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스두르발군과 스키피오의 로마군은 서로 대치했고, 두 군대는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 전투는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전략적인 중요도에 있어서는 칸나이 전투에 못지않을 정도로 중대했는데 그 이유는 이 전투에서 카르타고가 승리하면 스페인에서의 로마 세력은 소멸됨과 동시에 한니발은 스페인으로부터 지속적인 보급을 받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로마가 처한 상황을 본다면 만약 한니발이 스페인으로부터 안정적으로 보급을 받게 되면 로마의 멸망은 거의 확정적이었기에 전투의 중요성은 카르타고, 로마 양측 사령관 모두 알고 있었다.
하스두르발은 이 전투에서 자신의 형인 한니발이 칸나이에서 썼던 전략을 쓰기로 했는데, 칸나이 전투에서와 비슷하게 하스두르발의 기병은 기량이 우월했지만 보병의 기량이 부족했기에 최대한 기병을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로마의 사령관 스키피오 형제들은 기병을 양익에 배치하고 보병을 중앙에 배치했는데 하스드루발 역시 똑같은 병사들의 포진을 계획했다.
하스두르발은 양익의 기병으로 로마군 양익의 기병을 격파한 뒤 중앙의 로마 중보병을 포위 섬멸할 계획을 세웠고 이내 두 군대는 맞붙게 되었다.
힌지만 전투는 하스두르발의 예상과는 다르게 전개되었다.
로마군은 기병이 수적으로 불리했었지만 카르타고 기병의 공격을 끝까지 버텨냈고 그 사이에 막강한 로마의 군단병이 카르타고 보병의 전열을 돌파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전장의 상황이 열세로 치닫자 하스두르발은 기병과 함께 달아나 버렸고 카르타고의 보병은 대부분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결국 로마는 이 전투의 승리로 커다란 위기 하나를 넘기게 된다.
로마에서는 원로원이 세금의 양을 두배로 올린 뒤 즉시 시민들로부터 징수하였고, 그 뒤 그 해의 집정관으로 전직 독재관을 지낸 퀸투스 파비우스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선출했다.
그리고 이 집정관들은 각각 3-4만에 이르는 병력을 거느리고 한니발과 대결을 위해 출정하게 된다.
카르타고 본국에서는 스페인에서 카르타고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니발의 동생인 마고에게 군대를 맡게 하고 스페인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때 사르데냐섬 주민들이 로마군으로부터 반란을 일으킨 후 카르타고 본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 소식을 접한 카르타고 본국은 마고에게 준 병력과 같은 규모의 군대를 다시 편성한 뒤 사르데냐 섬으로 보냈다.
로마가 한니발에게 칸나이에서 대패했다는 소문은 다른 국가에도 알려지게 되었고,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는 기뻐하면서 한니발에게 사절을 보냈다.
그런데 이 사절이 로마로 가던 도중 로마군에게 붙잡히게 되었고, 로마 법무관에게 이송된 마케도니아의 사절은 자신은 로마에게 동맹 제의하러 온 사절이라며 거짓말을 했다.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한 로마 법무관은 그를 로마로 정중하게 모셨다.
하지만 이 사절은 한니발의 숙영지 근처에 이르자 로마인 일행 들으로부터 야반도주하여 한니발에게로 가버렸고, 한니발과 만난 그는 마케도니아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와서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로마가 멸망하면 한니발은 곧장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그리스 정복에 힘을 빌려달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한니발에게 매우 기쁜 소식이었다.
한니발은 답신을 보내기 위해 자신의 장교 세명을 필리포스에게 보내기로 했다.
세명의 장교와 마케도니아 사신은 마케도니아로 가기 위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 순찰 중인 로마 군함에 의해 발견되어 버렸다.
이들을 차람을 보고 수상하게 생각한 로마 측 사령관은 카르타고인이 있는 것을 눈치채고는 이들의 몸수색을 명령했고 한니발의 서신이 발견하자 크게 놀라 즉시 로마로 압송했다.
사르데냐는 로마 법무관이 병력을 이끌고 지키고 있었는데 사르데냐인들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고, 혹시라도 사르데냐인들이 반란을 일으킨다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자신의 병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건강까지 나빴기 때문에 로마 원로원에게 전령을 보내 추가 병력과 자신을 대신할 사령관을 보내달라고 했고 이에 원로원은 새 법무관과 그의 휘하에 1개 군단을 사르데냐로 파견했다.
