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농노 1명은 가격이 얼마였을까?
1860년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 해방령을 내리기 전, 전 러시아 인구의 약 50% 이상이 영주의 영지에 속해 있는 농노였다.
보통 농노는 땅과 함께 거래되었으나 농노해방이 이루어지기 약 60여 년 전부터는 농노만의 판매 및 농노를 은행에 담보로 설정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럼 농노 1명은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졌었을까? 지역마다, 시대마다 농노의 가격은 매우 유동적이었는데, 19세기 초, 추흐롬스키의 말초프 군의 영주인 지노비예프 제국해군 대령의 채무 변제를 위해 작성한 서류에 그의 농노들의 이름과 나이, 가격이 나와있었다.
건장한 남자 농노 (14세 - 45세)는 약 30 - 45 루블
건강한 기혼 여자 농노 (14세 - 35세)는 약 10 - 15 루블
어린아이들은 1 - 5 루블 정도 였고 아직 미혼의 16세 여자 농노는 17 루블로 값을 매겼다.
하지만 여기는 당시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물론 모스크바에서도 멀리 떨어진 우랄 인근으로 이 가격은 당시로도 매우 낮은 가격으로 보인다.
비슷한 시대, 러시아 사학자 바실리 클류체프스키의 기록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의 건장한 남자 농노 1명은 120 루블이며 그를 은행에 담보로 설정하면 40 루블을 영주에게 대출해 주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의 다른 물품들의 가격은 소 1마리가 약 3 루블, 암말 1마리가 약 9 루블 정도 였고, 곡식으로는 밀 1 체트베르찌 (약 200리터)가 약 3 루블 정도 였다.
우리 기준으로 밀을 쌀로 바꿔서 현재 가격으로 환산하고, 200리터를 200 킬로그램으로 계산해 보면
쌀 1 가마니는 80 킬로그램임으로 3 루블 = 2.5 가마니 = 156,000원 X 2.5 가마니 = 390,000원이다.
즉, 1 루블을 현재 가격 130,000원 정도로 계산해보면 건장한 남자 농노 1명은 120 루블 X 130,000원 = 15,600,000원 정도로 계산된다.
당시 러시아 대귀족들은 대규모의 영지를 사고파는 계약을 맺곤 했는데 프리미엄이 붙는 영지는 농노 1명당 250 루블까지 값을 쳐주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제화공, 석공 등 기술자들은 높은 가격으로 팔리곤 했는데 2500 루블에 판매된 제화공도 있었다.
일렉산드르 1세 통치 기간 (1801 - 1825)부터 농노의 거래에 대한 제한이 생기기 시작하였고(신문 광고 금지, 농노 거래 오픈 마켓 금지), 1833년 니콜라이 1세는 농노 거래 시 농노 가족 구성원을 따로따로 거래하는 것을 금지했다.
1847년부터 농노가 돈을 지불하고 자신과 가족의 자유를 사는 것이 허락되었다.
독일의 '붉은 거리 표지판'
독일의 도시의 거리명 표지판은 보통 푸른 바탕에 거리명이 쓰여있지만 가끔 이렇게 붉은색으로 표시된 거리명 표지판이 있다.
이건 오래된 독일 도시들 중 목조로 지어진 건물들이 많은 곳에 붙어있는데 강 쪽, 호수 쪽 방향 등 물이 있는 곳을 알려준다.
화재 시 소방용수를 얻을 수 있는 방향을 알려주는 것으로 대화재 발생 시 대피 통로의 역할도 한다.
2차 대전 영국군의 비신사적 기만 전술
2차 대전 막바지에 영국군은 독일 휴고 슈나이더 사 제작 P490 7.92 mm 탄약을 제작하여 독일제와 똑같은 탄약상자에 포장한 후 독일군 지역에 뿌린다.
보급이 어려웠던 독일군은 버려진 독일제 소총 탄약 상자를 발견하면 아군이 남겨둔 것으로 생각하고 사용한다.
하지만 이건 정상적인 탄환이 아니어서 공이로 치면 발사되는 것이 아니라, 총알의 뒷부분이 폭발하며 소총을 파괴하고 발사자를 살상하는 거짓 탄약이었다.
백악관의 대통령 경호원
1970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백악관 경호원들에게 제복을 입힌다.
유럽 국가들과 소련을 방문한 후 이들 국가의 '근위대'와 그 제복들에 감명을 받은 닉슨이 백악관 경호원들을 '근위병'으로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장난감 병정'이라는 조소와 비난에 몇 개월 후 제복 제도는 폐지되었고 이 제복들은 아이오와의 한 군사학교에 기증되었다.
