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 양

몰라도 되는 몰랐던 사실들 3편

MeRCuRyNim 2022. 12. 26. 01:13
728x90


사무실 장식용 그림 그려주고 2억 달러를 번 사나이

2005년 마크 주커버그는 캘리포니아 팔로 알토에 페이스북 사무실을 열고 장식용 그림을 미술가인 데이비드 쵸우에게 의뢰한다.

그리고는 그 대가로 현금 6만 달러 또는 그 금액만큼의 당시 '아무도 모르던 페이스북'의 주식을 제안한다.


쵸우는 페북 주식을 선택했고 5년 후인 2010년 쵸우 소유의 주식 가격은 2억 달러를 넘게 된다.


뉴욕의 담배 광고

담배 광고가 극도로 제한된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20세기에는 일상생활 어디서나 담배 광고를 볼 수 있었다.

위 사진은 뉴욕 타임스퀘어의 클라리지 호텔에 붙어있는 카멜 담배 광고판 (1941년 - 1966년)인데 매 5초마다 광고의 남자가 직경 1.5미터짜리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러시아의 마지막 황태자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의 유일한 적장자인 알렉세이 황태자의 놀이방(러시아 짜르스코예 셀로 궁전)

지금 시각으로도 진기한 장난감들이 널려있다.


1904년 태어난 알렉세이는 유전병인 혈우병으로 고통받았으며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니콜라이 황제의 전 가족과 함께 우랄의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볼셰비키들에게 총살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만 14세였다.


영하 48도의 야쿠츠크

겨울에는 영하 50도가 일상적인 기온인 시베리아의 야쿠츠크에서는 아침에 야외 주차한 자동차의 시동을 거는 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런 '자동차용 코트'를 입히고 밤새 시동을 걸어놓는다.

왼쪽 부분을 잘 살펴보면 배기가스 배출용 파이프가 보인다.

자동차에 자동 시동 장치를 장착하여 매 15분간 시동을 걸었다가 15분은 시동을 끈다고 한다.


이 '자동차용 코트'는 여자 이름인 '나타샤'로 불리는데 야쿠츠크에서는 겨울이 오면 차의 시동을 걸고 봄이 오면 시동을 끈다고 한다.


투탕카멘의 팔찌

추정 제작 연도 기원전 1400년 대


최초의 우주 반란

항명 중인 제럴드 카와 윌리엄 포그

1973년 12월 28일 미국의 우주정거장인 '스카이랩 4'의 우주비행사들은 그날 아침 정해진 나사와의 교신 시간에 나오지 않았다.

모두 우주가 처음인 3명의 우주비행사들은 이미 84일의 비행이 지났지만 너무 타이트한 나사의 비행일정 관리에 불만을 품고 명령 거부에 나선 것이었다.

'스카이랩 반란 (Skylab Mutiny)'이라 불리는 이 사건 이후 장기간의 우주 비행 시 탑승 인원에 대한 훈련에 심리학자가 투입되기 시작했다.


스카이랩 4의 우주비행사들인 제럴드 카, 에드워드 깁슨, 윌리엄 포그

CSS '버지니아'(왼쪽)와 USS '모니터'


장갑함 Ironclad

미국의 남북전쟁 기간인 1862년 3월, 북군의 해안 봉쇄에 당하고만 있던 남군은 화재에서 살아남은 북군의 USS 메리맥을 나포, 인양하여 장갑함으로 개조한다.

'메리맥'의 '버지니아' 장갑함 리모델링 모습


북군의 해안 봉쇄를 무력화할 신무기로 함명으로 CSS '버지니아'로 바꾸고, 신형 증기기관 및 7인치 함포로 무장한 후 철도 레일용 단조철을 함정 전체에 둘러대어 평균 장갑 두께 약 10센티미터의 장갑함을 만들었다.

3월 8일 첫 해전에 나선 남군의 '버지니아'는 체서피크 만 인근에서 북군의 목조 프리깃함인 '콩그레스'와 '컴벌랜드'함과 조우한다.

'버지니아'의 충각 공격으로 침몰하는 북군의 '컴벌랜드'


북군의 프리깃함에서 쏟아지는 함포 세례를 뚫고 '버지니아'는 '컴벌랜드'를 간단히 충각 공격으로 침몰시킨 후 '콩그레스' 역시 함포 공격으로 좌초시킨다.

남군은 이 해전의 승리로 북군의 해안 봉쇄가 뚫렸다고 생각했으나 다음날인 3월 9일 '버지니아'의 눈앞에 전혀 새로운 신형 함정이 나타났다.

바로 USS '모니터 Monitor'함이었다

USS 모니터의 항해 모습


북군의 목조 프리깃인 '미네소타'함과 같이 등장한 '모니터'는 해군 함정의 역사를 바꾼 전혀 새로운 장갑함이었다.

