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사

카르타고의 한니발(7) - 이탈리아 전역

MeRCuRyNim 2023. 1. 13.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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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켈루스와 한니발이 놀라에서 대치했지만, 정작 한니발은 놀라를 공격하기보단 나폴리를 다시 공격하기 위해 이동하였다.

그러나 다시 한번 나폴리의 튼튼한 성벽에 가로막혀 이번에는 남쪽으로 내려가 뉴케리아라는 도시를 점령한 뒤 다시 놀라로 이동하였다.

한니발이 놀라에 도착했을 때 놀라의 시민들은 한니발의 편에 서고 싶어 했지만, 놀라의 분위기를 파악한 마르켈루스는 놀라시 안으로 들어가 성벽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마르켈루스가 수비에 전념하고 있을 때 놀라의 시민이 몰래 한니발에게 사절을 보내어 음모를 꾸몄는데, 로마군이 한니발의 공격을 막을 동안 시민들이 몰래 로마군의 짐을 약탈한 뒤 안ㆍ밖에서 서로 협공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 계략은 이내 누설되어 마르켈루스가 알아채게 되었고, 자신의 병력 일부를 짐을 지키게 한 뒤 세 개의 성문에 병력을 대기시켰다.

한니발군은 성벽을 향해 이동하였는데 성 내부의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며 어느 정도 성에 접근했을 때 갑자기 성문이 열리고 로마군이 기습했다.

이 기습으로 인해 한니발은 2800 병력의 손실을 입었고, 로마군은 500의 병력을 잃었는데 결국 한니발은 놀라 공략을 포기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놀라에서 철수 후 한니발은 카실리눔이라는 도시를 향해 이동했다.

한니발군의 선봉대는 먼저 카실리움에 도착하였지만 로마군의 돌격에 의해 패배해 버렸고, 한니발의 본군이 도착해서야 본격적인 공성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로마군의 거센 저항에 의해 카실리움의 점령에 실패한 한니발은 다시 병력을 퇴각시키고 카푸아로 이동, 그곳에서 겨울을 나기로 결심하였다.


카르타고의 병사들이 카푸아에서 겨울을 보내던 시기에
그들의 모습을 본 로마인들이 표현하길 '카르타고의 군사들은 마치 평생을 고생만 하며 살이온 것처럼 대도시에서의 온갖 유흥과 향략을 누렸고, 방탕함의 극을 달렸다'라고 전한다.

카르타고의 병사 중에는 카푸아에 거주하는 라틴족 여성과 연인 관계를 맺은 병사들도 꽤 많았는데, 연인이 있다는 것이 모든 것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칸나이 전투
때 극강을 자랑하던 그들의 전투력이 약해졌다는 평이 있었다.



봄이 되자 한니발은 전열을 재정비한 뒤 카실리눔을 향해 이동했다.

카실리눔은 카푸아 바로 옆에 있었던 소도시였는데 한니발은 카실리눔을 포위 공격했다.

카실리눔에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라는 지휘관이 있었는데 그는 노예로 구성된 병사들을 이끌고
한니발의 공격에 맞섰다.

한니발은 카실리눔을 포위하고 군량을 모두 차단했는데 그라쿠스는 독재관이 자신의 명령 없이 군대를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라 그저 방어만 하며 지켜보기만 했었다.

시간이 흘러 성내의 군량이 대부분 고갈되었고, 그라쿠스는 군량을 강물 위에 띄워서 성내로 조달하는 방법을 택했지만 한니발군의 감시하에서는 충분한 군량을 공급받을 수 없었다.

카실리눔의 병사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풀을 뽑아먹어 가며 저항을 하자 한니발은 그들을 비꼬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저들은 풀이 다시 자랄 때까지 나보고 계속 여기 있으라는 건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아무리 정신력이 강하더라도 육체에는 한계가 있었다.

제대로 된 군량을 지원받지 못한 그들은 백기를 들었고 한니발은 그들의 몸값을 받은 뒤 풀어주었다.

그들이 카실리눔에서 한니발군에 대항하며 보여준 용맹함에 크게 감동한 로마의 원로원은 그들에게 전원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고, 5년간의 병역 면제에 상금도 내렸다고 한다.

전성기때 로마의 규모,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약간은 과장 됨)

칸나이 전투 이후 소도시에 대한 한니발의 점령 계획이 계속해서 어긋나는 것만 보아도 왜 한니발이 칸나이 직후에 그 기세를 몰아 바로 로마를 공격하지 않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놀라나 나폴리 같은 도시들은 로마와 비교도 안 되는 작은 도시들인데 한니발이 칸나이 이후 곧장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점령이 불가능하였고, 대도시인 로마가 점령될 확률은 더 낮았기 때문에 로마시에서 패배할 경우 칸나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얻은 전과가 수포로 돌아가버리기 때문에 한니발로써는 로마를 공격하는 것이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한니발이 소도시들의 점령에 고전하는 동안 이탈리아 남부 도시들 중 로마와 동맹을 맺은 도시들은 카르타고 군과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은 남부의 다른 도시들의 공격을 받아 위급한 상항이었다.

