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 양

몰라도 되는 몰랐던 사실들 5편

MeRCuRyNim 2022. 12. 26. 02:41
728x90


하와이 달러

1941년 진주만 쇼크로 미국 정부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입장에 처한다.

바로 하와이 제도에서 통용 중이던 달러화를 보존해야 하는 것이었다.

만일 일본군이 다시 하와이를 공격, 점령하여 하와이에서 통용되고 있는 모든 달러화를 손에 넣게 된다면 미국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1942년 1월 미국 정부는 개인당 200달러, 법인당 500달러만 남긴 채 모든 현금을 수거한다.

총액 약 2억 달러의 이 현금은 즉시 소각되었다.

그리곤 뒤에 HAWAII라고 인쇄된 '하와이용 달러'를 제작하여 하와이 제도 내에서 통용시키기 시작한다.

이 하와이 달러는 미 본토에서는 인정이 되지 않았으며 하와이 제도에서는 HAWAII가 인쇄되지 않은 달러화의 통용이 금지되었다.

전쟁 막바지인 1944년 10월까지 4억 1100만 '하와이 달러'가 발행되었고 1946년 4월까지 통용되었다.

현재도 발견되고 있는 이 '하와이 달러'는 미국의 어떤 은행에서라도 진품 판정 후 즉시 현금으로 교환받을 수 있다.


무슬림으로 구성된 히틀러의 SS 친위부대

SS 친위대 제13 무장 산악 사단 '한트샤르'의 부대 마크인 중세 무슬림의 외날 단도 '칸쟈르'.

보스니아의 무슬림 병사들과 일부 크로아티아의 카톨릭 병사들로 구성된 이 '한트샤르 SS부대'는 유고슬라비아의 세르비아인들과 유태인들에 대한 작전을 위해 만들어졌는데 부사관 이상 간부는 거의 독일인이었다.

이들은 정교도인 세르비아인과 유태인에 대한 가혹한 행위로 악명이 높았으나 독일의 패배가 유력해지자 대부분의 무슬림 병사들이 탈영, 부대가 해체되었다.

실레지엔의 주둔지에서 무슬림식 기도 중인 SS 친위대 제13 무장 산악 사단 병사들 (1943년)


소련이 스위스와 외교관계를 단절한 이유 (1923 - 1946)

스위스인 모리스 콘라디는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커다란 제과 공장을 차린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스위스 국적인 그는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청원하여 러시아 군에 입대한 후 루마니아 전선에서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스위스인 콘라디는 반혁명파인 백군에 가담, 사회주의자들을 처단하고 다닌다.

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그의 제과 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아버지, 숙부 그리고 그의 형제는 볼셰비키들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처형된다.

러시아 내전이 끝나고 스위스로 돌아온 후 소련의 공산 정권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던 콘라디는 1923년 스위스 로잔느의 ‘세실’ 호텔에서 주 스위스 소련 대사를 권총으로 사살하곤 경찰에 바로 자수하였다.

이어 벌어진 재판에서 그는 소련 정권의 잔혹함과 자신의 가족이 소련에서 고문, 살해당한 사실들을 70여 명의 증인 및 여러 증거와 함께 제시하여 배심원들의 마음을 돌린다.

그리고 '과거 소련에 의해 박해받은 상태로 저지른 일’로 무죄 선고를 받았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던 전유럽은 이 판결에 환호하였고 소련은 스위스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그리고 2차 대전이 끝난 1946년 스위스 - 소련의 외교 관계가 복원된다.


런던의 양치기

1926년부터 1938년까지 런던의 하이드 파크 및 다른 공원들의 잔디 깎기를 위해 양들이 동원된다.


사람이 아니라 양을 풀어서 잔디를 깎겠다고 한 이유는 단 하나, 사람보다 싸다는 이유였다.

유수포프 공작과 아내 이리나 대공녀


라스푸틴을 죽였고 할리우드을 바꾼 사나이

러시아 제국의 가장 유력한 귀족 집안 출신이며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조카인 이리나 대공녀와 결혼한 펠릭스 유수포프 공작은 ‘괴승’ 라스푸틴을 처단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망명한 유수포프 공작은 1932년 미국의 영화사 MGM이 제작한 ‘라스푸틴과 황후’ 영화가 제작, 상영되자 MGM을 고소한다.

