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파비우스는 원로원 의원 중 최고의 능력을 갖춘 인물 중에 한 사람이었다.
집정관을 이미 세 번이나 역임했으며, 개선식을 거행했고, 또한 전투 경험도 풍부하여 1차 포에니 전쟁과 북이탈리아에서의 식민지 전쟁에서도 사령관으로 복무했었다.
독재관으로 선출된 이유도 위의 업적들이 그 배경이었을 것이다.
독재관은 24명의 릭토르라 불리는 호위를 받는 엄청난 예우를 받는 직책이기도 하다.
로마의 시민들은 파비우스가 한니발을 저지해 줄 것을 간절히 바라고 바랬다.
시민들의 기대에 호응하기 위한 파비우스의 전략은 지금껏 한니발의 군대를 상대한 다른 집정관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우선 지형이 높은 곳에 병력을 주둔시킨 후, 한니발의 군대를 견제하면서 한니발이 군량을 조달할만한 주변 도시들을 모두 비워두도록 명령했다.
그런데 파비우스의 이런 소극적인 움직임에 불만을 품는 장교들이 생겨났고, 특히 기병장관이라 불리는 직책에 있는 부사령관의 반발이 제일 거셌다.
이런 와중에 한니발은 텔레시아라는 도시를 점령하고 그 주변 영토를 파괴했는데도 파비우스는 저지하지 않았다.
그 뒤 한니발이 캄파니아 지역으로 진입해서 도시를 파괴하고 영토를 불태우는데도 파비우스는 이 때도 전투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이러한 파비우스의 모습을 병사들과 장교들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기병장관은 공개된 장소에서 파비우스를 격렬하게 비판하며 항의했고, 병사들도 모두 내심 기병장관의 말이 맞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한니발에게 악재가 생기게 된다.
한니발은 카시눔(Casinum)이라는 도시의 구원요청 때문에 그곳으로 이동 중이었고, 그 지역을 잘 아는 현지 안내인에게 카시눔으로 안내하라고 했더니, 가이드가 잘못 알아듣고 카실리눔(Casilinum)이라는 도시로 안내를 해버렸다.
한니발과 그의 군대가 모두 카실리눔으로 진입했더니 그곳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산과 강으로 포위된 척박한 분지지역이었다.
황당하면서도 화가 난 한니발이 그 가이드에게 "도대체 이곳은 어디인가!!?"라며 추궁했더니, 그 안내인은 자신이 지명을 착각했다며 죽을죄를 지었다고 실토하면서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만약 이 안내인이 로마의 첩자이고, 이 모든 상황이 로마군의 계획이었다면 한니발 자신과 자신의 군대가 모두 몰살당할 뻔했다는 생각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한니발은 안내인을 채찍질한 다음 십자가에 못밖아 버렸다.
비록 안내인이 첩자는 아니었으나 한니발에게는 불행히도 이 소식이 파비우스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파비우스는 즉시 군대를 이동시켜 한니발이 빠져나갈 진입로를 모두 봉쇄해 버렸다.
분지지역에 한니발의 군대가 묶여버린 것이다.
계절은 겨울로 다가가고 있었고, 한니발은 겨울을 보내야 하는 숙영지를 건설해야 했는데 식량은 바닥이 났고, 외부와의 통행은 차단되어버렸다.
파비우스는 승리의 여신이 자신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생각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가만히 머물여 죽음의 시간만 기다릴 수 없던 한니발은 돌파를 시도해 봤지만, 전쟁에 특화된, 그리고 전열이 제대로 갖추어진 로마군을 뚫어내기란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한니발 군의 돌파를 위한 전투에서 카르타고 군은 800명이 전사했고, 로마군은 200명이 전사하면서 파비우스의 군대는 한니발의 군대를 격퇴시켰다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모든 부대가 불안과 걱정에 떨며 지내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한니발이 병사들을 모두 모아놓고 오늘밤 이곳을 돌파하겠다고 장담을 했다.
한니발장군이 뛰어난 전략가라는 것은 그의 병사들도 알고 있었지만, 로마군이 철통같이 포위한 상황에서 어떤 계획을 세워서 빠져나갈 것인지 병사들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날 밤 한니발은 2000마리의 소를 준비해 둔 뒤 꼬리에 불을 붙이고 로마군이 지키는 산속을 향해 달려가도록 했다.
(소는 어디서 공수해온 거야!!?)
한밤중에 갑자기 등장한 소떼의 출현을 본 로마군은 한니발의 공격이라는 생각에 비상이 걸렸고, 이 상황을 보고받은 파비우스는 병사들에게 즉시 전투대형을 갖추고, 요새에 대기하면서 카르타고 군의 공격에 대비하라고 명령하였다.
