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탑
1877년 스웨덴 국왕 오스카2세의 궁전에 스웨덴 최초의 전화가 설치된 후 수도 스톡홀름의 부유층 사이에는 전화 설치 붐이 일어난다.
매월 고정적인 전화비만 약 250 크로나 (현재 가치 한화 약 120만원)정도 였지만 급격한 회선 증가에 따라 스웨덴 통신회사는 1887년 스톡홀름 중심부에 전화탑을 설치한다.
고도 제한 때문에 원래 80미터 높이로 계획되었던 전화탑은 45미터로 낮춰졌으며 약 5500회선의 전화 회선을 신규 공급하게 되었다.
스톡홀름 전화탑은 1952년 화재로 소실, 철거되었다.
기병대의 함대 나포
'텍셀 전투' 또는 '덴 헬더에서의 네덜란드 함대 나포'라 불리는 이 전투는 기병대와 함대 간의 전투로 1795년 14척의 네덜란드 함대가 프랑스 경기병 연대 (후사르)에게 나포 당한다.
프랑스 혁명에 위협을 느낀 유럽 각국이 결성한 '1차 대프랑스 동맹 First Coalition'에 참여한 네덜란드 공화국 해군의 함대는 1795년 1월 당시 유럽에 몰아친 매서운 한파로 덴 헬더 항구 인근에서 결빙된 바다에 발이 묶였다.
이를 알게된 프랑스의 샤를 피슈그뤼 장군은 경기병 연대와 전열보병 연대를 급파, 얼음 위를 걸어서 바다에 묶인 네덜란드 함대 전부를 나포한다.
이 전무후무한 기병대의 함대 나포 작전은 서로 사망자 0명의 아름다운 결과로 끝났다.
(이후 1818년 베네주엘라의 아푸레 강에서 베네주엘라 독립군의 기병대가 스페인 해군의 연안함정을 몇 척 나포한 경우가 있음)
파푸아 뉴기니의 유럽 출신 왕
1904년 스웨덴 출신의 선원 카를 페테르손이 탄 상선 '요한 알브레흐트 공작'호는 파푸아 뉴기니의 타바 섬 인근에서 풍랑으로 침몰한다.
다행히 타바 섬의 해안으로 헤엄쳐 목숨을 건진 페테르손의 눈 앞에 나타난 이들은 섬의 식인종 토인들이었고, 페테르손은 생포되어 타바섬의 추장에게 바쳐졌다.
하지만 추장의 딸인 싱도 공주는 페테르손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지고 이 토인 공주와 결혼한 페테르손은 섬에 남아 코코넛 재배 농장을 경영하게 된다.
추장이 사망한 후 페테르손은 '타바섬의 왕'에 추대되었고 되었고, 코코넛 재배 및 무역으로 돈을 번 그는 인근 섬들을 구입, 왕국의 영역을 넓혀갔다.
와이프 싱도 공주가 산후 합병증으로 사망한 후 스웨덴으로 돌아와 스웨덴 여자와 재혼한 페테르손은 2년 여후 다시 타바섬으로 돌아왔으나 농장은 쇠락하였고 페테르손과 새 부인은 말라리아로 고생하다 치료를 위해 떠난 호주에서 생을 마감한다.
최장수 현역 해군 함정
러시아 해군 (구 러시아 제국 해군, 구 소련 해군) 소속 구난함 '코무나'
길이 81미터, 넓이 13.2미터의 러시아 발트함대 소속 구난함인 '코무나'는 1912년 건조 시작되어 1913년 진수, 1915년 러시아 제국 해군에 인도되어 현재 105년 간 현역인 전세계 해군 함정 중 최장수 현역함이다.
'코무나'함의 105년 된 예비 프로펠러
나치의 스텔스기
프로젝트명 호르텐 Ho IX (나치 항공성은 Ho-229로, 대량 생산용 코드는 고타 Go-229로 사용)
1931년 부터 독일의 항공설계자 호르텐 형제는 제트엔진 추진의 동체 일체형 전익기인 스텔스기의 설계를 시작한다.
1944년 3월 1일 첫 비행에 성공한 Ho-229는 시험용으로 6대가 제작 완료 또는 제작 중이었으며 실전용으로 20대가 주문되었다.
1945년 나치의 패전으로 미군은 시제기들을 접수한 후 이 기체들을 미국으로 보내 스텔스기 연구를 계속한다.
영국군의 맥주 공수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은 영국군의 사기에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양조회사 헤네거와 콘스테이블은 영국 공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 노르망디 이후 크고 작은 작전 성공때 마다 자신들이 양조한 맥주를 지원하기로 한다.
맥주 운송은 영국 공군의 주력 전투기 스피트파이어에 맥주통을 달아서 해결하기로 한다.
현재도 '스피트파이어' 에일 맥주가 판매 중이다.
놀아야 월급을 받는 팀
포드 자동차의 생산 공장에는 작업 시간으로 임금을 받는 게 아닌 '휴식 시간'을 카운트하여 임금을 받는 팀이 있었다.
바로 '생산라인 긴급 수리팀'.