이때 카르타고를 떠나 사르데냐로 향하고 있었던 카르타고군은 폭풍을 만나 어느 섬에 좌초돼버렸는데 이 때문에 카르타고 군의 상륙은 늦어졌고 이것이 뒤에 있을 사르데냐에서의 전투에 크나큰 영향을 주게 된다.
카푸아 인들은 로마가 한니발에게 무참히 패배하고 있는 지금에야말로 자신들이 이탈리아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있었고, 그 첫 번째 단계로 그들의 근처에 있었던 소도시인 쿠마에에게 로마와의 동맹을 끊고 자신들 카푸아와 손을 잡자고 협박을 했는데 쿠마에는 카푸아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그들의 요구를 거절해 버렸다.
카푸아 인들은 쿠마에를 어르고 달래 가며 카푸아 인들과 카푸아의 속국이 된 동맹국들이 참여하는 행사에 쿠마에 원로원 의원들을 초대하여 쿠마에의 통치 권력자들을 어떻게든 설득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로마와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던 쿠마에의 원로원들은 자신들의 근처에 군대와 함께 머물고 있었던 로마 집정관 그라쿠스에게 연락하여 자신들이 도울테니 축제 때 몰래 기습하면 좋다고 말했지
집정관 그라쿠스는 자신의 병사들이 대부분 노예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통솔하는데 애먹고 있었는데, 병사들이 자격지심 때문에 도무지 당당하게 업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며 훈련을 쉬쉬하고 있었다.
그라쿠스는 병사들에게 노예들을 자유민처럼 여기라고 훈계함과 동시에 그들을 차별하는 병사가 있으면 엄벌을 내리겠다고 지시했다.
그리고 그라쿠스의 장교들도 노예 출신 병사들의 자격지심을 없애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그라쿠스에게 쿠마에 원로원 의원들에게서 연락이 왔고 그라쿠스는 곧장 군대를 이끌고 그 축제가 열리는 도시를 향해 이동했다.
도시의 공격은 야밤에 이루어졌는데, 그라쿠스는 도시를 지키는 1만 4천 명의 카푸아군의 주둔 캠프를 기습, 그곳에서 2천 명의 병력을 죽이고 캠프에 있던 병사들의 짐을 모두 약탈했다.
그런데 도시 근처에는 마침 한니발과 그의 병력이 머물고 있었고, 그라쿠스는 한니발이 군대를 이끌고 오는 것이 두려웠으므로 얼른 철수해 버렸으나, 전투 소식을 접한 한니발이 군대를 이끌고 그라쿠스를 뒤쫓고 있었다
한니발은 또 다른 평야에서 벌이는 회전을 애타게 원하고 있었는데 그라쿠스군이 캠프에서 나왔다고 하니 그것이야 말로 그에게는 절호의 기회였으므로 한니발은 필사적으로 주변을 찾았지만 그라쿠스는 이미 범영 되어버렸다.
그라쿠스를 놓친 한니발은 이 일을 꾸민 주범이 쿠마에의 원로원 의원인 것을 알아채고 쿠마에를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쿠에에를 공격하기 위해 자신의 숙영지로 돌아와 군대를 재정비하고 공성무기를 준비한 후 쿠마에로 이동한 한니발은 다음날 쿠마에에 도착했을 때 로마의 집정관 그라쿠스와 그의 군대가 쿠마에에 주둔한 것을 발견하고 그들과 공성전을 벌였지만 한니발의 군대는 로마군에게 격퇴되어 버렸다.
이탈리아반도에 진입한 후 한니발이 급습이나 평야에서의 전투에서는 로마군보다 훨씬 우세한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공성전에서는 번번이 퇴각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이는 공성전에는 한니발의 장기인 기병을 사용하지 못하고 순수하게 보병으로만 상대해야 했기 때문인데 한니발의 보병 전력에서 로마군보다 우세한 인원은 그와 함께 알프스를 넘은 정예병력뿐이었고 이 병력은 모든 전투에 함부로 투입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공성전에는 자신의 잉여 병력을 투입했고 그때마다 강력한 로마 중보병에게 패배하였다.
한니발은 성벽에서 자신의 병력을 포진한 뒤 그라쿠스가 승리감에 도취되어 성벽을 나와 회전을 벌이기를 기대했지만, 전략에 베테랑이었던 그라쿠스는 성벽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결국 한니발은 병력을 철수하면서 쿠마에 점령은 실패로 끝난다.