공격을 받은 도시들은 로마 원로원에 사절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했지만, 로마 원로원은 지금 당장은 로마에도 그들을 위해 지원할 수 있는 병력이 없다며 요청을 거부했고, 동맹 도시들 스스로 싸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소식을 접한 로마의 법무관은 현재 동맹 도시들이 한니발과 동맹을 맺고 싶어 하는 분위기를 알고 있었기에 재고를 요청했고 원로원은 다시 회의를 소집했지만, 결국 병력 요청의 거부를 확정했다.


그리고 시칠리아에 주둔한 로마군 사령관에게서 급보가 도착했는데 그는 카르타고 해군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어 위독한 상태라며 즉시 사령관 역할을 수행할 새 법무관과 병사들에게 지급할 군량과 봉급을 요청했다.

원로원은 그의 요청에 따라 법무관은 한 명 보냈지만 군량과 봉급을 보낼 여력은 없다고 하였고, 새로 부임한 법무관은 시칠리아의 동맹 도시들과 독립국가였던 시라쿠사에서 원조를 받아 위기를 넘긴다.


칸나이 전투 이후 로마 원로원은 300명의 정원 중 3분의 1 가까이 공석이 된 원로원 의석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는데, 의원의 선출이 쉽지 않았던 것은 원로원 의원이 되기 위한 자격 요건은 그 사람이 가진 부의 정도였는데 자격이 될만한 시민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때 원로원 의원들 중 한 사람이 로마의 동맹 도시인 라틴 도시들 중에서 부유한 사람을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 선출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하며, 그렇게 되면 라틴 도시와 로마의 결속력이 지금 보다 많이 견고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로마시민으로서의 자부심과 정통성을 중요시 여기던 원로원 의원들 다수가 이 발언을 듣고는 분노하고 격앙했으며, 급기야 어떤 원로원 의원은 라틴인이 로마 원로원에 앉게 된다면 자신이 직접 칼을 들고 죽이겠다고 발언할 정도였다.

그런 원로원의 모습을 지켜보던 퀸투스 파비우스는 지금 라틴 도시들의 로마에 대한 충성심이 흔들리고 있는 와중에 이런 원로원의 모습이 그들에게 전해지면
후에 벌어질 일들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며 면박을 주었다.

이어 파비우스는 그가 임시 독재관을 한 명 선출할 테니 선출된 독재관에게 새로운 원로원 의원의 선출을 맡기자라고 말하자 원로원 의원들은 그의 의견에 동의함과 동시에 의견을 제안한 퀸투스 파비우스를 독재관으로 선출하였다.

퀸투스 파비우스는 원로원 의원들을 선출했는데 그 역시 라틴시민들은 뽑지 않았다.

하지만 로마시민 중 공직을 가졌던 사람이면 누구도 가리지 않고 모두 원로원 의원으로 선출하였고 그래도 수가 부족하자 전쟁으로 이름을 날린 자, 시민관을 수여받은 적이 있는 자들도 원로원 의원으로 선출하였다.

원로원 선출이 끝나자 파비우스는 독재관의 직책을 내려놓고 원로원 의원 신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원로원은 곧바로 집정관 선거를 하였고 여기서 이전에 언급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포스투미우스가 선출되었다.


집정관 포스투미우스는 세 번째로 집정관에 당선되는 영예를 안았는데 그는 북 이탈리아에서 2개의 로마군단병, 총 2만 병력을 이끌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북이탈리아에서 행군하는 도중 숲 속의 골짜기에 진입하였을 때 포스투미우스의 군대는 갈리아족의 매복을 만났고, 그들이 양쪽 길을 틀어막은 뒤 로마군에게 통나무를 집어던지기 시작하였다.

쏟아지는 통나무에 많은 수의 로마군이 깔려 죽기 시작했고 전열이 흐트러진 틈을 놓치지 않고, 갈리아군은 로마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동료들의 죽음 앞에 로마군은 완전히 혼란에 빠졌고 퇴각하기 시작했는데 앞 뒤로 포위당한 상태라 대분분의 병사가 전사해 버렸고 오직 10명만이 탈출하는데 성공, 그리고 극소수만이 포로로 잡혔다.

