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시오다 고조
(塩田剛三, 1915. 9. 9 - 1994. 7. 17)
신장 : 154cm
체중 : 46kg
별칭 : 불세출의 달인
"전설이라는 가림막 뒤에서 무용담을 쌓는 데에 바쁘던 가짜 달인들.
그런 와중, 진짜 달인은 작은 초로의 사내였다."
호신술의 완성형 아이키도(合気道)의 탄생
아이키도는 해를 가하려 덤벼드는 상대를 그 상대가 다치지 않도록 제압하는, 이른바 호신 무술이다.
가라테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무술인 이 아이키도는
쉽게 말해 상대의 관절에 힘을 가해 몸 전체를 제압하는 합기술을 바탕으로 한다.
이처럼 아이키도는 적은 힘으로도 상대를 제압하기가 용이해, 세계적으로도 호신류 무술로 널리 보급되어 있다.
아이키도는 11세기 전설적인 사무라이였던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동생인, 미나모토노 요시미츠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
이 요시미츠가 생전에 '대동류합기유술'이라는 무술을 창제했고, 이후 수백 년간 아이즈 번의 다케다 가문에만 비밀리에 전수되어 왔다.
그러던 1915년, 우에시바 모리헤이라는 젊은이가 당시 대동류합기유술의 전수자였던 다케다 소가쿠를 만나면서 '아이키도' 탄생의 기점이 된다.
(이 대동류합기유이 창제된 이야기는 현재 학계에서 부정되고 있으며, 소가쿠가 일본의 고류검술과 유술을 수행하며 스스로 창제한 것이 정설로 여겨진다)
1883년생인 우에시바는 글재주가 있던 모친을 닮아 내성적이고 독서를 좋아하는 병약한 아이였다.
괴력의 소유자였던 부친은 이를 못마땅히 여겨 우에시바에게 스모를 하고 밖에 나가 뛰어놀도록 부추겼고, 그 덕분인지 승부욕이 강했던 우에시바는 곧 외향적인 아이로 자라난다.
19세에 유술과 검술을 배우던 우에시바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단련에 임하면서 그의 체격은 156cm에 75kg이라는 엄청나게 놀라운 근육질이 된다.
다음 해인 20세에는 육군에 입대하는데, 여기서 행군과 총검술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하며 총검술 교관을 한다.
우에시바의 총검술이 어찌나 뛰어났던지, 군은 그를 내세워 국내에 총검술을 보급하고자 했다고도 한다.
러일전쟁이 끝난 23세에 본국으로 귀국해 직업 군인의 길을 걷고자 했으나, 부친의 반대로 제대 후 귀향한다.
이후 불투명한 미래에 괴로워하며 기행을 하는 우에시바에게, 부친은 집 헛간을 유도장으로 개조해 아들에게 정신과 육체를 가다듬을 것을 권유한다.
여기서 우에시바는 단숨에 유도에 빠져들며 육체적으로 더욱 단련이 이루어졌는데, 떡을 치기 위해 절구를 내려치다 그 절구가 부러지는가 하면 비탈길에 빠진 마차를 홀로 끌어올릴 정도의 괴력의 사내였다고 한다.
그런 그가 31세가 되던 1915년, 홋카이도의 한 여관에서 다케다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당시 다케다는 54세에 150cm가 될까 말까 한 초로의 사내였다.
헌데 그런 다케다의 다채로운 기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우에시바는 그 길로 그의 제자가 된다.
그리고 이후 5년간의 사사 기간 동안, 사범 대리로서 경찰서장이나 판사 등과 같은 고위직 인물들을 지도하며 지역사회의 유명 인사가 된다.
36세가 되던 1919년엔, 부친이 중태에 빠진 것을 알고 그곳에서의 재산을 모두 다케다에게 양도하고는 귀향을 한다.
이후 지속적인 수행을 통해 독자적인 유파를 만들며 아이키도의 탄생을 선언한 우에시바는, 명사들의 지원아래 아이키도의 명성을 드높여간다.
1940년엔 이러한 아이키도를 군부의 요청에 따라 육군과 해군 등지에서 지도하나, 전쟁이 시작되면서 본래 전쟁에 비판적이던 우에시바는 지도를 멈추고 암자에 기거한다.