한니발이 철수한 이후 그라쿠스는 이전에 붙잡힌 마케도니아 사절이 심문한 뒤 원로원으로 보냈고 로마 원로원은 마케도니아를 상대하기 위한 군자금을 마련한 뒤 해군 30척을 편성해 바다로 보냈다.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는 자신의 사절이 로마인에게 붙잡힌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곧장 자신의 또 다른 사절을 한니발에게 파견했고, 이들은 무사히 한니발의 답변을 받아왔다.
하지만 그들이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전쟁을 치르기 위한 시기가 대부분 지나버렸고, 로마인들도 이미 전쟁에 대한 대비를 끝냈으므로 마케도니아 왕은 즉각적인 군사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결국 이렇게 지연된 시간은 로마로서는 크나큰 행운이었다.
로마 본토에서 보낸 증원군이 사르데냐에 도착했을 때 사르데냐의 원주민들은 카르타고 군의 도착이 늦어지자 조급한 나머지 제대로 된 전술도 없이 병력을 이끌고 나와 로마군과 전투를 벌였고, 로마군은 이들을 가볍게 격파한다.
로마군은 원주민을 추격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본거지로 몰아넣기 시작했는데, 이때 마침 카르타고 군이 도착한 것이다.
카르타고 군은 사르데냐의 원주민들과 합류한 후 로마인군과의 대결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나왔다.
뒤이은 벌판에서의 회전에서 로마군과 카르타고군은 치열하게 싸웠고 전투는 4시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그런데 사르데냐 원주민들의 전투력과 정신력이 약한 탓인지 이들이 패주해 달아나버렸고, 그들이 사라져 버리자 카르타고군의 측면이 무방비가 되어버렸다.
로마군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곧장 측면으로 전진한 다음 방향을 돌려 중앙의 카르타고군을 공격하자 카르타고군은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고 카르타고 군은 완전히 격파되어 로마는 사르데냐를 지켜내는 데 성공하게 된다.
한편 정박해 있던 카르타고해군은 육군의 패배소식을 듣고 서둘러 귀국했는데 뒤쫓아온 로마 해군의 추격을 받았다.
이 틈을 타 카르타고 본국은 한니발에게 4000 누미디아 기병, 30 코끼리병을 수송해 주었는데 이것은 한니발이 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은 최초의 사례였다.
한니발은 이때 카푸아 근처에 있었는데 그 이유는 로마 집정관들 휘하의 군대가 카푸아 근처에서 호시탐탐 그 지역을 노리고 있었고 이를 막기 위해 한니발은 카푸아 근처에 주둔해 있었다.
그리고 한니발이 없는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한니발이 보낸 한노라는 장군이 로마 법무관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때 이탈리아 중부지역의 삼니움 족들이 한니발에게 사절을 보내 로마로부터의 해방을 원한다며 지원을 요청했다.
삼니움족은 산속에서 거주하고 있었는데 산악지역에서 전투를 하게 되면 자신의 강력한 기병전력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한니발은 산악지형 인근의 로마 도시를 공격하여 그들을 이들을 돕겠다고 제안하였다.
그 뒤 한니발은 몇 차례 공략한 바 있었던 놀라로 이동하였는데 그곳을 지키는 장군은 마르켈루스였다.
마르켈루스는 시칠리아로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전황이 좋지 않아 다시 놀라로 돌아간 것이었다.
한니발의 군대가 놀라를 향해 접근하자 마르켈루스는 성문을 열고 모든 로마군단병을 출동시켜 두 군대가 맞붙었고 두 군대는 굉장히 격렬하게 싸웠지만 마침 쏟아진 폭우로 인해 두 군대는 잠시 휴전에 들어갔다.
폭우가 그친 다음날 마르켈루스와 한니발의 군대를 이끌고 평지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놀랍게도 마르켈루스가 한니발 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미심쩍은 점은 한니발군 기병의 활약이 전무했던 것이고 또한 마르켈루스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로마 측으로 넘어간 도시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비록 이 승리가 과장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전투 이후 한니발은 군대를 철수시켰기 때문에 마르켈루스는 한니발을 상대로 전투에서 승리한 인물이 되었다.
어느덧 계절은 겨울로 다가가고 있었고 로마 원로원은 전비 마련에 고심하고 있었는데, 이때 로마는 이탈리아 전역과, 스페인, 시칠리아, 사르데냐, 그리고 지중해를 아우르는 해군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군비가 필요했다.