로마군이 요새에서 전투대형을 갖추고 있을 때 한니발은 전군을 이끌고 로마군이 봉쇄하고 있었던 길을 향해 이동했다.
소떼가 몰려간 산 쪽으로 로마군의 신경이 집중되었을 때 로마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장소 바로 밑의 샛길을 순식간에 돌파해 이동한 것이었다.
파비우스가 속히 병력을 수습해 쫓아갔을 때는 이미 한니발과 그의 군대가 분지 지형을 모두 빠져간 후였다.
파비우스는 한니발 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로마에서 파비우스에게 종교의식이 열리니 수도로 복귀하라는 전갈이 왔다.
이 전갈은 사실 파비우스를 청문회에 불러들이기 위함이었다.
한니발이 약탈하는 동안 제지하지도 않고, 카실리움의 분지 지형에서 절호의 찬스를 잡았으나 한니발의 군대가 빠져나가버린 것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서였다.
파비우스가 로마로 입성하자 청문회장은 그야말로 성토장이 돼버렸다.
그는 원로원과 평민집회에 수없이 출석하면서 이런저런 지적과 질타에 대한 답변을 해야만 했다.
청문회에서 호민관 메틸루스가 파비우스에게 말했다.
"파비우스 당신은 독재관의 권력의 쾌감을 최대한 오랫동안 맛보기 위해 일부러 전쟁을 질질 끄는 것이 아니오?
당신이 군대를 맡은 이후부터 한 것이 무엇이 있소?
이렇게 있으나 마나 한 독재관과 군대는 없는 게 낫소.
내가 호민관의 권한을 최대한 활용해 기병장관에게도 독재관인 당신과 동등한 지휘권을 넘기도록 노력할 것이오.
그리고 당신이 지휘권을 가지려면 전사한 플라미니우스를 대신하는 집정관 대리로 임명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오."
그리고 이 제안이 투표에 붙여졌고 파비우스는 자신의 권력을 기병장관과 나눠갖게 되어버렸다.
파비우스가 군대로 돌아왔을 때 파비우스와 동등한 권한을 부여받게 된 기병장관은 자신에게 군대 지휘권의 절반을 달라 요구했고, 파비우스는 어쩔 수 없이 그 요구를 승낙하였다.
기병장관이 파비우스가 이끌던 로마군의 절반을 거느리고 나가자 한니발은 매우 기뻐했다.
한니발은 기병장관에게 서둘러 개전을 알렸고 파비우스의 소극적인 움직임을 싫어했던 기병장관은 즉시 전투에 응하였다.
두 장군은 군대를 배치한 뒤 회전을 벌였지만, 기병장관이 이끄는 로마군은 한니발의 군대에게 대패해 버렸다.
전투에서 패한 기병장관은 부하들을 불러 "파비우스 님이 옳았어!"라며 파비우스에게로 돌아가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자신의 무지에 대한 용서를 빌었다.
파비우스는 이후에도 자신의 전략을 고수했고, 이러는 동안 시간이 흘러 집정관 선거를 해야 하는 시기가 도래했다.
이때 평민 출신의 바로가 있었는데 바로는 파비우스가 독재관이었을 때 가장 앞장서서 질타한 사람 중 하나였다.
바로는 "원로원이 얼마나 무능하면 한니발을 저지 못하느냐,
왜 군대를 항상 소군만 출전시켜 한니발에게 각개격파 당하느냐"라며 비판하고 다녔다.
바로는 원로원에 대군을 편성해 한번에 끝장을 봐야 한다고 연설하며 다녔고, 이런 바로에게 민중들은 엄청난 지지를 보냈다.
법무관의 자격으로 바로는 집정관 선거에 입후보했고, 평민들의 압도적 지지로 인해 당선이 확정시되었다.
원로원은 바로에 대항할 귀족들을 찾았지만 모두 바로의 능력에 못 미치는 인물들 뿐이었다.
로마 내에서 인재를 찾을 수 없던 원로원은 다른 나라에 머물러 있던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를 불러들였는데 파울루스 역시 로마의 전쟁 영웅이었다.
파울루스는 2차 일리리아 전쟁 때 로마의 사령관으로 부임하며 일리리아 지역을 로마의 속국으로 만든 뛰어난 장군이었다.
평민들과 바로의 불만은 항상 한니발의 군대와 비슷한 규모의 군대를 보내 패배하는 것이었다.
