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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11

명장들이 이끌어낸 역사적 전투

아우구스투스 - 악티움 해전 로마내전의 완전 종식을 알리는 전투로 제정 로마의 서막을 열었다. 당시 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아우구스투스와 그리고 베테랑 안토니우스 두 사람 최후의 전투였다. 이때 아우구스투스의 전력은 배 400척에 병사 19,000명 정도였고 안토니우스는 배 200척에 25,000명 정도였다. 군사력이 우세했던 안토니우스의 가장 큰 패배의 원인은 함께 참전했던 클레오파트라가 아우구스투스와의 전투에서 퇴각하는 것을 본 안토니우스가 전투에서 졌다는 생각에 자신도 퇴각해 버렸고, 졸지에 총사령관을 잃어버린 남은 병사들의 사기를 잃어버렸고 그것이 전투의 패배를 가져왔다. 이순신 - 명량해전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인물이다. 나폴레옹 - 아우스터리츠 전투 나폴레옹의 최고 전성기를 보..

역 사 2023.07.01

인류 역사 최초의 철갑선 전쟁

19세기 남과 북으로 나뉘어 전쟁을 벌였던 미합중국 전쟁은 시간이 흘러 북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전쟁에서 보급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기 때문에 북부보다 공업 생산력이 떨어졌던 남부 연합은 대부분의 전쟁 물자를 유럽에서 실어왔고, 그 수송로의 확보는 남부 연합의 생명줄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남부 연합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북군은 남부 연합의 해상 보급로를 끊기 위해 해군을 이용해 끊임없이 남군을 괴롭혔다. 더 이상 북군의 괴롭힘에 당할 수많은 없었던 남군은 대결전병기를 만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대결전병기 철갑선 버지니아(CSS Virginia)이다. 목선이었던 매리멕호의 윗부분을 제거한 뒤 그 자리에 철판을 두른 이 철갑선은 배수량 4,100톤에 길이만 84m, 종류별로 총 12문..

역 사 2023.06.28

카르타고의 한니발(7) - 이탈리아 전역

마르켈루스와 한니발이 놀라에서 대치했지만, 정작 한니발은 놀라를 공격하기보단 나폴리를 다시 공격하기 위해 이동하였다. 그러나 다시 한번 나폴리의 튼튼한 성벽에 가로막혀 이번에는 남쪽으로 내려가 뉴케리아라는 도시를 점령한 뒤 다시 놀라로 이동하였다. 한니발이 놀라에 도착했을 때 놀라의 시민들은 한니발의 편에 서고 싶어 했지만, 놀라의 분위기를 파악한 마르켈루스는 놀라시 안으로 들어가 성벽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마르켈루스가 수비에 전념하고 있을 때 놀라의 시민이 몰래 한니발에게 사절을 보내어 음모를 꾸몄는데, 로마군이 한니발의 공격을 막을 동안 시민들이 몰래 로마군의 짐을 약탈한 뒤 안ㆍ밖에서 서로 협공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 계략은 이내 누설되어 마르켈루스가 알아채게 되었고, 자신의 병력 일부를 짐을..

역 사 2023.01.13

카르타고의 한니발(6) - 카푸아와 한니발의 동맹

칸나이 전투에서 대승한 이후로도 한니발은 계속 칸나이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붙잡은 포로들을 로마인, 동맹 도시 출신 시민 이렇게 두 분류로 나누었다. 그는 동맹 도시 출신 병사들은 별다른 요구조건 없이 위로의 말과 함께 풀어주는데 이것은 동맹 도시들의 환심을 사길 원했기 때문이며, 그들이 한니발은 성군이며 오직 로마에 대한 복수심으로 전쟁을 치르는 것이지, 자신들에게는 원한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로마 편에서 돌아서 자신의 편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포로들을 모두 양분한 뒤 로마인들을 끌고 왔는데 로마인들은 모두 '이제 죽었구나'생각했다. 그런데 로마인들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한니발은 그들에게 꽤 친절하게 대해주며 로마인들에게 몸값을 받으면 풀어주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로마인 포로들로 구성..

역 사 2023.01.12

카르타고의 한니발(5) - 칸나이 전투

서로의 적과 마주한 양측 사령관들은 대책 없이 전투에 임하려 하지 않았고, 전투 벌어지기 전 어떻게 전술을 구사할 것인지 작전을 세밀하게 세워두었다. 바로와 파울루스 그리고 원로원들이 모인 지휘부에서는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의 약점이 바로 중보병이라고 판단하였다. 한니발의 중보병은 로마군에 전력이 많이 부족하였다. 한니발의 중보병은 8천 아프리칸 보병 + 8천 이베리안 보병 + 1만 6천 갈리아 + 기타 용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위의 구성에서 1만 6천의 아프리칸과 이베리안 보병은 한니발이 직접 스페인에서 데리고 온 데다, 알프스를 넘는 등의 고난을 이겨낸 병사들이라 매우 뛰어난 전력이긴 하지만 나머지 1만 6천 갈리아 + 기타 용병은 로마군에 비해 전투력이 꽤 많이 떨어지는 군인들이었다. 한니발..