원로원은 회의 끝에 국채를 발행하기로 결정하였고, 자국에 대한 애국심에 불타는 로마 시민들은 부유층과 서민을 가리지 않고 국채를 사들여 원로원은 군비를 마련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스페인에서는 스키피오 형제가 이끄는 로마군이 스페인으로 진입, 카르타고 군을 또다시 크게 격퇴하는 데 성공하고, 이제 계절은 겨울로 접어들어 군사활동이 중단된다.
그리고 다음 해인 기원전 214년,
이탈리아 남부에선 한니발에 의해 임명된 한노가 아직 카르타고에 항복하지 않은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점령하고 있었다.
도시들의 민중들은 대부분 카르타고 편이었고, 귀족들은 로마 편이었는데 그 이유는 로마가 친 귀족적인 정책을 항상 폈기 때문이었다.
로마인들은 외국인이라도 귀족과 지도층들에게 굉장히 우호적인 나라였는데 다른 지역을 점령하면 점령지의 귀족계층의 권력을 그대로 인정했고 단지 그들에게 바란 건 로마가 전쟁할 때 지원해 준다는 조건만 요구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민중들은 귀족계층이 로마를 돕겠다고 나설 때마다 항상 전쟁터에 징집되는 계층이니 탐탁지 않은 데다, 로마군에 동맹군으로써 참여해도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들을 로마인들 위주로 분배했기 때문에 로마를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유 등으로 민중들은 반란을 일으키거나, 또는 카르타고의 장군 한노가 점령하면서 도시들은 하나씩 카르타고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겨우내 한니발은 로마 집정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이끄는 군대와 대치중이었다.
이 시기에 시칠리아에서는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 시칠리아 동부를 대부분 지배하고 있는 아주 큰 도시였던 시라쿠사의 왕 히에로는 나이가 90살이었는데 건강이 매우 위독했다.
히에로는 나이가 너무 많은 탓인지 그의 자식들은 자신보다 먼저 다 죽어버리고 그의 손자인 히에로니무스만 남은 상태였다.
자신의 왕위를 물려줄 이가 한 명이라도 있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여길 수도 있는데 문제는 히에로니무스가 너무나도 무능한 것이 문제였다.
오죽했으면 히에로는 그의 손자에게 나라를 물려주는 것이 껄끄러워 시라쿠사를 공화정으로 되돌리는 방향으로 생각했지만, 그렇게 되면 권력에서 밀려나게 될 히에로의 딸과 사위들이 결사반대를 하여 자신의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히에로는 어쩔 수 없이 히에로니무스에게 시라쿠사를 물려주기로 하고, 또 다른 유언으로 그를 보좌할 측근의 임명과 로마와의 동맹을 절대로 끊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한 뒤 숨을 거둔다.
그런데 히에로니무스는 왕이 되자마자 자신의 할아버지가 신신당부했던 마지막 유언을 무시하고 카르타고 쪽으로 마음을 기울이게 된다.
여기에는 약간의 사연이 있는데 그의 절친이자 최측근이었던 인물이 카르타고계였던 것이었다.
히에로니무스는 한니발과 카르타고에 사절을 보내어 그들과 동맹을 맺기로 하고 로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면 이탈리아는 한니발이 점령하고 자신은 시칠리아 전체를 점령하겠다고 했다.
이 소식을 접한 로마에서는 화들짝 놀라 서둘러 시라쿠사로 사절을 보냈는데 히에로니무스와 그의 측근들은 칸나이 전투를 거론하며 로마 사절들을 조롱했다.
그들의 태도에 잔뜩 화가 난 로마의 사절들은 몇 번의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이런 식으로 오랜 동맹을 가볍게 버리는 것은 잘못된 행위며, 뼈아픈 과거를 들추어 자신들을 조롱한 것을 "로마는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경고한 뒤 떠났다.
로마에게서 등을 돌리기로 한 히에로니무스는 자신의 군사적 재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는지 자신이 직접 2만 군대를 이끌고 로마군이 지키는 시칠리아 서부를 정복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시칠리아 서부에 주둔해 있던 로마 측 사령관은 한니발을 놀라에서 격파한 바 있었던 당시 로마 최고의 장군인 마르켈루스였고, 시라쿠사의 어린 소년왕은 자신이 로마군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군대를 소집한 뒤 출정하여 전투준비를 했는데 이런 분에 넘치는 만용을 병사들이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 히에로니무스를 암살해 버렸다.
