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 양

아일랜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 간 이유

MeRCuRyNim 2023. 2. 18.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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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슨가족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성 패트릭 데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나온 갱스 오브 뉴욕.​



코난쇼의 진행자 코난 오브라이언​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

위의  네 가지 이미지는 서로 연관성이 전혀 없어 보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성 패트릭데이는 아일랜드인들의 전통 행사이고, 갱스오브뉴욕은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삶을 다룬 영화이며, 코난 오브라이언과 테일러 스위프트는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모두 '아일랜드'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일랜드 출신 미국인은 약 3500만 명으로 백인 중에서는 독일계 다음으로 큰 집단이며, 본국 아일랜드 인구 450만 명보다 훨씬 많은 수가 살고 있다.

그렇다면 본토 아일랜드 보다 더 많은 아일랜드인들이 미국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12세기 아일랜드의 상황

12세기 아일랜드는 위의 지도처럼 여러 가문의 세력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 중 렌스터(Leinster)의 아일랜드인들은 인접한 잉글랜드를 끌어들여 다른 아일랜드 지역을 통일하려고 했는데,​​

헨리2세

잉글랜드 국왕인 헨리 2세는 오히려 도움을 요청한 렌스터를 점령하고, 더불린을 포함한 아일랜드 동남쪽 해안가 지방을 점령하면서 아일랜드 침략의 기반을 세웠다.

그 후 잉글랜드는 아일랜드를 서서히 점령해 갔고 분열된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의 침략에 속수무책이었다.

헨리 8세

헨리 8세에 이르러서 아일랜드는 완전히 정복당하였고, 아일랜드를 점령한 잉글랜드는 아일랜드 지역에 잉글랜드인 2만 명, 스코틀랜드인 15만 명을
이주시켰다.

헨리 8세가 아일랜드를 정복할 무렵 헨리 8세는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개종하고 아일랜드인에게도 개종을 강요했는데, 개종하지 않는 아일랜드인들은 집과 땅을 빼앗긴 채 추방당했으며, 잉글랜드는 빼앗은 집과 땅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한 사람들과 성공회로 개종한 아일랜드인들에게 분배했고 힘없는 아일랜드인들은 분노를 삭이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올리버 크롬웰

1640년 영국 수상인 올리버 크롬웰은 아일랜드 귀족들에게 "지옥으로 가던가 성공회를 믿던가"라고 말하며 양자택일을 요구했고, 아일랜드 귀족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성공회로 개종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화답으로 성공회로 개종한 아일랜드 귀족들에게 토지를 수여했고, 18세기 초 4%에 불과한 귀족들이 아일랜드 토지의 70%를 소유하며 80%가 넘는 토착 아일랜드인들이 보유한 토지는 전체 아일랜드 토지 14%에 불과했고, 대다수 아일랜드인들은 토지를 보유한 귀족들의 소작인으로 전락했다.


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은 밀과 육류 수출을 위한 가축 생산에 열성적이었고, 아일랜드에서 생산된 밀과 육류는 잉글랜드로 수출되면서 아일랜드 경제는 농업 중심으로 성장했고 잉글랜드 경제에 예속돼 버렸다.

토착 아일랜드인들의 삶은 갈수록  비참해져 갔는데 아일랜드에서 재배된 밀의 대부분이 영국으로 수출되어 버리자 물가가 상승해 밀을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남아있던 사람들도 생존을 위해서 귀족들의 소작농으로 전락해 버렸다.


19세기 초 인구의 90%가 소작인이던 아일랜드에 구세주가 등장하는데 바로 감자였다.

감자는 영양분도 풍부했고 어디에서나 잘 자랐으며, 버릴 것도 없는 식물이었는데 거기다가 감자껍질은 돼지의 사료로도 쓰이면서 돼지를 키워 팔아 오두막을 사거나 결혼할 자금을 벌 수 있었다.

그리고 남은 감자는 시장에 내다 팔아 추가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었기에 아일랜드인들에게 꼭 필요한 작물이었다.


하지만 감자가 도입된 18세기 중반부터 그렇지 않아도 생활고에 시달리던 아일랜드인들에게 더욱더 크나큰 고난이 다가왔는데,

1792~1815년 사이에 있었던 나폴레옹전쟁을 거치면서 영국인들은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에 식량 수입이 곤란해지자 아일랜드 황무지를 개간하고 경작지를 확대시켰고, 경작지가 확대되면 확대될수록 소작료가 떨어지니 궁핍했던 아일랜드인들은 삶이 더 힘들어 질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이상한 점은 경작지 증가는 소작농들의 수입의 증가와 비례관계에 있어야 했는데, 그들의 수입이 증가하지 않고 오히려 생활이 어려워진 원인은 아일랜드의 비정상적인 인구의 증가와 1820년에 체결된 영국-아일랜드 자유무역협정 때문이었다.