CASIO 카시오 (전자시계)의 시작
오늘날 G shock라는 전자시계로 유명한 카시오.
전자계산기로도 널리 알려진 이 카시오의 첫 번째 상품은 담배 파이프였다.
1946년 카시오 타다오가 설립한 '카시오 제작소'가 처음 만들어 팔던 물건은 이렇게 손가락에 끼운 채 담배를 필 수 있는 '담배 파이프 링'이었다.
이 제품이 대히트 치면서 모은 자본으로 카시오는 전자계산기를 제작, 판매하여 대성공의 길에 들어섰다.
2차 대전의 성병 (VD) 예방 포스터들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은 성병으로 고통받은 병사가 많았는데 2차 대전 참전 미군 병사들 역시 전염병인 성병에 시달렸다.
10대 말, 20대 초의 어린 나이에 머나먼 유럽과 아시아 전선에 참전하여 난생처음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돈으로 살 수 있는 여성들을 만나게 된 미군 병사들은 성병 앞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게다가 성병에 전염된 병사는 결국 전투에 참가할 수 없게 되어 미군 전력과 사기에 큰 영향을 끼친다.
유태인 남편들을 구한 독일의 여성들
나치가 집권하면서 실시한 인구조사에 의하면 1933년 베를린에는 16만 명 이상의 유태인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1943년에는 단 수 천명 정도로 그 수가 줄었다.
이들은 대부분 나치의 이혼 강요를 따르지 않은 독일인 부인들의 유태인 남편들과 나치의 필요에 의해 수용소로 보내지지 않은 유태인들이었다.
하지만 1943년 겨울,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는 총통에게 유태인이 단 한 명도 없는 베를린을 보여주기로 결심한다.
SS 친위대의 전격적인 작전으로 모든 유태인들은 직장과 가정에서 체포되어 베를린 로젠슈트라쎄 2-4번지의 임시 수용소로 보내진 후 아우슈비츠행 열차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나치를 당혹스럽게 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로젠슈트라쎄의 수용소 앞에 유태인 남편을 둔 독일인 부인들 수백 명이 모여들어 남편들의 석방 요구 시위를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1주일 이상 계속된 '독일 최초 인종 차별 반대 시위'는 결국 독일인 부인들이 이긴 것으로 끝난다.
이미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유태인 남편들도 다시 베를린으로 돌려보내진 후 석방되었고 로젠슈트라쎄에서 대기하던 인원 역시 전원 석방되었다.
왜 나치가 이 유태인들을 석방했는지 그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연합군의 계속되는 베를린 공습과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참패 등이 수도 베를린에서 소요 사태가 일어나면 안 된다는 나치의 판단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남편들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전시의 엄중한 상황에서 공습이 계속되는 베를린의 거리로 나온 독일인 부인들이 없었다면 이 유태인 남편들은 모두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에서 사망했을 것이다.
탈영죄로 총살형을 당한 유일한 미군 병사
1920년 디트로이트의 폴란드 이민 가정에서 태어난 에디 슬로빅은 어린 시절부터 문제아였다.
12세 때 인근 금속 공장에서 황동제 철물을 훔치다 체포되어 교도소 생활을 하기도 하였고, 18세 때에는 술에 취한 채 자동차를 훔쳐서 사고를 내고 체포되어 2년여간 수감되기도 하였다.
1942년 가석방된 후 역시 폴란드 이민자인 안투아넷 비쉬네프스키와 결혼하였고 전과자인 이유로 징집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으나 1944년 1월 입영 통지서를 받고 미육군 28 보병사단에 배속되어 프랑스 전선으로 투입된다.
소속 부대인 28사단 109 연대로 가던 중 동료인 존 탱키 이병과 함께 탈영한 슬로빅은 전선 순찰 중이던 캐나다 헌병을 만나게 되고 소속 부대로 가는 길을 잃었다는 핑계를 대며 약 한 달 반을 캐나다 헌병들과 다니며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대로 가는 길을 영원히 잃을 수는 없는 법.
결국 자대에 배치된 슬로빅 이병은 배치된 다음 날 중대장 랄프 그로트 대위에게 자신은 '전투에 참가하기엔 너무 겁이 난다'며 소총수가 아닌 대대 보급병으로 재배치를 요구하였으나 묵살된다.
그러자 1944년 10월 9일 슬로빅 이병은 자신은 '두려움 때문에 전투에 참가할 수 없으며 공식적으로 부대에서 탈영할 것'이라는 자신의 서명이 담긴 메모를 대대 취사병을 통해 상위 장교에게 전달한다.