종전 후 아이키도(합기도)라는 정식 명칭이 사용(그때까지 우에시바는 합기 무술이라 지칭했었음), 제자들의 해외에 보급하는데 열중하였고, 1954년 열렸던 일본종합무도대회에서 수제자격인 시오다 고조가 최우수상을 차지하며 아이키도는 일본 안팎으로 유명세를 얻기 시작한다.
그렇게 아이키도는 현재 일본에만 100만 명이 넘는 회원이 있으며, 국외로는 85개국 지부와 160만 명이 넘는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아이키도와 같은 한자를 쓰는 한국의 합기도도, 대동류합기유술에 영향을 받은 무술이다.)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일화
· 53세에 유도가였던 아베 켄시로를 힘겨루기로 승리.
당시 아베는 유도 3단으로 무술 전문학교 재학생으로서 유도 유망주이던 시절 기차에서 우에시바를 처음으로 만났는데, 여기서 우에시바가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꺾어 보라고 도발했다.
이에 발끈 한 아베가 손 전체로 새끼손가락을 잡은 순간, 합기술에 의해 바닥에 넘어지고 만다.
이를 계기로 아베는 1년여간 아이키도를 배우는데,
유도 5단 선발경기에서 훗날 유명해지는 기무라 마사히코를 꺾게 된다.
(이후 기무라 마사히코는 전 일본 선수권에서 은퇴할 때까지 15년간 패배를 하지 않으며, 유도 역사계의 전설이 된다.)
· 56세에 스모 상위 랭커였던 덴류 사부로와 힘겨루기를 해 넘어뜨림.
당시 덴류 사부로는 34세, 187cm, 116kg였는데
아이키도 연무를 보러 방문한 무도인들이 사기라며 웅성거리자 우에시바가 직접 시범을 보여주겠다고 나섰고, 이에 덴류 사부로가 나섰다가 합기술에 의해 제압당하고 만 것이다.
여기서 덴류 사부로는 상대의 힘을 그대로 역이용하는 아이키도에 큰 감명을 받고는 우에시바의 도장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평생 교류를 한다.
· 58세에 육군 헌병대원들의 습격을 저지.
당시 육군 헌병 교육대에서 종전의 검도 수업을 폐지하고 새로이 아이키도를 받아들이자, 이에 격분한 헌병대원 대여섯이 목검을 장비한 채 우에시바의 집으로 야습을 시도한다.
여기서 우에시바는 사방에서 돌진해오는 헌병대원들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흥분해서 목검을 휘두르느라 체력이 고갈된 헌병대원들을 합기술로 넘어뜨려버린다.
이 습격을 주모했던 헌병이 전 프로야구 선수이자 감독이었던 아라카와 히로시의 아내의 사촌이었는데
훗날 아라카와는 한 인터뷰에서 아이키도를 배운다는 자신에게 아내의 사촌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밝혔다.
"너 아이키도 배운다면서?
이야~ 내가 헌병대장이었을 때 부하들이랑 우에시바네에 야습했었는데, 그 할아버지 진짜 강하더라."
· 다음은 아라카와가 프로야구 선수 시절, 아이키도 도장에서 우에시바에게 직접 지도를 받았을 때의 일이다.
"우에시바 선생님이 자신을 배팅하듯이 목검으로 쳐보라고 하길래 과감하게 갈겨봤죠.
그런데 목검을 휘두르는 순간, 오히려 제가 넘어져 버렸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70대 중반이었죠."
이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코치를 맡던 아라카와는
아이키도에서 착안한 학다리 타법을 왕정치에게 지도했고, 곧 왕정치는 홈런왕이 되었다.
아이키도 달인 시오다 고조
1915년생인 시오다 고조는, 어려서부터 검도와 유도를 배우면서 10대 시절에 이미 유도 3단을 취득하고 있었다.
유도 사나이였던 그가 아이키도에 빠지게 되는 시점이 바로 이즈음이었다.
18세이던 1932년, 시오다는 교장의 권유를 받아 우에시바의 도장을 견학하게 되는데 여기서 혈기왕성하던 시오다는, 우에시바에게 대련을 신청한다.
자신과 비슷한 신장대(당시 시오다 역시 150대의 신장)의 50살 노인이 못 미더웠던 것일까, 아니면 교장의 잔소리에 억지로 견학을 오느라 심통이 났던 것일까... 그렇게 시오다는 자신만만하게 우에시바에게 달려들었고, 순식간에 그대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리고 그 길로 유도를 그만둔 시오다는, 우에시바의 밑에서 8년간 수행에 힘쓴다.