사령관이었던 집정관 포스투미우스는 생포당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다 전사했는데 갈리아족은 포스투미우스의 목을 자른 다음 그의 목을 그들의 신전으로 가져갔고 그곳에서 그의 해골에 금박을 입혀 컵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소식은 로마로 전해졌고 로마 시민들은 비참한 심정이 되어 모두 일손을 놓아버렸는데 로마 원로원은 로마시민들에게 주눅 들지 말라며 그들이 일하도록 강제하였지만, 사실  원로원 역시도 비참한 심정은 마찬가지였다.

전 로마가 비통에 빠져있을 때 이전에 한니발과 대결한 바 있었던 티베리우스 샘프로니우스가 발언을 했는데 그는 로마가 카르타고 군만 이긴다면 갈리아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며 북이탈리아에서의 싸움을 중단하자고 발언했고, 원로원은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

원로원 회의에는 마르켈루스도 참석하고 있었는데 그 역시 자신의 휘하에 있는 로마군단병의 수를 언급하며 아직 로마엔 한니발을 상대할 여력이 충분하다고 하였다.

마르켈루스에겐 칸나이에서 살아남은 병사들로 구성된 군단병이 있었는데 원로원은 마르켈루스와 그의 군대를 시칠리아로 보내 전쟁을 수행하기로 하였고, 곧바로 그와 그의 군대는 이탈리아를 떠났다.

그 뒤 원로원은 포스투미우스를 대신할 새 집정관과 2개 군단을 징병하기로 하였다.


스페인에 있었던 한니발의 동생 하스두르발은 후에 한니발과 대결하게 될 스키피오와 그의 동생이 이끄는 로마군의 침공을 받아 고전하고 있었다.

한니발이 로마 침공을 위해  병력의 대부분을 동원해 갔기 때문에 병력이 빈약했던 하스두르발은 스키피오 형제의 병력에 제대로 맞서지도 못했는데 마침 카르타고 본국에서 보낸 4천 중보병, 1천 기병이 도착했다.

하스두르발은 용기를 내어 북상했고 로마와 동맹을 맺은 부족의 마을을 공격했다.

하지만 하스두르발은 스페인 부족에게 패배해 버렸고 병력을 숙영지 안으로 철수시킨 후 꼼짝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좋은 기회로 생각한 스페인의 부족은 하스두르발이 군량을 저장해 놓은 도시를 공격해 점령하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

스페인 부족은 거듭된 소규모의 승리로 경솔해졌고 병력이 흩어지는 모습을 자주 보였는데 이를 파악한 하스두르발은 숙영지를 나와 흩어져있었던 스페인 부족군을 공격했다.

미처 전투 대형이 갖추지 못했던 스페인 부족은 전투대형을 갖춘 카르타고 군의 공격에 무너지기 시작했고 스페인 부족은 계속 밀려 한가운데로 몰렸고 이를 포위한 하스두르발은 그들을 사방에서 공격해 전멸시켰버렸다.

이렇게 부족을 진압한 하스두르발에게 카르타고 본국에서 보낸 전령이 도착했다.

카르타고 본국은 하스두르발에게 그가 가진 전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입하여  한니발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하였지만, 하스두르발은 이를 거부하면서 자신이 스페인에서 이동한다면 스페인은 곧장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이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길 자신을 이탈리아 보내고 싶다면 자신을 대신할 실력 있는 장군과 병력을 보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하스두르발의 의견을 듣게 된 카르타고 본국에서는 곧바로 그를 대신할 장군 하밀코와 군대를 파병했고 스페인에 도착한 하밀코는 군대에게 숙영지를 꾸리도록 명령 한 뒤 자신은 기병만을 데리고 하스두르발을 만나 스페인에 대한 구체적인 전황을 전해 들었다.

스페인을 하밀코에게 인계한 하스두르발은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북상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형인 한니발이 이동한 루트를 따라 이탈리아로 진입할 계획을 세웠다.

그때 하스두르발의 행군 소식을 듣게 된 로마 측 사령관인 스키피오 형제들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만일 하스두르발의 군대까지 이탈리아로 진입한다면 로마의 운명은 끝장이라고 판단하였다. 


스키피오 형제들은 하스두르발의 움직임을 추격하는 것은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고,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근처에 있는 친 카르타고 성향의 부족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소식을 듣게 된 하스두르발은 곧장 이탈리아로 가는 대신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방향을 돌렸고, 데라토사라는 곳에서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과 스키피오 형제가 이끄는 로마군단병이 만나게 되었다.

만약 이 전투에서 하스두르발이 로마군을 격파한다면 스페인에 있는 친 로마세력은 종말을 맞이해야 했고, 동시에 이탈리아에 하스두르발이 진입하는 결과를 초래하므로 로마의 운명을 결정하는 한판이 될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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