목조 프리깃에 장갑을 덧댄 '버지니아'와는 달리 백지상태에서 장갑함으로 설계, 건조된 '모니터'는 갑판이 수면 높이와 비슷하였고 11인치 함포 2문을 장착한 포탑을 지닌 평균 장갑 두께 12센티미터, 갑판 장갑 20센티미터의 당시로는 괴물 군함이었다.

모니터 함 모형


1862년 3월 9일 인류 역사상 최초의 장갑함끼리의 해전이 일어났다.


'모니터'와 '버지니아'가 수평선에 등장하자 목조 함정들은 전투 현장에서 물러나고 장갑함 두 척간의 해전이 시작된 것이었다.


'메리맥 해전'이라 불리는 이 해전에서 두 장갑함은 상대방에게 치열하게 함포 공격을 하였으며 두 번씩 서로 충각 공격을 감행하였다.

메리맥 해전 상상도


4시간여의 회전 후 결과적으로는 '버지니아'의 충각 공격에 선수가 파괴된 '모니터'가 퇴각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지만 '버지니아'는 이미 장갑 전체가 소모되어 남군의 포츠머드 해군 기지로 귀환하였으나 끝내 수리되지 못한 채 3개월 후인 1862년 5월 북군의 공격을 받고 남군에 의해 자침 되었다.

이 '매리맥 해전' 이후 열강 해군들은 목조함들을 서둘러 퇴역시키고 철제함들로 해군 함정을 교체하기 시작한다.


워털루 이빨

20세기 초까지 인간의 빠진 이빨을 대신할 수 있는 의치로 가장 좋은 것은 다른 인간의 이빨이었다.


하지만 당시 유럽에 만연했던 매독에 감염되지 않은 젊은 치아를 구하기는 쉽지 않은 일로, 사고나 전쟁에서 죽은 젊은이의 이빨을 수거, 판매하는 일이 성행했다.


5만 명 이상의 전사자가 생긴 1815년 워털루 전투 현장에선 전투 종료 후 젊은 전사자들의 치아를 약탈하려는 쟁탈전이 벌어졌었다.


이때 수거되어 의치로 다른 사람들의 입 안에서 치아를 대신하던 '워털루 이빨'들은 1860년대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다시 한번 대량으로 신선한 치아가 공급되기 전까지 인기리에 사용되었다


최연소 소련 출신 미국 망명자

1980년, 소련에서 미국으로 이민온 우크라이나 유태계 12세의 블라디미르 폴로브착은 16세의 누나와 함께 시카고의 경찰서에 들어와 도움을 요청한다.


미국으로 이주한 지 6개월 여, 직업을 얻지 못한 채 인근의 유태인 친척들의 도움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오던 폴로브착의 부모가 소련으로의 재이주를 결정한 탓이었다.



"나는 이번에 돌아가면 다시는 미국 땅을 못 밟는다는 걸 알았어요.

하지만 아빠는 우리를 달래기도 하며 위협하기도 하며 다시 소련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죠"

시카고 법원의 결정으로 미국에 남게 된 최연소 소련 망명자 폴로브착은 이름을 소련식인 블라디미르에서 미국식 월터로 개명하였고 성년이 되던 해인 1985년, 미국 시민이 되었다.

월터 폴로브착의 최근 가족 사진


머그샷

17세기 절대 군주를 노리다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폐위, 처형된 영국의 찰스 1세.

위 초상화는 네덜란드 출신 궁정화가 반 다이크가 그린 찰스 1세의 공식 초상화이다.

또한 반 다이크는 현대의 머그샷과 비슷한 찰스 1세의 세 방향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 이유는 이탈리아의 조각가 베르니니에게 찰스 1세의 흉부상 제작을 의뢰하기 위한 것이었다.

완성된 조각상은 찰스 1세에게 전달되었으나 169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 세 방향 초상화는 1822년 영국인 윌리엄 뷰캐넌이 베르니니 가문에게서 구입, 왕실에 헌납하여 로열 콜렉션으로 현재까지 영국 왕실이 소유하고 있다.


1000 야드의 시선

전투의 공포와 충격으로 넋을 잃고 있는 상태로 자신의 눈앞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를 '1000 야드의 시선 Thousand-yard Stare'라고 한다.

위 그림은 2차 대전 태평양 전선에 투입된 한 미군 병사의 전쟁 후 상태를 그린 것으로 1945년 '라이프 Life' 잡지에 소개되어 공허한 시선이 마치 1000 야드 앞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며 '1000 야드의 시선'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다.


1944년 태평양 전선의 미해병 존 마틴 하티의 전투 후 찍힌 사진.

공허한 '1000 야드의 시선'이 잘 나타나있다.


2010년 아프가니스탄의 제이콥 무어 상병


역시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괴의 교전 후의 덴마크군 병사 모습이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