든 수사력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FBI는 또 다른 폭탄 테러가 발생하기 전에 발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이들은 먼저 데이비드에게 몬테나 주 지도를 건네며 시어도어의 오두막 위치를 알려줄 것을 요구했고,
위치를 파악한 FBI는 즉시 요원들을 파견해 시어도어 카진스키 체포 작전에 돌입했다.

요원들은 허름한 모습의 시어도어를 체포하면서도 그가 정말 유나바머가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유죄를 입증해 줄 결정적인 증거들이 곧 그의 오두막 안에서 마구 쏟아져 나왔다.

성명서를 작성할 때 쓰인 스미스 코로나 회사가 제작한 타자기와  모든 범죄 사실을 자세히 기록해놓은 일지, 막 발송 준비를 끝낸 폭탄 등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전례 없는 경제 호황과 미국의 신용이 최고조에 달했던 1996년, 미국 최악의 지명수배자 유나바머는 이렇게 체포되었다.

유죄를 입증하는 수많은 증거들과 직면한 피고 측에게 카진스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정신이상을 주장하는 것이었는데 변호인들은 오두막 내 음침한 실내 환경이 카진스키의 정신 장애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라고 보았다.

이들은 사람이 미치지 않고서는 문명에 소외되어 이런 생활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재판을 바라보는 카진스키는 변호인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반기술주의 사상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세상과 단절된 오두막에서 궁핍한 생활을 해왔던 그에게 자신의 생각을 토로할 수 있는 재판장은 완벽한 공개 토론의 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설령 이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잃는다 해도 그는 이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기에 전혀 후회하지 않을 기세였다.

카진스키는 재판장에서 자신의 의도와 반대로 대변했던 변호인들에게 이내 격분했고 재판장에서 연필을 던지며 소리 질렀다.

"당신들이 내가 미쳤다고 했소?"

그는 즉시 변호인단을 해고하고 스스로를 직접 변호하겠다고 나섰다.

이 때문에 법정은 발칵 뒤집혔고 재판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골머리를 썩던 재판관은 카진스키의 정신 상태를 최종 감정할 심리학자로 셀리 존슨(Dr. Sally C. Johnson)을 임명했다.

존슨은 일주일에 걸쳐 총 22시간의 면담 이후 그에게 망상형 정신 분열증이라는 진단을 내렸고, 병세가 일시적 진정 상태라 재판을 받을 순 있지만 명백히 정신 장애가 있음을 덧붙였다.

물론 카진스키 본인은 자신이 미쳤다고 전혀 생각지 않았지만 재판장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들어주려 하지 않았고, 그렇게 유나바머, 시어도어 카진스키는 결국 제대로 된 재판도 없이 사형 판결 대신 종신형 선고를 받게 되었다.


이 판결은 미국 국민들에게 재앙과도 같았다.

재판 자체가 도중에 중단되었기에 범행을 저지른 이유에 대한 동기조차 들을 수 없었고, 이 때문에 카진스키는 이제 영원히 비밀 속으로 감춰져 버렸기 때문이다.​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유나바머 사건은 카진스키를 그 모델로 삼아 '외톨이 늑대(A lone wolf)'라고 불리는 새로운 범죄자 유형을 탄생시키며 이렇게 끝이 나버렸다.


종신형 판결을 받기 전, 카진스키는 희생자 가족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슬픔을 전해 들었지만 어떤 반성의 기미도 내비치지 않았다.

범죄자이기 전에 형제였으며 삶을 함께 하며 그와 함께 나눈 소중한 추억들이 있기에 시어도어가 법정을 떠나는 순간 동생인 데이비드는 형과 마지막으로 만나보려 했다.

하지만 시어도어는 동생과 어머니께 한마디의 말도 없이 법정을 빠져나가버렸다.

그리고 콜로라도 주 플로렌스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제 카진스키는 평생 종신형을 살며 자신이 일으킨 범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기꺼이 죽음도 불사하고자 했던 그였기에 종신형이란 형벌은 카진스키에게 있어 더 가혹한 형벌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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