만약 한니발이 이끄는 군대를 훨씬 웃도는 숫자의 군대를 편성해 공격하면 단번에 한니발도 이길 수 있고 전쟁도 속히 끝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주장도 나름 일리가 있었던 것이 로마는 언제나 적과 비슷한 규모나 적은 병력으로도 승리해왔기 때문에 적을 웃도는 숫자를 보내서 패배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고, 당연히 승리할 것이라 생각했다.
평민들이 바로를 압도적으로 지지하고 있었고, 연이은 패배에 할 말이 없었던 원로원은 결국 바로와 평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대군을 편성해 한니발과 대규모의 교전을 벌일 것이라 결정하였다.
원로원은 군사를 늘리기 위해 징병을 시작했고, 징병은 제비 뽑기로 결정되었다.
원로원이 결정한 징병의 규모는 8개 군단병이었다.
보통 로마군단병은 1개 군단병 = 4천200명 선이었다.
원로원은 대규모의 군대를 만들기 위해 1개 군단에 병력을 더 늘여 1개 군단 = 5천 명의 규모로 편성하였다.
총 8개 군단이니 4만 중보병이 된 것이다.
이 시기에 로마의 인구가 50만여 정도였고, 전사자로 인해 인구가 줄어 40만 초반 정도였으므로 인구의 10분의 1 정도가 병사들로 소집된 것이다.
그리고 원로원은 주변의 동맹 도시들에게 같은 규모의 병력의 차출을 명령했다.
원로원의 요구에 응한 동맹 도시들은 그들이 징병한 병력을 보내왔고, 4만의 중보병이 증원되어 총 8만의 중보병, 4천의 기병이 증원되어 6천4백의 기병이 편성되었다.
이때 한니발은 남쪽의 칸나이라는 지역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곳이 곡창지대라서 병력에 식량을 공급하기가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한니발은 로마에서 대군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평균 3만 정도에 이르는 자신의 병력에 용병을 고용하고 갈리아족 등으로부터 차출하여 4만 8천의 병력으로 군대를 편성했다.
로마군에 비해 한니발 군의 보병은 전투력 면에서 로마군에게 크게 뒤떨어졌고, 로마군의 중보병 8만은 모두 전투력이 뛰어난 데다 중무장한 전력들인데 비해 한니발의 3만 2천 중보병중 절반인 1만 6천의 갈리아병과 용병은 로마군에 비해 전력이 뒤처져있었다.
로마군에는 80여 명의 원로원 의원도 동행했다.
원로원 의원의 수의 정원이 300명이며 이들 중 1/3 정도가 조금 되지 않는 인원이 참가한 것이다.
이렇게 많은 원로원 의원들이 장교로 참여한 이유는, 로마 측에선 이 전투에서 전쟁을 끝내려고 하였던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전쟁터에 의원들이 장교로 참전하는 것이 조금 받아들이기 힘든 모습일 수도 있겠지만, 로마에서는 정치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장교 경력이 있어야만 했었고, 이번 전투에 함께 출정하게 된 원로원 의원들은 지휘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두 집정관이 이끄는 9만에 이르는 군대가 칸나이에 도착했을 때 이 병력의 규모를 본 한니발은 크게 기뻐하였다고 전해진다.
아무리 우수한 전략가라 하더라도 배 이상 차이가 나는 병력 앞에서 두려움 마음이 생길 수도 있겠으나, 한니발은 오히려 다른 반응을 보였다.
한니발은 자신이 로마의 대군에게 승리를 거두었을 경우 주변 지역이 대거 자신의 동맹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동맹을 제안해 올 것이라는 생각에 기뻔한 것이라고 한다.
두 대군은 바로 전투에 임하지 않고 서로 마주 보며 신경전을 벌였다.
로마군은 이제 두 집정관이 지휘하기 때문에 집정관들이 하루하루 교대로 지휘하였음.
파울루스가 지휘하던 날 한니발 군과 로마군이 식량을 조달하다가 마주쳐 싸웠는데 한니발 군은 1700명이 전사했고 로마군은 100명이 전사하는 승리를 거뒀다.
승기를 잡은 로마군이 추격하려 하자 한니발 군이 재빨리 퇴각하는 모습을 본 파울루스는 한니발의 함정일 것이라 생각하여 추격을 말렸다.
또 다른 집정관인 바로는 이 소식을 듣고 왜 추격하지 않고 오히려 추격을 말렸다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사실 이것은 고의로 로마군의 사기를 높여 결전 때 무모하게 덤비길 바랐던 한니발의 계략이었다.