수리팀은 포드의 트레이드 마크인 컨베이어 생산라인이 끊임없이 돌아가게 만드는 팀이었는데 생산 라인에 문제가 발생하여 라인이 정지하면 그 때부터 받을 급여액의 계산이 정지되었다.
따라서 이 수리팀은 최대한 빨리 라인을 수리하고, 또 최장시간 고장이 발생하지 않도록 수리의 질을 높여 팀의 '휴식시간'을 길게 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익이었다.
튜턴기사단의 임금 지불
1456년 튜턴 기사단은 자신들의 본성이자 중세 유럽 최대의 벽돌 축조 요새인 마리엔부르크 성 (현 폴란드 말보르크)을 폴란드군으로 부터 방어에 성공한다.
하지만 전투에서 승리한 튜턴 기사단에는 문제가 발생하는데 바로 보헤미아 용병들에게 임금으로 지불할 돈이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전투 후 임금을 받지 못하게 될 처지에 놓인 용병들 사이에선 시위의 기운이 감돌았고 이를 알게된 튜턴 기사단의 지휘부는 임금 대신 마리엔부르크성을 용병들에게 넘겨준다.
용병들에겐 아무 쓸모 없는 마리엔부르크성은 바로 폴란드군에게 비싼 가격에 팔렸고 돈을 나눠가진 용병들은 보헤미아(현 체코)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최초의 증기 터빈 선박 '터비니아'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선박 엔진인 증기 터빈 기관 추진 선박을 대영제국 해군에게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한 찰스 파슨스는 1894년 직접 설계 제작하기로 결심한다.
터비니아 Turbinia라고 명명된 길이 30미터, 배수량 44톤짜리 이 배는 증기터빈의 너무 빠른 회전수로 인해 발생하는 추진 스크류의 케비테이션 (공동현상)으로 효과적이지 않다는 게 판명되었고 결국 재설계 후 3축 스크류 추진 증기터빈 선박 (2400 마력)으로 제작되었다.
1897년 영국 포츠머드 인근 스피트헤드에서 열린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 관함식에 참가한 180여척의 영국 및 열강 해군의 거대한 함정들 사이로 '터비니아'가 당시로는 믿을 수 없는 속도인 시속 35노트(약 65km/h)로 등장, 함정들 사이를 요리조리 헤치며 영국 및 열강 해군의 관계자들을 놀라게 한 후 사라진다.
관함식 두번째 날인 다음날에도 다시 등장한 '터비니아'는 추적하는 영국 기뢰정을 비교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따돌리고 포츠머드 방향으로 사라졌다.
위 사진이 바로 관함식 두번째 날에 찍힌 터비니아와 브릿지 위에 서있는 사람이 찰스 파슨스이다.
1898년 영국 해군은 파슨스에게 기뢰정 두 척용 증기 터빈을 주문하였고 1906년 현대 전함의 대명사 '드레드노트'급 전함에 파슨스 증기 터빈을 장착한다 .
앵그리버드
소련과의 '계속 전쟁' (1941 - 1944)때 핀란드군 병사들이 사용한 '수류탄 새총'
앵그리버드를 핀란드인이 만든 것이이해가 된다.
스푸트니크 쇼크 후의 두 인생
1957년 소련이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를 지구 궤도로 발사하는 데 성공하자 미국은 '스푸트니크 쇼크'에 빠진다.
모든 면에서 최고라고 자부하던 미국의 자존심은 무너져버리고 이 스푸트니크 쇼크를 만회하기 위해 기초교육 과정부터 재검토를 하기 시작한다.
1958년 2월 한 달간 모스크바의 10학년생 (고1) 알렉세이 쿠츠코프와 시카고의 역시 10학년생 스티븐 라페카스의 학교 생활 및 학업 전과정을 면밀히 관찰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중산층 가정 출신의 고등학생인 이 둘의 학업 성취도는 러시아인 쿠츠코프가 최소한 2년 이상 앞지르는 것으로 판명되었고 특히 수학, 화학, 물리등에서 미국인 라페카스가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나 이후 미국 초-중등교육과정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이 러시아인과 미국인은 흥미롭게도 이후 비슷한 직업을 가지게 된다.
러시아인 쿠츠코프는 모스크바의 항공기술대학을 졸업, 일생을 소련 항공감독국에서 일했으며 노릴스크 항공사의 부사장을 끝으로 은퇴했다.
미국인 라페카스는 일리노이 주립대학을 졸업한 후 군에서 조종사 과정을 거쳐 미국의 항공사 TWA의 조종사로 30여년을 근무한 후 은퇴했다.
프로펠러 기차
쉬넨쩨펠린(Shienenzeppelin)이라 불리는 이 프로펠러 기관차는 1929년 독일 제국 철도회사의 후원으로 독일의 엔지니어인 프란츠 크루켄버그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 '레일 위의 쩨펠린'은 BMW의 600 마력짜리 V-12, 휘발유 46리터 엔진을 이용하여 당시로는 믿기 힘든 시속 225km를 달성한다.
이 열차 최고 속도 기록은 1954년에야 깨지게 된다.
쉬넨쩨펠린은 프로펠러의 안전성 문제와 가솔린 엔진의 경제성의 이유로 상용화되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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