영화에서 자신의 아내 이리나 대공녀가 라스푸틴의 애인으로 나왔는데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며 이로 인한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다.

유수포프 공작 가문을 잘 아는 영국 상류사회 인사들의 증언이 이어지며 런던의 민사법원은 MGM이 유수포프 공작과 이리나 대공녀에게 25,000 파운드 (현재 가치 약 10억 원)를 지급하라고 명령한다.

MGM은 25,000 파운드와 이미 미국에서 상영된 것에 대한 보상금으로 75,000파운드를 추가로 지급하기로 유수포프 공작과 합의한다. (현재 가치 약 30여 억 원)


우리가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마지막에 이런 자막이 올라가는 걸 보게 된다.

This motion picture is protected under the copyright laws of the United States and other countries throughout the world. Country of first publication: United States of America. Any unauthorized exhibition, distribution, or copying of this film or any part thereof (including soundtrack) may result in civil liability and criminal prosecution. The story, all names, characters, and incidents portrayed in this production are fictitious. No identification with actual persons (living or deceased), places, buildings, and products is intended or should be inferred. No person or entity associated with this film received payment or anything of value, or entered into any agreement, in connection with the depiction of tobacco products. No animals were harmed in the making of this motion picture.

바로 ‘All persons fictitious disclaimer’라는 것으로 이 영화의 등장인물은 모두 허구이며 혹시 비슷하다고 느껴도 그건 사실이 아니다는 얘긴데 바로 1933년 유수포프 공작과 거액으로 합의해야 했던 MGM사의 이 사건 이후에 할리우드의 모든 영화가 이 글귀를 넣게 된다.


소련 출신 부인을 얻은 대만 총통 니콜라이 엘리자로프 (중국 이름 장경국 장징궈)

1935년. 백인 여자와 그 옆의 남자는 장개석(장제스)의 장남이자 후에 대만 총통 (재임 1978년 - 1988년)이었던 장경국 (장징궈)이다.

대만 총통 니콜라이 엘리자로프 (장경국)


젊은 시절 공산주의에 빠져 자신의 아버지를 부정하고 소련으로 간 장경국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아버지 장개석은 중국 인민의 배신자이며 중국 인민 혁명의 반역자이고 현재 중국의 검은 세력의 중심입니다" (장경국의 공산당 입당 문서)

중국 국민당 총통인 장개석의 장남은 공산당으로선 매우 중요한 자산이었고 장경국은 레닌의 누나 (안나 엘리자로바) 집에 거처를 얻었다.

그리곤 자신의 이름을 레닌의 아들 격인 니콜라이로 바꾸고(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엘리자로프),

등소평과 같이 공부하며 소련의 정치대학 및 기갑학교를 졸업한다.

장경국과 파이나


정치대학 졸업 후 시베리아의 군수공장에 취업, 관리자 레벨까지 진급한 후 백러시아 출신 파이나 바흐라바와 결혼한다.

하지만 그 후 아버지 장개석이 중국 공산당과의 합작을 깨자 장경국의 행방은 묘연해진다.

2차 국공합작 후 장개석이 소련 정부에 아들의 행방을 묻자 그 때야 소련 당국은 그를 찾아내 중국으로 가는 것을 허락했다.

안젤라 마리아 '겔리' 라우발


히틀러의 근친 애인 '겔리'

히틀러의 성생활에 대해서 알려진 것 중 흥미로운 것은 그가 조카딸과 관계를 이어왔다는 것이다.

히틀러의 아버지 알리오스 히틀러는 4번 이상 결혼을 하였고, 8명 이상의 아이를 낳았는데 겔리의 엄마는 히틀러보다 6살 어린 여동생이었다.

1927년 19세의 겔리는 뮌헨에서 대학 진학을 준비하며 히틀러의 보디가드 중 한 명인 모리스와 연애 중 히틀러의 눈에 들게 된다.