한니발 다른 책략도 구상했는데, 어느 날 자신의 군대를 몰래 매복시킨 뒤 자신의 진영을 일부러 비워두었다.
하지만 너무 노골적인 행동은 적이 알아챌 수도 있으니 진영 내 곳곳에 불을 환하게 피워 한니발 군이 마치 진영이 머물고 있게끔 보이게 했다.
첩보에 능통한 로마군은 한니발 군이 진영을 이미 비웠지만 마치 진영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속이고 있다고 판단하고, 사령실로 달려가 두 집정관에게 속히 한니발 군의 진영을 공격해야 한다면 명령을 재촉했다.
이때 집정관 바로는 병사의 말에 따라 속히 한니발 군을 공격해야 한다고 했으나, 집정관 파울루스는 한니발의 속임수가 틀림없다며 공격을 말린다.
두 집정관의 계속되는 다툼에 결국 정찰병을 보냈는데, 정찰병은 한니발 군의 진영 비어있으나 머물고 있는 것처럼 속이기 위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고 보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로마군은 당장 한니발 군을 추격해야 한다며 소리쳤고, 집정관들이 자신들을 막는다면 명령 없이 한니발 진영을 공격하러 가겠다고 했다.
병사들의 사기가 매우 높았고 병사들의 의견과 자신의 의견이 같았던 바로가 즉시 진군명령을 내렸지만, 파울루스는 바로와 군대를 제지하며, 점을 보았더니 불길한 징조가 있었다며 재차 제지하였다.
이 와중에 한니발에게 붙잡혔던 포로가 탈옥해 로마 진영으로 돌아온 후 이 모든 것은 한니발의 계략임을
밝혀 로마군은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게 된다.
그러자 한니발은 매복을 풀고 다시 진영으로 돌아왔다.
전투 없이 대립이 지속되는 와중에 한니발 군은 군량이 바닥나고 있었고, 병사들은 굶주림과 봉급을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다며 항의하였다.
반란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불만이 높아지자 한니발은 '군대를 버리고 기병과 함께 북이탈리아로 퇴각할까'라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한니발은 남부 이탈리아 지역으로 이동해 군량을 확보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한니발은 이전에 진영을 비웠을 때 로마군이 움직이지 않았던 점을 생각해내고 이전과 똑같이 진영을 치장한 뒤 행군을 시작하였다.
이번에도 재빠르게 정보를 입수한 로마군은 한니발 군이
이번에는 확실하게 진영을 버리고 이동한다는 것을 파악하였다.
이때 두 집정관 사이에선 한니발 군이 남부로 이동하는 것을 저지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말싸움이 거셌다.
바로는 한니발 군이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전투를 치러서라도 저지해야 한다고 하였고, 파울루스는 한니발 군을 추격하면서 군량 조달을 훼방 놓자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모든 군대가 바로의 의견을 지지하였고 심지어 80명의 원로원 의원들도 모두 바로를 지지하면서 파울루스는 자신의 주장을 물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로마군은 전군이 그들의 진영에서 나와 한니발 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로마군 전군이 벌판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은 파울루스가 지휘하는 날이었는데 한니발은 전투 대형을 갖춘 뒤 로마군이 전투에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파울루스는 인내심이 많은 인물이었기에 계속 배치만 한 상태에서 도발에 응하지 않고 진영을 꾸렸다.
한니발은 누미디안 기병을 보내 계속 상대의 진영을 공격했지만, 파울루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그런 파울루스의 태도에 로마군들은 파울루스가 전투 명령을 내리지 않은 것에 엄청나게 화가 나 있었다.
동료 집정관 바로 역시 앞서의 파비우스와 파울루스를 모두 싸잡아 겁쟁이의 전형적인 예라고 비판했다.
결국 한니발도 전투를 포기하고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한니발은 다시 누미디아 기병을 보내 로마군이 물을 긷는 것을 훼방 놓았다.
이는 다음날 전투가 벌어질 것을 대비한 것으로 로마군이 갈증으로 인해 전투력이 저하되길 기대한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다시 누미디아 기병이 출현해 로마 진영 코앞에 와서 창을 던져댔고 이것에 분노한 로마군의 진영이 들썩였다.
이날의 지휘관은 바로였는데 바로 역시 굉장히 화가 나 있었고, 자신의 병력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며 본인도 말을 타고 진영을 나왔다.
로마군 전군이 자신들의 총사령관과 함께 강을 건너 한니발 군이 대기 중이던 전쟁터에 도착하였다.
이것이 로마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전설적인 전투인 칸나이 전투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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