아일랜드 인구는 1725년에 200만에 불과했지만 1756년 감자가 경작된 이후 1800년에는 500만이었던 인구가 1825년에는 750만, 1845년에는 850만으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그에 따라 엄청난 노동력이 시장으로 쏟아져 나왔고
경작지의 확장이 일자리의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어 저임금을 주고도 아일랜드인들을 부려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하나는 나폴레옹전쟁을 통해 아일랜드의 직물산업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는데 1820년 영국-아일랜드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면서 영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제도가 폐지되자 더 값싼 영국산 직물이 프랑스로 밀려들면서 아일랜드 직물산업은 전부 사장되어버렸다.

직장을 잃은 노동자들은 시골로 내려가 소작농이 되거나 날품팔이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기에


1845년 아일랜드는 인구 850만 명  중 150만 명이 날품팔이 노동자였고, 400만 명이 소작농일 정도로 가난한 지역이 되었다.

아일랜드인들은 가난하면 가난해질수록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감자를 더 많이 소비하게 되었는데, 1840년 아일랜드에서 소비된 감자만 해도 무려 700만 톤이나 되었다고 한다.(2022년 우리나라의 감자 생산량은 약 55만 톤)


한편 1843년 미국 동부 해안 지방에서 새로운 식물 전염병이 발견되는데... 바로 마름병이었다.

마름병은 1843년 겨울 뉴욕을 거쳐 1845년에는 미국 전역과 네델란드에 퍼졌고, 1845년 10월에는 아일랜드와 스위스 독일과 프랑스 일부 지방에도 퍼지게 되었다.​​

썩은 감자를 보고 자포자기한 농민들

아일랜드에 퍼진 마름병은 10월에 수확을 앞두던 작물들을 모두 썩게 만들었고 바람과 물을 통해 마름병에 전염된  감자는 더욱 많아졌으며 1845년에는 수확된 감자의 30%가 썩고 말았다.

1846년 마름병은 아일랜드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서 전파되었으며 아일랜드처럼 감자 소비량이 많은 네델란드와 벨기에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아사해버렸다.

1846년 8월부터는 아일랜드에 마름병이 다시 창궐하여 1846년 재배한 감자 중 겨우 25%만이 먹을 수 있는 감자였고 나머지는 모두 썩은 감자였다.

썩은 감자를 어떻게든 먹어보려는 아일랜드인들

1846년 겨울 대기근을 견딜만한 식량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굶어죽기 시작했는데 이때 영국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아일랜드 대기근을 막고자 노력했던, 훗날 영국의 보수당을 창당한 로버트 필

아일랜드 출신 영국 의회 의원 로버트 필은 영국정부에 식량 개방을 요구했으나 영국인 곡물 상인들의 로비에 식량 개방은 실패로 돌아갔고 로버트 필은 비밀리에 식량을 조달하여 석 달간 50만 명이 먹을 수 있는 옥수수를 구할 수 있었다.

또한 로버트 필은 국가에서 직접 시민들을 구제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영국 정부는 자유방임주의를 내세워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고 나서야 아일랜드 대기근에 개입했다.

영국 정부는 항구나 철도건설 같은 공공 공사에 빈민들을 고용하는 방법과 대토지를 보유한 아일랜드 지주들에게 소작료를 낮추는 대신 영국 정부가 소작료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안과 미국에서 옥수수를 수입하는 것으로, 비록 처음에는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사하는 사람들도 줄어들고 범죄율도 떨어지는 등 효과가 있는 정책들이었다.​​

1847년 영국 총리 존 러셀

하지만 1846년 집권한 존 러셀 내각은 아일랜드에서 아사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아일랜드인들이 일자리를 구하기 쉬운 공공 공사에 의존하거나 정부가 주는 식료품 등 무료로 나누어주는 것을 좋아하고 노력을 안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자유방임주의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감자를 찾기 위해 땅을 파는 아일랜드인 가족

그 결과 기존 공공사업이 취소하거나 정부가 주던 보조금 제도가 폐지되어 아일랜드에서는 다시 굶어  죽는 사람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스키버린

스키버린은 아일랜드 대기근의 상징이 된 곳으로


스키버린을 방문한 사람의 기록에 따르면

'죽은 자와 산자가 아무렇게나 뒤엉켜 있었다. 굶주린 아이는 이미 숨진 엄마 젖을 빨고 있었고 그들과 차가운 땅바닥 사이에는 찢어진 넝마 몇 조각이 있을 뿐이었다.'라고 적혀있다.

1847년 백만 명이 넘는 아일랜드인들이 계속 죽어나가자 존 러셀 내각도 자유방임주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1847년 1월부터 존 러셀 내각은 공영 식당을 아일랜드 전역에 설치하였으나 음식은 형편없었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충분한 음식을 제공할 수도 없었다.​​



식량을 달라고 호소하는 아일랜드인들

공영 식당은 1847년 7월부터 매일 300만 명에게 음식을 제공했으나 약 250만 파운드(현재 가치로 약 1000억 원)가 들어갔고 영국의 보수적인 여론은 공짜로 밥만 축내는 아일랜드인을 위해 영국인의 세금이 나간다는 반발에  존 러셀 내각은 1847년 9월 공영 식당도 전부 폐쇄해 버렸다.

