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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다시 통일한 수문제 양견(楊堅)

MeRCuRyNim 2023. 8. 25.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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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제 양견(楊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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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다시 통일한 수문제 양견(楊堅)

수문제 양견(楊堅, 541~6044)은 북주(北周)선제(宣帝) 우문윤의 외척으로 정제(靜帝)에게 왕위를 양위받아 수나라를 건국했다.

문관시험에 의해 국가관리를 뽑는 제도를 제정했으며 개황율령(開皇律令)을 제정하여 당나라 시대까지 이어지는 관제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위진남북조라는 370년에 걸친 대분열의 시기에 마침표를 찍고 진시황제에 이어 두 번째로 중국을 통일한 인물이 바로 수문제 양견이다.

돌궐족(튀르크)과의 전투


그는 중국 대륙을 재통일했을 뿐만 아니라 북방의 몽골 족과 돌궐족(튀르크)의 세력도 약화시켰다.

양견은 541년 중국 북부의 한 호족 집안에서 태어나 북주의 황제를 섬긴 인물로서 중국 북부와 남부에 걸쳐 있던 서위의 수국공(隨國公)이자 대사공인 양충과 여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네 살에 처음으로 북주(北周)의 비 한족 세력 가문인 우문(宇文)씨의 문하로 들어가 군사경력을 쌓기 시작했고, 그 후 급부상하여 소궁백(小宮伯), 대흥군공(大興郡公)에 봉해졌고, 수주자사(隋州刺
使), 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기도 했다.

북제(北齊)


우문 가는 대단한 군사력을 발휘해 곧 중국 북부 전역을 장악했는데 양견은 북쪽 평원을 장악하고 있던 북제(北齊)를 정복하기 위한 전투에서 크게 활약했고, 그
보상으로 장녀를 북주 황태자 우문윤에게 출가시키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우문윤이 황위에 오르자 양견은 황장(皇丈)으로 큰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고, 580년 북주의 선제가 36세로 병사하자 손자 우문연이 황제가 되고 그는 섭정이
어 실질적인 권력을 갖게 되었다.

북주 황제 정제(靜帝)


하지만 그는 곧이어 황위를 넘보게 되었는데 양견은 대파 위지형(尉遲迪), 사마소난(司馬消難), 왕겸(王謙) 등을 제거하고 정권 독점에 성공한 후 581년 북주 황제 정제(靜帝)로부터 양위를 받아 연호는
‘개황(開皇)’이라 하고 국호는 ‘대수(大隋)'라 하여 나라를 세웠다.

수문제가 중국 통일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장안의 동남쪽에 웅대한 새 수도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남조(南朝)의 진(陳)


그는 남북조시대의 허약한 통치구조를 일소하고 강력한 중앙 정부를 건설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중국을 다시 통일하기 위해 당시까지 남아 있던 한인 왕조인 남조(南朝)의 진(陳)을 병합하기 위해 중앙집권 체제를 세우
기 시작했다.

향관(鄕官)과 주관(州官)


토착 호족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호족의 세습 권리 및 세력 유지의 온상이었던 향관(鄕官)과 주관(州官)을 폐지하였으며  587년에 수요가 늘어난 관리 후보자를 선발하기 위해 선거제도(選擧制度, 훗날의 과거제도)라는 문관시험제도를 만들었다.

이는 북주 시대부터 이미 유명무실화되었던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가 폐지되자 새로운 관리등용책이 필요해졌고, 지방관제의 개혁 및 통치
지역의 확대로 수요가 늘어난 관리를 제때 공급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청(淸)나라


선거제도는 과거 한 왕조 때 일시 실시된 제도로 한 왕조가 멸망한 후 그 맥이 끊어졌는데 수문제에 의해 부활된 이후 청(淸)나라 때까지 1,300년 동안 시행
되어 중국의 정치·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수문제는 자신의 출신 지역에 관리를 파견하지 않는 회피(回避) 정책을 폈는데 이는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개인의 세력 확장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개황율령을 발표하여 당나라 시대까지 이어지는 중국 관제의 기틀을 마련했다.

