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적이며 절대적인 머큐리의 잡학 상식

새콤달콤 맛있는 파인애플

MeRCuRyNim 2023. 3. 8. 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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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남아메리카 파라나-파라과이 강 유역에서 자라나던 과일이 있었다.​


남미 일대에서 '나나스(맛좋은 과일)'이라고 불리던 과일은 자연과 인간에 의해 점점 북상하여 멕시코와 카리브 해 일대까지 자라기 시작했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곳곳에서 재배가 이루어졌다.


1493년 신대륙을 탐험하던 콜럼버스도 우연히 이 과일을 접한 뒤 그 맛에 반하여 스페인으로 가져왔다.


콜럼버스 : "원주민들은 이 과일을 '나나스(nanas)'
라고 부르던데 우린 이걸 piña de Indes(인디언의 솔방울)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스페인인들 : "아나나스(ananas)? 피냐(piña)?

너무 헷갈리고 어려운데?

그냥 아무렇게나 부릅시다!"​

이후 북아메리카의 영ㆍ미계 탐험가들은 이 과일을 솔방울의 모양에서 따서 'Pineapple'이라 부르게 된다.


당시 신대륙에서 자생하던 종자라면 무엇이든지 호기심에 가득 차 수집하던 스페인인들은 이 기묘한
과일에 많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그것을 재배하기 위한 최적의 생산지를 찾아다녔다.​


16세기는 스페인 함대가 전 세계로 원정을 다니며
활발하게 식민지 점령을 하던 시절이었기에 스페인 선원들은 괌, 짐바브웨를 포함해서 파인애플이 자라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곳에는 많은 수의 종자를 뿌려 두었다.


그렇게 태평양의 한적한 섬 하와이에도 파인애플의 종자가 도착했고 일 년 내내 따뜻한 하와이의 기후 속에서 파인애플은 다른 지역에 비해 잘 자랐지만,​
여러 소규모 부족들이 난립하는 하와이에서 대규모 재배는 무리였다.


1795년 여러 부족들이 통합되어 하와이 통일왕국이 성립되었지만 여전히 파인애플은 주요 수출물도 아니었으며 유럽으로의 운송 수단이 항로뿐이었기 때문에 덥고 습한 환경에서 상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인기 있는 작물은 아니었다.


당시 하와이의 주력 작물은 19세기 전 세계에서
폭발적으로 수요 증가가 이루어지던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였다.


19세기 중반부터 미국으로부터 많은 이민자들이 하와이로 몰려오기 시작했고 설탕 플랜테이션을 미국 출신의 이민자들이 차지하면서​


이들은 플랜테이션을 기반으로 하와이의 주요 산업들을 독점하며 그 재력을 바탕으로 정계에까지 진출해 사회 지도층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는데​


칼라카우아 왕 대에 이르면 미국과 유럽 출신의 사업가들이 왕의 폐위를 놓고 협박까지 할 만큼
하와이의 왕 조차도 어찌하지 못하는 세력이 되어 있었다.


릴리우오칼라니(여왕) : "너희들은 남의 나라에서 돈 좀 벌었다고 해서 하와이가 너네 것처럼 보여?!!​

자꾸 그러면 가만 안 둔다!!!!"


플랜테이션 자본가들 : "엌ㅋㅋㅋㅋㅋㅋ

저 X이 아직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네

잠깐 기다려봐!"



백인 유력자들의 기득권을 제한하려는 여왕의 움직임을 눈치챈 그들은 공안위원회를 결성하여 미국 해병대를 상륙시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공안위원회 : 야!!! 여왕!!  안에 있는 거 아니까 빨리 나와!!


1893년 1월 17일 공안위원회는 민병대까지 동원하여 여왕을 강제로 폐위 시켜버리고 미합중국에 하와이를 편입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그로버 클리블랜드: 야!! 우리가 깡패야?? 다른 나라 왕 마음대로 폐위시킨 것도 모자라 나라까지 편입시키게??​

하지만 당시 대통령이었던 클리블랜드가 거부하는 바람에 하와이가 미합중국으로 편입되는 것이 무산되어 버리자


하와이 공안위원회는 샌퍼드 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시켜 하와이 공화국을 선포하게 된다.


하와이에서 이러한 소란스러운 일들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미국에서 파인애플의 인기는 계속해서 상승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93년의 어느 날 미국에서 파인애플의 껍질을 원통으로 돌려 깔 수 있는 기계가 발명되었는데


이 기계를 이용하면 1분에 4개의 파인애플 껍질을 벗겨낼 수 있었다.​


아직 냉장 기술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새콤달콤 맛 좋은 파인애플을 장기 보관하는 방법으로 통조림이 선호되었고, 위 기계의 발명으로 파인애플 통조림 산업이 활기를 띠게 된다.


