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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인의 대학살을 시도한 유대인 조직 '나캄'

MeRCuRyNim 2022. 12. 19.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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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 믿는 구약 모세의 율법엔 명료한 교리가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Nakam 히브리어로 복수라는 뜻이다.

Dam Yehudi Nakim '유대인의 피에 대한 복수'라는 문장에서 따왔다.

나캄은 이들 유대인 조직의 이름이다.


조직의 초대 리더는 압바 코브너로 그는 게토 출신의 유대인이었다.

나치는 그의 조국을 침략했고, 그는 나치에 의해 유대인 강제 수용 구역인 게토로 강제 이송된다.

"도살장에 가는 어린양들처럼 가지 말라"

2차 대전 중인 1942년 그는 가난과 기아의 소굴이 된 게토에서 선언문을 발표한다.

압바 코브 너는 히틀러의 목표가 전 유럽의 유대인을 절멸 상태로 만드는 것이라 예언했고, 저항군을 지금이라도 조직해야 한다며 유대인과 유대 사회 지도자에게 호소했다.

하지만 유태 지도자들은 목숨이 아까워 코브 너의 호소에 반대했고, 코브너는 도시를 탈출해 숲에 들어가서 게릴라 활동을 하게 된다.


코브너가 게릴라 활동을 할 무렵 나치는 본국에서 '반제 회의'를 개최했다.

※ 반제 회담

반제 회담은 1942년 1월 20일 베를린 교외 반제에서 개최된 나치 독일 차관급 수뇌부의 회합이다.

회담을 소집한 것은 국가보안 본부장 상급 집단지도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로, 그는 이 자리에서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 실행을 위한 각 행정부처 장들의 협조를 담보받으려 했다.


이 회의에서 그들은 지도자의 의지에 따라 본국의 유대인 600만 명, 더해서 지금 침공하고 있는 소련 영토 내 500만 명을 더해 1100만 명의 유대인을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반제 회의에 참여한 나치 고관 15명 중 14명은 스스로 기록을 모두 파기했고 이후 히틀러 암살 미수에 참여한 마르틴 루터 외무성 차관은 기록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전후 미군 조사단이 발견한다.

나치가 반제 회의로 학살을 공식적으로 결정하기 전에도 나치 친위대는 소련의 점령지에서 자발적으로 학살을 하고 있었다.

1941년 포나리 학살에서 총 십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하며 이때 압바 코브너의 일가친척도 몰살당한다.


나캄의 후대 리더이자 행동 대장인 조세프 하마츠는 나치가 유대인 절멸을 위해 게토를 청소하기 직전
좁고 더러운 오물 하수구를 동료들과 기어 나와서 탈출한다.

그의 가족은 그런 하수구로 탈출할 수 없었다.

"자살하고 싶었지만 그 안에서 죽으면 뒷사람이 내 시체 때문에 빠져나갈 수 없기에 죽을 수 없었다"

조세프 하마츠의 아버지는 게토에서 자살.

동생들은 강제 수용소로 이주된 뒤 학살당한다.

그가 비좁은 오물 하수구를 팔꿈치로 기어 나와 빠져나간 곳은 숲 속이였다.

하마츠는 그곳에서 파르티잔 리더이자 나캄의 수장 압바 코브너를 만나게 된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들은 넘치는 증오심으로 파르티잔 작전을 훌륭히 수행한다.

뒷줄 한가운데의 마른 청년이 리더 압바 코브너다.

물론 나치도 이들을 이 잡듯이 죽였다.

이들이 활동한 무대는 리투아니아라는 곳인데 전쟁 전 유대인이 4만 명 살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불과 유대인은 수백 명만 남게 된다.

모두가 가족을 잃었다.

폭격으로 부숴진 총통 관저를 바라보는 히틀러

전쟁에 패배한 1945년 5월 히틀러는 스스로의 관자놀이에 방아쇠를 당겨 자살한다.

전쟁은 연합군이 이겼다.

연합군은 재판을 열기로 했고, 모두가 환호했다.

가족을 잃은 파르티잔들은 수많은 죄인들이 전부 심판받고 정의가 바로 세워지길 고대했다.

이에 부응한 건지 연합군은 나치 기관에서 일한 독일인 1300만 명 중 350만 명을 범죄 관련하여 기소한다.