한편 수문제는 지속적이고 세부적으로 강남 지역을 정복할 준비를 해나갔는데 수군은 수륙(水陸) 양면 8로(八路)로 나누어 진을 공격해 589년에 복속시켰다.

이로써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강남 지역이 수에 편입되면서, 중국 대륙은 다시 한 번 대통일이 이루어진다.

60세가 되던 해인 601년에 수문제는 나라의 굳건한 기틀을 확립하여 제국은 안정되었고 백성들도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국가의 통제를 받는 관리들은 엄격하게 정해진 세금만을 징수했고, 각 지방은 규율을 충실히 이행하여 수도에는 인구가 점차 증가했고 해외 각국에서도 사절단이 찾아와 수의 세력이 넓어지고 있음을 증명해주었다.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


대외적으로는 장성(長城)을 축조하여 튀르크계(系) 돌궐의 침입에 대비했으며, 598년에는 요서(遼西)를 침범한 고구려를 정벌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진(陳)을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둘째 아들 진왕 광(廣)이 형인 용(勇)을 대신해 황태자가 되었다.


수문제는 말년에 자신이 살면서 저지른 죄에 대해 우울증에 가까울 정도의 죄의식을 느끼고 불교에 심취하게 된 그는 자신의 생일에 나라 전역에서 사치스
러운 불교의식을 개최하도록 했고, 불교사원에 값비싼 유물을 봉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604년 중국의 재통일을 이룬 영웅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일부 역사가들은 진왕 광이 아버지 문제를 독살했다고도 주장한다.

양광 아님

수문제는 왜 광에게 살해당했는가?


수문제는 원래 장남 양용을 황태자에 봉했으나 차남이었던 양광은 본시부터 황위에 대한 불타는 야욕이 있었다.

독고황후(獨孤皇后) 아님


그는 형인 양용을 몰아내고 황위를 차지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차례차례 진행해나갔는데, 우선 황후, 즉 자신들의 어머니인 독고황후(獨孤皇后)의 마음을 얻는 데 주력하면서 권신이었던 양소(楊素)와 결탁하여 틈만 있으면 황태자 양용을 모함했다.

천하를 다스린 태평성군인 수문제도 유독 자신의 아내인 독고황후만은 두려워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독고황후는 중국 역사상 가장 질투가 심한 왕비로 알려져 있으며, 수문제는 흔한 후궁마저도 제대로 들이지 못했다.

서인(庶人)이 된 양용 아님.


결국 그런 황후와 양소의 권고가 잇따르자 수문제는 양용을 폐해 서인(庶人)으로 만들었고. 새로운 황태
자의 자리에는 독고황후의 열렬한 지원을 받은 양광이 올랐다(600년).

604년, 수문제는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자 양광은 황제의 곁에서 지내던 양소에게 밀서를 보내 황제의 행동을 잘 지켜보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양광의 편지를 받은 양소의 답장이 잘못 전달되어 수문제의 손에 들어가게 되어버렸고
이를 본 문제는 크게 노하였다.

그는 4년 전 양용을 폐했던 사실을 후회하고 다시 그로 하여금 황위를 잇게 하겠노라고 밝히며 양용을 입궐시키라고 명했다.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한 양광은 오히려 침착한 움직임을 보이며 황제의 조서를 가짜로 조작하여 황제에게 힘이 될 만한 측근들을 모조리 잡아들이
고 황제 침실의 시종들을 모두 내보낸 후 자신의 측근을 몰래 잠입시켜 그를 주살하고 말았다.

진부인(陳夫人) 아님


형인 양용과 양용의 어린 아들 여덟 명도 모조리 죽여버렸으며 아울러 그날 밤 아버지 문제가 사랑했던 진부인(陳夫人)을 겁탈하는 패륜적인 행동을 보였다.

이런 변고를 알게 된 한왕(漢王) 양량(楊諫)이 군사를 일으켜 이에 대항하고자 했으나 양소의 군에 토벌되고 양량 역시 형인 양광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렇게 수나라는 양제의 손에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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