이 시기 미국 파인애플 통조림의 주요 재료인 파인애플을 카리브 해 인근 국가에서 수입해 오고 있었는데 미국의 주요 파인애플 산지였던 플로리다 농부들이 거세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플로리다 농민들: "아니!! 미국 파인애플 놔두고 외국 파인애플을 쓰는 이유가 뭡니까?? 대체!!"​


사업가 : "뭐래!!! 외국이 단가가 싸니까 수입하잖아!  억울하면 너희도 가격을 낮춰!!"


플로리다 농민들: "아오 저 거대 자본가 놈들~
가격 후려치기 때문에 농민들 다 죽게 생겼다!!!!!"


자국 농민들의 원성을 듣다 못한 미국 정부가 수입 파인애플에 대해 35%의 관세를 매겨버리자
통조림 업자들은 관세 때문에 값이 오른 카리브산 파인애플을 더 이상 수입하기가 힘들어졌고
미국 현지의 통조림 생산공장들은 수지가 악화되어 줄줄이 폐업해 버렸다.


하지만 파인애플 사업을 완전히 포기할 수 없었던 사업가들은 파인애플을 현지 조달해서 제품을 만들어 수출할 수 있는 새로운 블루오션을 찾아 나선다.​


한편 비슷한 시기 1896년 새로운 미국 대통령으로 윌리엄 매킨리가 취임하게 되었고, 하와이 공화국은 다시 한번 미국에 러브콜을 보낸다.​


샌퍼드 돌 : "이곳 하와이도 미국의 자본주의를 누릴 수 있게 미합중국으로의 편입을 재가해 주시겠소."


윌리엄 매킨리 : "ㅇㅋ"

클리블랜드와 달리, 매킨리는 하와이가 편입하는 것을 허용하였고 1898년 하와이는 속주 형태로 미국에 합병된다.(아직 정식 주는 아니었다)


미국에 편입된 후 처음이자 마지막 하와이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샌퍼드 돌이 총독으로 임명되고
동시에 하와이의 농산물에 대한 관세가 철폐되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파인애플 사업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와이에서 파인애플 통조림 산업을 할 경우
여러모로 이점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1. 관세가 없기에 카리브해의 파인애플보다 많이 남는
이윤,

2. 하와이 원주민과 해외 이주민의 값싼 노동력으로 파인애플 경작이 가능!

3. 하와이 속주정부로부터 싼값에 농장과 공장부지 매입 등의 많은 지원이었다.


파인애플 사업가들 : "하와이로 돌진!!!!!!"

미국 사업가들은 하와이로 몰려들어 파인애플 농장과 통조림 공장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버드대 농학부를 갓 졸업한 22세의 젊은이 제임스 돌...

그도 파인애플 사업에 대한 꿈을 품고 차곡차곡 모아둔 자금을 가지고 하와이로 왔는데...



그는 바로 전직 공화국 대통령이자 현직 하와이 총독인 샌퍼드 돌의 사촌동생이었다.​


제임스 돌: 사촌 형 저 왔어요!! 'ㅅ'


샌퍼드 돌 : What's up bro!

제임스 돌은 샌퍼드 돌의 후광을 등에 지고 모아둔 자금으로 하와이 주정부로부터 64에이커의 파인애플 농장 부지를 구입 후 든든한 지원을 바탕으로 사업 준비에 착수한다.​


그리고 샌퍼드 돌은 우여곡절 끝에 1901년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Hawaiian Pineapple Company)를 창립하게 된다.​


당시 하와이에서 파인애플 재배업은 대성황을 이루었는데 하와이에서 재배되던 Smooth cayenne 종이 통조림 가공용으로 제격이었으며 기후도
파인애플을 재배하기에 너무나도 알맞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경쟁지역인 플로리다는 서리가 자주 끼었던 데다가 파인애플 품질이 하와이산에 비해 좋지 않았다.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는 신생회사였지만
크게 두 가지 전략에 초점을 맞추고 성장해 나갔다.


1. 광고

공격적인 광고전략으로 미국 본토에까지 파인애플 통조림을 대대적으로 선전했으며 라디오와 신문을 이용해서 파인애플이 생소한 미국인들에게 인지도를 높였다.


2. 기술 개발

1911년 1분에 100개의 파인애플의 껍질을 돌려 깔 수 있는 기계가 발명되자 통조림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이러한 전략으로 인해 미국으로 더 많은 파인애플이 실려나갔고, 더 많은 사람들이 파인애플을 접하게
되었으며, 이국적 정취가 곁들여진 달콤새콤한 맛과 식후 소화에도 도움이 되는 과일로 알려져 파인애플을 찾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22년에 이르러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는 세계 최대의 파인애플 유통기업으로 등극하게 된다.