이 메모를 받은 헌병 장교와 대대장 로스 헨베스트 중령은 슬로빅 이병을 불러 메모를 다시 가져가고 중대로 돌아가면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될 것이라고 설득하였으나 슬로빅은 거절한다.
헨베스트 중령이 호출한 사단 법무 장교 헨리 소머 중령 역시 메모 철회를 설득하였으나 슬로빅은 또다시 거절한다.
슬로빅 이병은 탈영죄로 군사재판을 받고 수감되어 몇 년의 징역을 사는 것이 전쟁터에 있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전선의 전황은 대단히 어려운 상태였으며 28 보병사단 역시 벨기에 국경의 휘르트겐 숲에서 사상자가 속출하는 어려운 전투를 하고 있었다.
결국 체포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된 슬로빅 이병은 1944년 11월 11일 노먼 코타 소장이 재판장인 군법회의에서 총살형을 선고받는다.
상황의 심각함을 알게 된 슬로빅은 미군 총사령관인 아이젠하워 원수에게 서한을 써보았으나 아무 효과도 없었다.
1945년 1월 31일 프랑스의 생트 마리 오 미네의 주둔지에서 실로빅의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12명의 병사가 집행한 총살형에서 모든 총알이 급소를 피해 맞는 바람에 슬로빅은 즉사하지 않고 15분 이상 헐떡이다 사망한다.
2차 대전 시 군법회의를 통해 사형이 집행된 미군은 총 102명이었는데 슬로빅을 제외한 모두는 전시 강간 및 민간인 살해죄였다.
슬로빅의 사형 집행은 당시 프랑스 전선에서 많이 발생하던 탈영병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본보기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이다.
1942년부터 종전까지 미군 탈영병의 숫자는 2,864명이며 그중 48명이 총살형을 선고받았으나 슬로빅을 제외한 모두 감형되어 결국 석방되었다.
총살된 미군 범죄자들의 묘지인 프랑스의 페르 앙 타르네누아에 매장된 슬로빅의 유해는 아내 안투아넷이 미 정부에 미국에 이장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탄원을 하였으나 1979년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허락을 받지 못했다.
폴란드계 미국인 참전군인협회가 레이건 대통령에게 탄원하여 결국 1987년 슬로빅 이병의 유해는 미국으로 돌아와 아내 안투아넷의 옆에 묻혔다.
고사포 처형
고사포 처형법은 Blowing from a gun이라 불리며 16세기 인도의 무갈제국 및 동시대의 포르투갈인들이 사용하던 처형 방식이다.
이 대포 처형법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857년 영국령 인도에서 일어난 '세포이 반란 사건' 당시 영국군이 반란군을 처형하던 방식 때문이다.
식민지 인도에 거주하던 영국인 여성과 아이들 까지 강간 후 살해한 세포이 반란군에 대한 반감이 하늘을 찌르던 영국군은 자신들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처형법으로 반란군들을 처형한 것이다.
인종 교배는 공산주의다!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2차 대전 미국 군수 산업의 생산력의 한 예
2차 대전 시 대서양을 건너 연합군에게 물자를 공급하던 '리버티'급 수송선(배수량 14,450톤)
1940년 최초 건조 시작된 14척의 리버티는 230일 만에 완성되었다.
다음 건조 물량은 42일 만에 진수까지 끝낸다.
1943년부터는 미국 조선소에서 리버티 급 수송선이 매일 3척씩 진수되었고 종전까지 2750척이 만들어졌다.
페르시아의 처형법
스카피즘 (Scaphism)이라고 하는 이 처형법은 보트에 묶어서 버린다고 하여 기정형 棄艇刑 또는 벌레에 노출되게 한다고 하여 노충형 露蟲刑이라고도 한다.
죄수를 벌거벗긴 후 바닥이 뚫린 나무상자에 묶은 후 호수에 버린다.
죄수에게는 벌꿀과 우유를 먹여 설사가 나도록 하고 몸에는 꿀을 발라 벌레가 꼬이게 한다.
죄수의 분뇨와 몸에 발린 꿀에 모여든 벌레들은 죄수의 살을 뜯어먹고 알을 낳게 되어 결국 탈수와 기아 및 곤충으로 인한 쇼크사에 이르게 된다.
플루타크 영웅전에 따르면 기원전 403년 다리우스 2세의 아들 키루스를 죽인 미트리다테스가 이 방법으로 17일간 고통을 받다 사망했다고 한다.
미국의 인디언들도 비슷한 처형법이 있는데 죄수를 기름과 인분을 바른 후 숲의 나무에 묶어서 곤충과 개미들의 뜯김을 받으며 기아와 탈수로 사망에 이르게 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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