다만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은 복수심에 가득 찬 유대인들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나치는 우리 아이들의 다리를 붙잡아 들고는 그대로 전봇대에 머리를 박아 죽이곤 소각로에 집어넣었다"

재판도 없이 유대인을 잔인하게 죽였던 나치들은 분에 넘치게도 미국식 민주적 형사 재판을 받게 되었다.

독일 변호사들은 열심히 변호했고 재판에 선 185명 중 사형 선고를 받은 건 25명뿐이었다.

기소된 350만 명 중 250만 명은 재판 없이 풀려났고 나머진 벌금형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4년 뒤,

1949년 감옥에 있는 나치는 300명에 불과했다.

연합국은 서독을 재건시켜 소련에 맞서게 하려 나치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압바 코브너는 전후 베를린의 거리에서 독일의 주부들이 유모차에 애들을 태우고 다니며 배급된 우유의 지방 함량을 따져가며 아이들에게 먹이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의 가족의 옷을 벗겨 가스실로 끌고 간 나치 군인이나, 수용소 샤워실의 독가스 밸브를 연 군인들, 그 옆에서 농담을 낄낄거린 군인들은 집에 돌아와서 평화를 즐겼다.

코브너가 볼 때 '신의 정의'가 바로 세워지지 않았다.


코브너의 증오심에 파르티잔의 멤버들은 공감했다.

드디어 그들은 이름을 나캄으로 바꿨다.

연합군이 만든 강제 수용소의 비디오를 돌려보며 독일인에 대한 복수를 하기로 결정했다.

다행히 전후라 치안은 무너지고 모든 게 허술했고, 나캄에겐 무기도 그대로 있었다.

나캄은 영국군 행세를 하며 심야에 급습해 나치들을 잔인하게 처형했다.

의료인 행세를 하며 병원에 잠입해 나치들의 혈관에 석유를 주사해 고통에 차서 죽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코브너의 성에 차지 않았다.

'모세의 율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설파했는데
이 속도로 어떻게 죽은 유대인의 숫자만큼 원한을 갚는단 말인가?'

코브너는 뮌헨 베를린 바이마르 뉘른베르크 함부르크 상수도에 대량의 독극물을 살포해서 독일인을 대량 학살할 계획을 세웠다.

모두 나치의 지지세가 강한 도시였다.

코브너는 급수망의 도면을 확보해 독일인 거주지에만 독극물을 살포할 계획을 세웠다.

나캄의 조직원을 직원으로 잠입시켜 철저하게 연구했고. 독극물만 있으면 바로 실행할 태세를 갖췄다.

목표는 독일인 600만 명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한 대량의 독극물은 국가만이 보유할 수 있었고, 마침 그들에게 도움을 줄 국가가 나타났다.

코브너는 커다란 배를 타고 세계적 유대인 화학자 하임 바이츠만이 초대 대통령이 있는 이스라엘로 향했다.

코브너는 원하는 대로 비소를 얻었고 만면에 미소를 띠며 유럽으로 출항했다.

이후 바이츠만은 독이 핵심 나치 당원들 몇 명에게만 사용되는 줄 알았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비소를 싣고 가던 코브너는 유럽으로 가던 중 영국 경찰에게 체포된다.

체포된 경위에 대해선 독일인에 대한 보복과 집단 테러가 이스라엘 건국 여론에 악영향을 끼칠 거라 생각한 다른 유대인이 밀고했다는 설이 있다.

비소는 전부 바다에 버려지게 된다.

하지만 계획은 실패한 게 아니었고, 플랜 A가 실패했을 뿐이다.


코브너가 체포된 이후 조세프 하마츠는 플랜 A가 실패할 경우 플랜 B를 실행하라고 이미 지령을 받은 상태였다.

플랜 A가 독일 국민에 대한 무차별 대량 학살이라면 플랜 B는 '슈탈리크 13'을 겨냥한 작전이었다.

당시 연도는 1946년이었고. 1949년이 되면 많은 나치 전범들이 풀려나지만 이때 '슈탈리크 13' 수용소에는 1만 5천에 달하는 나치 친위대 전범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또한 그들은 이스라엘로부터 받아야 할 대량의 비소는 없었지만 알뜰히 모아놓거나 제작한 비소가 있었다.