그리고 하와이 주정부로부터 다시 여의도 면적의 27배에 달하는 땅을 사들여 사업을 확장했는데
이때 회사의 주요 경작지였던 라나이 섬에서만 세계 파인애플 생산량의 75%가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파인애플 사업계의 정점으로 군림하며
돈다발을 쓸어 담으면서 탄탄대로를 걷는가 했지만...


1929년 대공황이 발발하여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청년실업이...


하와이안 파인애플 : 국민 여러분 맛있는 파인애플 드세요~헤헤 😉


국민들 : -_-;;


하와이안 파인애플 : ㅠㅠ


당장 일용할 양식도 없는 사람들에게 파인애플 통조림은 사치에 불과했고, 파인애플 소비량이 바닥을 치게 되면서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의 실적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그동안의 무리한 사업 확장과 실적 악화로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는 1932년에만 500만 달러의 적자를 내면서 파산 직전에 이르렀고 경영자였던 제임스 돌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다.


이러한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던
Castle&Cooke 사에서 하와이안 파인애플의 지분을 21% 추가로 매입하면서 지배권을 장악한 뒤
제임스 돌은 자신의 회사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하와이안 파인애플 컴퍼니는 사실상 Castle&Cooke 사의 계열사나 다름없게 되면서


청운의 꿈을 품고 파인애플 사업을 개척했던 한 젊은이의 파인애플 외길 인생은 여기서 끝이 난다.​

하지만 Pineapple = Dole이라는 인식이 강했기에

이름은 남겨드릴게~


이후 생산되는 주요 파인애플 제품에는 Dole이라는 이름이 계속 들어가게 된다.


한편 castle & cook 사의 자금 지원으로 여유가 생긴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는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구상할 필요가 있었는데


아직 냉장 기술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19세기 말 ~ 20세기 초에는 통조림이 유용했지만,​

약 100만 개가 팔려나간 모니터 탑 냉장고


이미 1920년대에도 가정용 냉장고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통조림 위주였던 파인애플 제조업에도 변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1928년 프레온 제조기술이 발명되면서 냉장 기술에 획기적 전기가 마련되었고, 경영진은 냉장 보관이 필요하며, 시원하게 먹으면 기분이 좋고, 운반 및 가공이 편리하여 누구나 먹기 쉬운 파인애플 가공품을 생각해낸 것이다.​


그것은 바로 파인애플 주스!!!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는 곧바로 파인애플 주스의 대량 양산에 착수했는데​


God bless you란 것이 사실이었는지 마침 1933년에 금주법이 공식적으로 폐지되면서 칵테일 제조용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파인애플 주스가 팔려나가게 되면서


말 그대로 대박을 친 것이다.


이러한 좋은 기회에 경영진은 더욱 박차를 가하기 위해 미국 전역에 라디오와 항공기를 동원한 대대적인 주스 광고를 선보였고, 1936년에 마침내 적자를 탈출하고 회사 경영을 정상적으로 돌려놓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50년대 미국은 엄청난 경제 호황을 누렸고 가파르게 상승하는 파인애플 제품의 매출량 속에서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는 안정적인 매출을 올려 마침내 1961년 Castle&Cook 사는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를 완전히 인수했다.


이후 Castle&Cooke 사는 필리핀에서 바나나 사업에도 뛰어들면서 1968년에 스탠더드 프루트 사와의  합병에 성공하며 델몬트와 쌍벽을 이루는 바나나 업계의 제왕이 되었고,​


1991년에 Dole Food Company로 이름을 바꿔
오늘날 우리가 대형마트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그 Dole 회사가 된다.


엄밀히 따지면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가 Dole로 이어졌다기보다는 더 큰 회사(Castle & Cooke)에 흡수당해서 지금에 이른 것이지만


하와이에서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 격변으로 총독이라는 직책이 생겨났고, 사촌 형이었던 총독의 후원 아래 뛰어난 사업 감각으로 파인애플 사업을 일궈내어


한때 하와이를 세계 파인애플 생산량 3/4를 책임지는 생산기지로 만들어냈던 한 사업가 덕분에 지금의 Dole 파인애플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하와이는 예전의 파인애플 생산기지로서의 명성은 무색해진지 오래되었고, Dole의 현지 통조림 공장도 수익 악화로 1991년에 문을 닫아버렸다.
(델몬트마저도 생산기지를 2008년 이전했다)


그렇지만 하와이 곳곳에 남아있는 파인애플 농장과 관광지들은 한때 화려했던 파인애플 생산지로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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