27세이던 1941년부터 중국과 대만 등지를 돌며 아이키도 보급에 힘쓰던 시오다는, 5년 후에는 귀국해 다시금 우에시바 밑에서 수행에 들어간다.
그리고 1955년 7월에 열린 일본종합무도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차지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다.
이처럼 아이키도의 메커니즘은 관절의 방향에 따라 운동 방향 또한 바뀌다는 사실에 기반을 둔다.
그렇기 때문에 적은 힘으로도 상대방 제압이 가능한 것이며,
우에시바와 시오다는 말년에도 아이키도를 지도할 수 있었다.
현재 아이키도는 일본 경시청 수업에 정식으로 채택되어 있다.
시오다 고조의 일화
· 대학생 시절 기무라 마사히코와의 팔씨름에서 승리.
유도 역사의 전설인 기무라 마사히코는 대학 시절 장사 중의 장사였다고 한다.
그런 기무라에게 당시 선배였던 시오다가 팔씨름을 제의했고, 여기서 기무라는 3전 2패로 패배했다고 한다.
· 생전 시오다는 호흡에 의한 순간적인 힘을 내기 위해선 엄지발가락을 땅에 댄 채로 있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시오다가 구두를 신고 자갈밭을 걸어가면,
그 자리엔 엄지발가락 부분에 해당되는 부분이 움푹 패어 있었다고 한다.
· 우에시바 밑에서 수련을 시작한 이래 시오다는 반사 신경의 중요성을 깨닫고선, 어항 속의 금붕어 움직임을 흉내 내며 좌우로 움직이는 훈련을 8년간 지속했다.
이 덕분에 그는 뛰어난 반사 신경과 집중력을 얻게 되었는데, 언젠가는 급발진해 오는 차량을 순간적으로 피하면서 교통사고를 면했다고 한다.
· 훗날 격투기 선수가 되는 이와쿠라 츠요시의 어깨에 부상을 입힘.
중학교 때부터 유도를 하며 그 유명한 요시다 히데히코와도 경기를 한 적이 있는 이와쿠라 츠요시,
그런 그가 20세 무렵부터는 복싱에 입문했다.
천성이 격투기 바보였던 이와쿠라는 힘을 탐구하던 와중 22세 때 시오다의 아이키도 세미나에 참석했는데 여기서 시오다를 미심쩍게 생각한 이와쿠라가 대련을 신청했고, 이 과정에서 전력으로 달려들다 낙법을 할 새도 없이 고꾸라져 그만 왼쪽 어깨에 부상을 입고 만다.
이후 가라테와 브라질 유술 대회에서 입상하던 이와쿠라는, 프로 선수와 타격 코치를 병행하게 된다.
이와쿠라는 시오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고류무술을 표방한 가짜들이 있는데, 진짜도 있습니다.
시오다 선생은 정말 강했죠.
아이키도는 인체의 구조를 이해하는 기술입니다."
ㆍ 한마 바키의 만화가 이타가키 케이스케는 자위대
시절의 친구가 시오다의 제자였던 것을 계기로 인연을 쌓기 시작했다.
이후 이타가키는 자신의 만화에 시오다를 모델로 등장시키는가 하면, 시오다의 자서전에서 삽화를 담당하기도 한다.
이타가키는 시오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온몸이 지뢰밭인 사람입니다."
· 46세이던 1962년, 도장을 방문한 로버트 케네디 부부 앞에서 아이키도를 시연.
하지만 여기서 케네디는 시오다가 제자들과 과장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였는데, 이는 아이키도의 특성상 관절기로 인해 피시연자가 부상을 방지하고자, 그리고
화려하게 보이도록 다소 과장되게 낙법을 하기 때문이었다.
이에 케네디는 시오다에게 동행한 경호원과의 대련을 요청했고, 시오다는 이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 대련에서 190cm, 100kg의 경호원은 마치 거미처럼 땅에 납작해진 채 꼼짝도 하지 못한다.
훗날 케네디는 해당 일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련 후, 경호원이 제게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 하더군요.
하지만 아침을 먹었으면 이겼을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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