상수도에 풀어 600만 명을 죽이기엔 훨씬 못 미치지만 대략 6만 명 정도 죽일 양을 보유하고 있었다.


계획은 간단했다.

1. 누가 봐도 아리아인처럼 생긴 유대인 나캄 대원 아리에 디스텔을 '슈탈리크 13' 수용소 빵 공장에 위장 취업시킨다.

2. 비소와 풀을 섞은 독극물을 매일 식사로 제공될 3000개의 빵에 바른다.

3. 수용소의 나치들은 빵 하나를 네 명이 나눠 먹는다는  정보는 이미 입수했다.

총 만 이천 명이 죽을 것이다.

미군 간수들은 흰 빵을 먹고 나치들은 검은 빵을 먹는다고 하니 검은 빵에만 바르면 된다.

나캄 대원들은 1946년 4월 13일 밤에 침입하여 뛰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두 시간 동안 3000개의 빵에 모두 독극물을 바르는 데 성공했다.

그들에게 살인죄를 저지른다는 감정과 죄책감은 전혀 없었다.

600만은 죽이지 못하더라도 만 이천이나 되는 나치를 죽일 수 있게 되어 행복감만을 느꼈다.

되려 그 정도는 죽여야 천국에서 맞이한, 학살당한 그들의 동족과 가족 앞에서 원한을 갚았노라 떳떳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날 아침 나는 수용소에서 죽은 내 가족을 생각했다. 일이 성공할걸 생각하자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계획은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뉴욕 타임스는 미군 주둔 사령부 정보를 인용해서
'비소 빵에 전범 수감자 2283명이 중독되어 207명은 후방 병원으로 후송당했다'라고 보도되었다.

그리고 후송당한 나치 중 죽은 나치는 없었다.

행동대장 조세프 하마츠의 기대와는 달리 전범 수감자는 결국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비소와 풀 냄새에 이상함을 느낀 나치들이 빵을 먹지 않거나, 붓으로 바른 비소가 너무 적었다 등등, 먹더라도 맛이 이상하거나 배가 아프자 나치들이 더 이상 먹지 않은 것이 나치들이 죽지 않은 이유였다.


당시 독일 정부는 이들을 기소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직후 독일엔 나치의 멍에가 씌워져 지워지지 않은 상태였고, 독일이 유대인을 기소하고 독일 재판에 세우기가 껄끄러웠을 것이다.

사망자도 단 한 명도 없었다.

코브너는 이후 벌어진 이스라엘 - 중동 간 전쟁에서 대위로 참전한다.

그는 이스라엘에서도 홀로코스트에 대한 복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중동 전쟁에선 이집트에 대한 강경파로 유명했다.

60년대 이스라엘에서 열린 아이히만 재판에 참여해서 증언하기도 했으며, 디아스포라 박물관 홀로코스트 박물관 설계에 관여했다.

평생을 이스라엘에서 살며 87년에 후두암으로 생을 마감했으며, 시인으로도 활동했다고도 한다.


행동 대장 조세프 하마츠는 50년대까지 독일에 남아 해외 유대인의 귀국을 돕다 이스라엘로 귀화했다.

그곳에서 시오니스트로 살며 경제학을 전공해 프랑스 해운 회사에서 일하기도 하며, 노년에는 월드 ORT 런던 사무총장으로 유네스코나 유엔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위 독살 사건의 진상은 조세프 하마츠가 1998년에 출간한 자서전으로 명백히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600만의 독일인을 죽이는 것이며 나는 나치가 독일인과 별개라 생각하지 않으며 지금도 그리 생각한다"

그는 평생 후회하지 않았으며 아서 해리스의 드레스덴 폭격을 찬양했으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고 술회했다.

오히려 양심의 가책은 과거를 잊는 놈들이 느껴야 한다고 내뱉었다.

뉘른베르크 경찰은 2000년에 이 사건을 다시 조사했지만 기소하진 않았다.

그는 2016년 9월 22일에 향년 91세로 생을 마감했다.

하마츠는 그래도 자신이 그때 수용소 테러로 분명 3~400명 정도는 죽였을 거라 믿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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