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은 어째서 일어났을까?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일본에서 유력하게 주장되는 설을 소개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쇼군’ 자리에 대한 욕심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먼저 ‘쇼군(장군)’ 이란 무엇일까?
쇼군은 천황의 명을 받아 이민족을 정벌하러 가는 장군들에게 주어진 임시직이다.
고대부터 ‘쇼군’은 매우 명예로운 직위라 높은 명망을 지닌 귀족가가 도맡아왔다.
그러다가 막부시대를 최초로 개창한 ‘귀무자(오니부샤)’ 라고도 불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한 가지 룰을 만드는데, 그것은 바로 ‘쇼군은 겐지(미나모토 씨)가 아니면 될 수 없다’라는 것이다.
미나모토 씨는 그 기원이 무려 천황가의 자손일 정도로 일본에서 명망 높았던 가문이었다.
즉, 쇼군의 자리는 미나모토 씨에 필적할 정도로 고귀한 집안 출신이 아니면 오를 수 없는 자리였다.
문제는 히데요시의 가문은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히데요시의 출신에 대해선 빈농의 아들, 아시가루의 아들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확실한 건 그의 출신은 매우 천했다는 것이었고, 천출이란 꼬리표 때문에 그는 쇼군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이는 아무리 일본 최고의 권력자라고 할 지라도 천황가와 관련된 고대 일본의 전통에 거역할 수 없다는 일본 특유의 보수성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관백, 태합의 자리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늘 쇼군의 자리에 오르고 싶어 했는데...
사실 히데요시가 쇼군에 오를 방법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통에는 전통의 방식으로 인정받으면 된다’라는 것이었다.
쇼군은 흔히 ‘정이대장군’에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최초의 쇼군은 ‘정신라대장군’
즉 천황의 명을 받아 신라를 공격하는 장군이었다.
최초의 정이장군은 720년, 최초의 정이대장군은 794년에 나타나는 반면, 최초의 정신라장군 479년, 최초의 정신라대장군은 603년에 나타났다.
즉, 쇼군은 원래 천황의 명을 받아 배를 타고 신라를 정벌하는 장군이란 뜻이었다.
히데요시 본인이 정신라대장군(쇼군)이 되어 신라의 후예인 조선을 공격하고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내에 가졌다고 여겨진 전설 속의 임나(미마나) 영토를 회복한다면, 그 누구도 히데요시가 쇼군의 자리에 오르는 것에 반대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이는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전근대 시기까지 일본인들에겐 임나일본부설이 정설처럼 여겨져 왔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실제로 이 설에 따른다면 왜 히데요시가 강화조건으로 조선의 하삼도의 할양을 요구했는지, 왜 왜성을 수십 개 쌓아가며 경남을 영구 영토화 하려고 했는지 설명이 된다.
전설 속의 임나(미마나)의 영역이 바로 경남 쪽이었고, 실제로 왜성이 지어진 위치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는 전설 속의 임나 영토의 회복을 통해 쇼군 지위에 오르는 것이 임진왜란의 진정한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에서도 유력한 설 중 하나라고 한다.
히데요시의 쇼군 자리에 대한 열망… 그러나 다른 다이묘들에겐 이런 히데요시의 개인적인 소망은 의미가 없었고, 그에 따라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곧바로 조선에서 철수하게 된다.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나니.
나니와(오사카)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로다.
(露と落ち 露と消えにし 我が身かな 浪速のことは 夢のまた夢)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남겼다는 시처럼, 임진왜란을 통해 이루려던 그의 쇼군에 대한 집착은
수많은 목숨의 희생을 뒤로한 채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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