삼촌 아돌프 히틀러와의 관계는 계속 이어지게 되고 히틀러는 겔리가 항상 원하던 '가수의 길'로 적극 후원하나 그녀의 '가수로서의 재능'은 보잘것없었다.


1931년 23세의 겔리는 뮌헨에서 '자살'하게 된다.

과연 그녀는 자살한 것일까?

첫 번째 의혹은 겔리가 히틀러의 고향 오스트리아에서 만난 남자와 연애, 임신하여 이를 질투한 히틀러가 그녀를 죽게 했다는 것.

두 번째는 겔리가 히틀러와의 연애 특히 그와의 섹스에 대해 주위에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자 게슈타포 수장 히믈러가 그녀를 제거했다는 것.


히틀러는 후에 겔리가 그의 '단 하나뿐인 사랑이었다'라고 했다(윌리엄 쉬어러 The Rise and Fall of the Third Reich 1960)


깨어보니 망한 공산당

1988년 폴란드의 얀 그제프스키 (46세)는 뇌종양으로 코마 상태에 빠진다.

뇌종양의 크기는 직경 약 5cm로 웬일인지 코마에 빠진 4년 후인 1992년부터 종양의 크기가 점차 작아지게 된다.

코마에 빠진 그제프스키는 당시 4명의 자녀를 두었고, 폴란드는 공산 정권 하의 나라였으나 19년 후인 2007년 그는 11명의 손자를 가지고, 자본주의 국가 폴란드에서 깨어나게 된다.


1차 대전 비행기의 대지 공격 무기

가벼운 창인 '재블린'의 일종인 이 투척 무기는 1차 대전 프랑스 비행 부대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연필 길이 정도의 이 '창 끝' 무기는 지상의 15센티미터 정도의 목판 두께는 가볍게 뚫고 적에게 피해를 입혔다.

독일군은 이 무기를 발전시켜 투척 후 특유의 소리가 나도록 무기에 구멍을 뚫거나 끝 부분을 특수 제작하여 적에게 공포심을 자아내게 하였다.

하지만 대부분 귀족 출신인 독일군 비행사들은 이 무기가 '신사적이지 않다'며 사용하기를 꺼렸다.


러시아 제국의 근위 장교

러시아 제국의 황제 근위대는 러시아 귀족 자제들 모두가 복무하기를 원하는 부대였다.

하지만 이 부대에 장교 복무하려면 매우 많은 규정들을 지켜야 했는데 그중 몇 개는

1. 근위대 장교는 봉급을 받지 않는다.

제복과 무기 및 자신의 말을 유지하는 비용은 모두 자신이 부담해야 했다.

2. 근위대 장교는 황제가 허락하지 않는 결혼을 할 수 없고 프랑스어를 못하는 여자와 (당시 러시아 제국의 신흥 부유층이었던 상인 계층) 결혼할 수 없었다.

3. 제국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극장 관람 시 무대 앞 7번째 열 (현재 S석, A석 정도) 뒤에서 관람하면 안 된다.

4. 식당에서 와인을 주문하는 경우 무조건 병으로 주문해야 한다.

남긴 건 가져갈 수 없었다.

5. 물건 구입 시 15 코페이크 이상은 무조건 1 루블로 지불해야 한다.

즉 1 루블 15코페이크짜리는 2 루블로 지불.

6. 특정 물품은 황제 지정 상점에서만 구입한다.

식료품은 엘리세예프스키, 모피는 메르텡스, 보석은 파베르졔 등에서 사야 한다.


우크라이나 백군 기병 장교의 아들 스모 챔피언 다이호

1940년 일본령 사할린에서 러시아 백군 장교인 마르키얀 보르시코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다이호 고키.

1961년부터 1971년까지 일본 스모 챔피언인 요코즈나를 지내며 '쇼와 시대의 위대한 요코즈나'로 불렸다.



전 후 일본 아이들은 '자이언츠 (프로야구팀)', '다이호 (요코즈나)', '계란말이'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3가지로 꼽곤 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