왕의 자리가 공석이 되어버리자 시라쿠사는 공화정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진영과 왕당파 사이에서 내전이 발생했고 이러한 소란을 뒤로한 채 계절은 겨울을 보내고 봄이 시작되는 3월로 접어들었다.
로마에선 매 해 3월마다 집정관을 비롯한 관료들을 선거를 통해 새로이 선출하고 그해의 예산을 편성했는데 다시 3월이 도래하자 선거를 시작하였고, 집정관이었던 퀸투스 파비우스는 로마 시민들에게 전쟁으로 인해 국가의 안위가 위급한 상황이니 전쟁에 능숙한 정치가를 집정관, 법무관으로 선출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는 군단의 지휘권 즉 임페리움은 집정관과 법무관만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었는데 이들을 시민들이 선출할 때 정치적 인기나 사사로운 감정보다는 오직 로마를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는 유능한 인물을 선출해 달라는 호소였다.
시민들은 파비우스의 간절한 호소에 호응해 원로원이 사령관으로 추천한 후보들이 모두 선출될 수 있도록 투표하였고, 현직 집정관 퀸투스 파비우스와 한니발에게 거둔 승리로 유명해진 마르켈루스를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선거가 끝난 뒤 원로원은 몇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여기서 가장 중대한 결정이자 후대까지 영향을 주는 결정은 사령관이 임기가 만료되어도 전직 집정관, 또는 전직 법무관의 신분으로 군대를 그대로 지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는 사령관의 교체로써 군대 지휘 방법이나 전략이 바뀌는 것을 막기 위한 일환으로서, 임페리움(군단 지휘권)을 이제는 현직 고위 관료가 아닌 전직 관료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러 정책을 결정한 뒤 원로원은 곧이어 한니발과의 전투를 위한 군대의 규모와 예산을 편성했는데, 로마 원로원 18개 군단이라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편성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18개 군단은 로마 군단병만 기병 포함 8만 5천 병력에, 동맹 도시 군단까지 합쳐 거의 17만에 달하는 대군이었는데 이 인원을 맞추기 위해 새로 6개 군단을 로마 시민들에게서 징병하였다.
거대한 육상의 군단을 편성 후 다음으로 해군을 편성하려 했지만 군자금이 부족했는데,
로마에서는 특히 고위층에서는 노블리스 오블리주
'가진 자의 베풂'으로 여길 수 있는 국가에 대한 기부를 아주 큰 명예로 여겼는데 국가의 위기 상황이라 생각한 원로원 의원들이 자신의 사비를 거두어들여 해군을 편성하기 위해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원로원 의원들은 재산의 규모대로 등급을 나눈 다음, 각 등급에 따라 기부금의 액수를 정해 국고에 기부하기로 하였고 엄청난 비용이 필요한 해군 전력의 편성을 위해 300명인 원로원 의원들이 내놓은 기부금은 일반 서민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였다.
이러한 모습은 다른 나라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쉽게 등장하지 않는 장면인데, 이 당시에 로마인들의 단합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귀족과 평민, 노예층 가리지 않고 모든 시민들이 로마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노예 계층은 그라쿠스의 휘하에서 병사로 싸웠고, 평민들은 원로원이 지목한 인물들에게 투표해 주었으며
자신이 선출한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목숨을 걸고 로마를 위해 싸웠다.
지도층 원로원 의원들은 장교로 참전해 다수가 전사했으며 상당수의 의원들이 사비를 기부해 가며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니발이 전쟁사를 통틀어 정말 굉장한 지략가이긴 하지만 그런 한니발의 전술적인 능력이 로마의 민족성과 부딪혔을 때는 빛이 바래버렸다.
로마가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대군을 편성했다는 소식은 곧 카푸아에 전해졌고 카푸아의 시민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자신들을 구원해 줄 사람은 오직 한니발뿐이라 생각한 카푸아인들은 이탈리아 남부에 머물고 있던 한니발에게 사절을 보내어 로마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것을 요청했고 전ㆍ후의 상황을 파악한 한니발은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고 생각해 즉시 군대를 이끌고 북상했다.
로마가 대군을 편성했다는 정보를 접수한 한니발은 자신의 병력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남부 이탈리아에 머물던 다른 부대, 즉 한노에게도 북상을 명령했고, 한노는 남부 이탈리아로부터 조달받은 그리스계 이탈리아인으로 구성된 병력을 이끌고 북상할 채비를 갖추었다.