역 사 2023.01.09

카르타고의 한니발(4) - 파비우스의 전략

퀸투스 파비우스는 원로원 의원 중 최고의 능력을 갖춘 인물 중에 한 사람이었다. 집정관을 이미 세 번이나 역임했으며, 개선식을 거행했고, 또한 전투 경험도 풍부하여 1차 포에니 전쟁과 북이탈리아에서의 식민지 전쟁에서도 사령관으로 복무했었다. 독재관으로 선출된 이유도 위의 업적들이 그 배경이었을 것이다. 독재관은 24명의 릭토르라 불리는 호위를 받는 엄청난 예우를 받는 직책이기도 하다. 로마의 시민들은 파비우스가 한니발을 저지해 줄 것을 간절히 바라고 바랬다. 시민들의 기대에 호응하기 위한 파비우스의 전략은 지금껏 한니발의 군대를 상대한 다른 집정관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우선 지형이 높은 곳에 병력을 주둔시킨 후, 한니발의 군대를 견제하면서 한니발이 군량을 조달할만한 주변 도시들을 모두 비워두도록 명령했다..

역 사 2023.01.03

카르타고의 한니발(3) - 트레비아 전투, 트라시메누스 호수의 전투

집정관 샘프로니우스는 전투를 하고자 하는 의지가 매우 강했다. 그리고 이것을 파악한 한니발 역시 서둘러 전투를 하려고 마음먹었다. 사실 전투를 서두를수록 한니발에게 유리했던 것은 갈리아인들이 한니발 군대를 지원하고는 있지만 한니발 군이 로마를 상대로 얼마나 잘 싸워줄지는 미지수였다. 한니발이 로마와의 전투에서 패해버리면 지금까지 식량과 자원만 낭비한 것이고, 한니발의 능력이 로마와 대적할 정도의 우수한 장군이면 로마와 대적하고 있는 그들에겐 천군만마인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니발은 이들 갈리아인들에게 전투의 성과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속히 전투를 벌이고 싶어 하였다. 그리고 샘프로니우스도 전쟁을 하고 싶어 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한니발에게 승리한다면 자신은 로마군의 영웅이 되는 것이기 ..

역 사 2022.12.30

카르타고의 한니발 - 알프스 행군

로마 원로원에 대한 카르타고 원로원의 행태를 알게 된 로마는 카로타고에 선전포고를 하였는데 그때까지 로마의 전쟁 전적을 본다면 보통의 일이 아니었다. 6세기 : 2개 전투 - 1승 1패 5세기 : 10개 전투 - 9승 1패 4세기 : 10개 전투 - 9승 1패 3세기 : 24개 전투 - 18승 6패 총전적 : 37승 9패 (승률 80%) 덧붙여 패배한 전투마저도 소소한 전투에서의 패배였다. 이처럼 로마 군대가 전장에서 승전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의 예를 몇 가지 들자면 다음과 같다. 실력 있는 지휘관 고대 전쟁에선 지휘관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는데, 로마는 지휘관의 자질이 모두 우수했다. 로마의 지휘관이 우수한 이유는 로마내부에서 지휘관이 되기 위한 자격의 경쟁이 매우 치열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는 젊은이..

역 사 2022.12.28

카르타고의 한니발 - 전쟁의 서막

한니발 바르카는 카르타고라는 도시국가 출신이다. 카르타고가 단순한 도시국가가 아니었으며, 카르타고가 통치하고 있는 국가는 작은 제국의 크기를 넘어선 수준이었다. 위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아주 큰 나라였다. 다만 지금과 같은 국가형태가 아니었고, 동등한 행정 통치가 아니라 도시 카르타고가 맹주 역할을 하고 나머지 지역은 카르타고의 통치하에 있었다. 한니발이 태어났을 당시의 카르타고는 분위기가 매우 좋지 않았다. 이 시기의 카르타고는 로마에 패배한 직후였고, 그 댓가로 시칠리아와 샤르데냐, 코르시카를 연달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위의 그림의 동그라미친 부분이 빼앗긴 영토인데, 위에서 부터 순서대로 코르시카, 샤르데냐, 시칠리아가 로마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 영토들이 얼마나 중요한 지역인가 하면, 샤르..

역 사 2022.12.27

인류의 역사

기원전 3125년 인류가 나라의 틀을 갖추기 시작했을 때 이 때는 나라다운 나라가 이집트 밖에 없었으며 나머지는 부족 연합체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로부터 약 400여 년이 더 지난 후, 기원전 2775년 수메르와 파키스탄과 인도 사이에서도 나라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부터 약 700여 년이 흐른 뒤, 중동에만 나타났던 문명들이 동쪽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때가 기원전 2050년 약 4천 년 전이다. 그로부터 약 500여 년이 더 흐른 3500여 년 전, 동아시아에는 최초의 나라인 상나라가 나타났고 그리스에서도 유럽 문명의 싹이 트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시기의 이집트는 제국을 세우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로부터 또 500여 년이 지난 후, 이집트 제국은 붕괴해 줄어들었고, 중국은 주나라가..

역 사 2022.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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