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사

명장들이 이끌어낸 역사적 전투

MeRCuRyNim 2023. 7. 1.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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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티움 해전

아우구스투스 - 악티움 해전

로마내전의 완전 종식을 알리는 전투로 제정 로마의 서막을 열었다.

당시 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아우구스투스와 그리고 베테랑 안토니우스 두 사람 최후의 전투였다.

이때 아우구스투스의 전력은 배 400척에 병사 19,000명 정도였고 안토니우스는 배 200척에 25,000명 정도였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군사력이 우세했던 안토니우스의 가장 큰 패배의 원인은 함께 참전했던 클레오파트라가 아우구스투스와의 전투에서 퇴각하는 것을 본 안토니우스가 전투에서 졌다는 생각에 자신도 퇴각해 버렸고, 졸지에 총사령관을 잃어버린 남은 병사들의 사기를 잃어버렸고 그것이 전투의 패배를 가져왔다.

명량해전


이순신 - 명량해전

충무공 이순신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인물이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나폴레옹 - 아우스터리츠 전투

나폴레옹의 최고 전성기를 보여준 전투로서 적들로 하여금 "저자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라는 좌절감을 느끼게 한 전투이다.

나폴레옹


때는 1805년 나폴레옹군 7만 5천과 대프랑스 동맹군 8만 5천(오스트리아국+러시아군)이 오스트리아의 아우스터리츠에서 정면으로 맞붙은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군의 사상자는 8000여 명에 부상자는 약 6000명이었고,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은 15,000명에 부상자만 27,000명이었다.

심지어 사실상 이 전투의 여파로 그다음 해에는 신성로마제국도 멸망시켜버린다.

팀브라 전투


키루스 대제 - 팀브라 전투

키루스 대제는 이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황제로 그 시기의 페르시아 제국은 최절정기를 맞이한다.

리디아를 확실하게 정복하기 위해 벌어졌던 팀브라 전투는 대규모 육지 전으로 중동 역사상 최대의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키루스 대제


당시 크세노폰의 기록에 따르면 키루스의 군대는 총 19만 명이었고 이 중 페르시아인은 약 7만 명 정도였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다민족의 제국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팀브라 전투에서 리디아는 키루스의 군대보다 약 2배는 더 많은 약 42만이었다.

그러나 키루스 대제는 이를 극복하여 14일간의 사르디스 공성전을 끝으로 리디아 정복에 성공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군사의 숫자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키루스의 군대는 크게 피해를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파르살루스 전투


카이사르 - 파르살루스 전투

폼페이우스와의 최후의 결전으로 이 전투는 테실리아의 평원에서 펼쳐졌으며 카이사르의 군대는  2만 3천 명 폼페이우스의 군대는 4만 5천이 넘는 숫자가 참전하여
카이사르군이 군사의 숫자에서 상당히 열세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카이사르군은  200~1200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폼페이우스군은 최소 6천여 명 이상이 전사했다.

쥴리어스 시져


그야말로 카이사르의 대승이었다

이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로마는 공화정에서 제정으로의 길로 걸어가게 된다.

야호령 전투


칭기즈칸 - 야호령 전투

야호령 전투는 당시 떠오르는 신흥제국 몽골의 대칸인 칭기즈칸의 엄청난 군사능력을 보여준 전투였다.

칭기즈칸은 약 10만의 몽골 기병으로 3.5배나 많은 금나라 주력군 35만 명을 궤멸시켰다.

당시 금나라는 건국 12년 만에 송나라 영토를 노략할 만큼 강했으며 총병력이 무려 약 90만~100만에 달했다.

그중 주력군이 약 70만 정도였으며, 야호령 전투에서 칭기즈칸의 군대에 의해 사상자가 절반이나 발생하게 된다.

징기스칸


다만 칭기즈칸도 이후 금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는데, 금나라의 금나라의 규모가 엄청나게 컸기 때문이다.

결국 칭기즈칸은 유언으로 남송과 힘을 합쳐 반드시 금나라를 멸하라고 하였고 실제로 금나라는 멸망하게 되었다.

살수대첩


을지문덕 - 살수대첩

한민족 최대의 단일 육지 전투로서 고구려군의 병력이나 사망자수는 고구려 사서 신집 5권이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을지문덕 장군


중국 측의 기록에 따르면 수나라군 30만 5천여 명이 고구려군의 거짓 항복에 속아 거의 전멸에 가까운 사상자가 나왔으며 이때 살아 돌아간 수나라병사가 고작 2700명 남짓이라 하니 당시 고구려군도 최소 수만의 병력을 동원했을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이 전투 이후 한민족계 그 어떤 나라에서도 이 정도 규모의 단일 육지전을 펼치지 못했다.

가우가멜라 전투


알렉산더 대왕 - 가우가멜라 전투

다리우스 3세의 페르시아 제국을 사실상 멸망시킨 전투로서 당시 알렉산더 대왕의 병력은 현대 사학계 추정 4만 7천여명 정도로 추측하고 있으며 다리우스 3세의 병력은 5만~12만 정도로 추측하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


일단 페르시아의 고대 사서엔 25만에서 100만 대군이라고 하는데 이는 과장되었다고 여긴다.

결과는 다리우스 3세의 대패로 병력이 궤멸의 수준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귀주대첩


강감찬 - 귀주대첩

당시 거란족은 발해를 멸망 시킨 막강한 기병을 바탕으로 한 동아시아 최강의 군대였다.

현대에는 포와 전차의 발달로 기병이 쇠퇴했지만 냉병기 때는 기병이 최강의 병기였으며 그들은 중무장하고도 45~50km의 속도로 말을 달렸다.

당시 거란은 그러한 기병을 약 10만 명이나 이끌고 고려를 정복하러 왔다.

강감찬


이에 강감찬은 거란 기병의 두 배인 20만 명의 보병을 출전시켰지만 아무리 병력이 2배라도 보병으로 기병 10만을 당해내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강감찬은 귀주대첩에서 대승을 거두게 된다.

그야말로 중세 한국사 최고의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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