한니발은 카푸아를 지원하기 위해 북상하며 예전에 자신이 공격한 바 있었던, 쿠마에, 놀라, 마르세유를 차례차례 공격했지만 마르켈루스의 철벽방어에 의해 모두 점령하는데 실패했다.
그리고 한니발의 명령에 따라 북상하던 한노는 베네벤툼이라는 도시에서 전직 집정관 그라쿠스가 이끄는 노예 군단병과 만나게 되었는데, 로마 진영의 노예 군단병들에게 그라쿠스가 말하길
"한노와의 전투에게 이긴다면 자유민으로의 신분상승을 약속한다.
이는 원로원의 승인도 받은 것이니 자유를 로마를 위해 그리고 자유를 위해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하도록 하여라!"
이러한 지휘관의 약속에 노예 계층 군단병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두 군대는 맞부딪혀 매우 치열한 전투를 4시간여 동안 벌였지만, 도저히 승부가 나지 않자 그라쿠스는 병사들의 사기를 더 끌어내기 위해
"오늘 이기지 않으면 이전의 약속은 무효로 돌리겠다!"
라고 말했고 노예 계층의 군단병들은 다시 한번 모든 전력을 다해 카르타고군을 밀어붙였다.
자유민을 향한 그들의 용맹함이 통했는지 마침내 카르타고군의 전열은 붕괴되기 시작했고, 겁에 질려 퇴각하는 한노의 군대를 추격해 로마의 군사들은 카르타고의 군사들을 살육하기 시작했다.
이 싸움에서 한노군은 1만 8천 명 중 1만 6천이 전사, 그라쿠스군은 2만 여 병력 중 2천 명이 전사했고,
뼈아픈 패배와 자유를 향한 커다란 승리가 공존하게 된 전투로 남게 되었다.
이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로마 본토에서는 국채 상환일이 만기가 도래한 문제가 생겼다.
즉 로마 정부가 로마시민들에게 국채를 발행하고 돈을 빌렸으니 이제 시민들에게 돈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놀랍게도 로마 시민들은 아무도 로마 정부에게 돈을 상환해 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았고, 전쟁이 끝난 이후 로마가 다시 영광을 되찾았을 때 돌려받겠다고 하였고, 그라쿠스가 이끌던 노예들의 주인들 역시 노예들이 자유민이 됨으로써 받아야 할 몸값을 전쟁이 끝난 뒤 지불받겠다고 했다.
놀라에서는 마르켈루스와 한니발이 대치하고 있었는데 마르켈루스는 한니발이 이동할 때 몰래 기병의 일부를 후방에 보내 한니발군의 후방을 따라가다 전투가 벌어지면 배후를 기습하라고 명령을 해놓았다.
하지만 철두철미한 한니발은 이동하면서 까지 주변의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았고, 한니발군의 후방에 기병을 보내려는 마르켈루스의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뒤이어진 전투에서 마르켈루스는 다시 한니발의 군대와 무승부를 거두었다.
한니발이 마르켈루스와의 전투에서 번번이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없었던 이유는 한니발의 전략을 파악한 마르켈루스가 한니발의 주력인 기병이 힘을 쓰지 못하는 지형에서만 전투를 벌였기 때문이었다.
베테랑 지휘관답게 마르켈루스 역시 한니발에게는 만만치 않은 전략가였던 것이었다.
한니발은 숙영지를 정리하고 군대를 이동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때 이탈리아의 남부도시 타렌톰에서 한니발과 동맹을 맺고 싶어 한다는 첩보를 입수한다.
타렌톰은 그 유명한 피로스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 에페로스의 왕 피로스가 이탈리아에서 로마와 전투를 벌인 전력이 있었던 대도시였다.
도시의 규모도 로마, 카푸아 다음으로 이탈리아 전체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는데 이런 도시가 로마에게서 등을 돌리려 한다는 소식은 한니발에게는 굉장히 반가운 소식이었으므로 한니발은 곧바로 이탈리아 남부를 향해 출발했다.
한니발이 떠나자 이제 카푸아 인근 도시에선 로마군을 막을 수 있는 장수가 없어져버렸고, 로마의 두 집정관 파비우스와 마르켈루스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배신한
지역들을 점령하고 다녔고, 심지어 그라쿠스까지 북상해 주변 지역을 점령해 버렸다.
이 시기에는 이탈리아반도나 그 주변에는 로마군을 막을 수 있는 장수는 오직 한니발뿐이었고 한니발 없는 군대를 상대로 로마군들이 가히 무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식의 전개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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