영국 정치권은 아일랜드의 구제방법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인 후 몇 가지 정책방안을 제시했는데

1. 영국 납세자가 모든 아일랜드인의 문제를 책임질 수는 없으니 아일랜드인 스스로 살아야 한다는 방안으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방안.

2. 공공 공사를 다시 재개해 1600만 파운드(현재 한국 돈 약 6000억)을 투자하는 방법도 나왔지만 겨우 62만 파운드로 축소.

3. 아일랜드인을 호주로 이주시키는 방안도 나왔지만 훗날 아일랜드 상황이 안정되면 많은 일자리가 필요할 거라는 주장에 거부.

결국 영국이 선택한 건 1번으로 '구빈법'이라고 불리는 법으로 아일랜드는 영국의 인도적인 소규모 지원으로 생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영국 정치가들은 아일랜드가 가난하고 굶어죽는 건 게으르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의 탓으로 여기고 영국의 인도적인 지원으로 건설된 소수의 구빈 원만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 구빈원

구빈원은 스스로를 부양할 수 없는 자들에게 거처와 일자리를 마련하는, 잉글랜드와 웨일즈에 있었던 시설이다.

지주로부터 추방당한 아일랜드 가족

집을 비우라고 독촉하는 지주

아일랜드 지주들은 구빈법의 실행으로 더 이상 영국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소작인들의 빌려주었던 땅을 몰수했는데 1847년에만 25만 명의 소작농들이 쫓겨났다.​​

지주들을 비꼬는 삽화

아일랜드 지주들은 소작농들을 쫓아낸 땅에 돈이 되는 목장을 건설했고, 아일랜드인들은 갈 곳을 잃게 되었다.

영국이 건설한 구빈원은 식량지원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1847년부터 1주일마다 2500명의 아일랜드인이 아사하였다.​​

1849년 11월 칼라시 지방에서 지주로부터 쫓겨난 사람들에게 옷과 식량을 나눠주고 있는 아일랜드 자선가인 케네디 대위와 케네디 대위의 딸 1849년 12월 22일 일러스트레이트 런던 뉴스 삽화
서부 아일랜드에서 살아남기 위해 해조류를 찾는 아일랜드인

아일랜드의 참상은 해외로도 널리 퍼져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구제 식량이 도착했고, 영국인들도 자선사업을 통해 아일랜드에 기부를 했다.

하지만 대다수 기부금은 성공회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돌아가거나 부패한 영국 관료제의 경직된 체계로 인해 제대로 된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압둘메지드1세

영국 관료제의 무능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아일랜드 대기근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된 오스만제국의 술탄 압둘메지드1세는 아일랜드에 식량을 가득 싫은 선박 한 척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대기근의 끔찍한 참상을 알고서 인도주의에 입각해 식량을 더 추가하여 선박 5척에 8천 파운드 어치의 밀과 양고기를 가득 싣고 아일랜드를 지원했지만, 영국 행정당국은 빅토리아 여왕이  2천 파운드만 아일랜드에 보냈다는 이유로 1천 파운드 어치의 식량만 받기로 결정하고 나머지 식량을 터키로 다시 돌려보냈다는 일화가 있다.

하지만 터키 선원들이 영국 행정당국의 관료들 보다 훨씬 더 융통성이 있었는지, 행정당국 몰래 남부 아일랜드 해안가에 식량을 내려놓았고, 5600명의 아일랜드인들이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다.

1848년 사업가들의 원조가 중단되고 1849년에는 그나마 남아있던 원조 단체도 문을 닫았다.

1849년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 구제자금으로 겨우 5만 파운드를 보내기로 하자 엄청난 비난에 직면했는데

"이번 자비심으로 영국의 허리가 휠 지경이다.

영국은 영국의 호의에 감사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돈을 쓸 이유가 없다."

-1849년 2월 더 타임스 사설

영국정부는 물론 영국 여론조차 아일랜드 문제에 지쳐가기 시작했고


아일랜드 사회에서조차 신이 아일랜드를 벌하고 있다는 숙명론까지 등장하며 아일랜드인들은 자포자기에 빠지게 되었다.

지주들에게 땅을 빼앗긴 소작농들은 길거리에서 굶어죽었으며 도시의 날품팔이들은 자신의 무능력을 원망하면서 굶어죽었다.

식량 호송 마차 탈취를 막기 위해 대기 중인 민병대원

하지만 몇몇 아일랜드의 지식인들은 1848년부터 아일랜드가 가난한 건 영국의 잘못된  통치방법이란 걸 파악하고 아일랜드 독립운동을 계획했지만,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은 너무나도 쉽게 진압당해 버렸다.


독립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영국을 향한 아일랜드인의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기에 1849년 8월 성난 아일랜드 민심을 가라앉히고자 빅토리아 여왕이 아일랜드를 방문해야 할 정도였다.

빅토리아 여왕의 방문에도 아일랜드 상황은 똑같았고 아일랜드인에게 남은 건 한 가지 방법뿐이었는데

미국으로 이민 간 아일랜드인


그것은 바로 '아메리칸드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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