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사

카르타고의 한니발(6) - 카푸아와 한니발의 동맹

MeRCuRyNim 2023. 1. 12.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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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나이 전투에서 대승한 이후로도 한니발은 계속 칸나이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붙잡은 포로들을 로마인, 동맹 도시 출신 시민 이렇게 두 분류로 나누었다.

그는 동맹 도시 출신 병사들은 별다른 요구조건 없이 위로의 말과 함께 풀어주는데 이것은 동맹 도시들의 환심을 사길 원했기 때문이며, 그들이 한니발은 성군이며 오직 로마에 대한 복수심으로 전쟁을 치르는 것이지, 자신들에게는 원한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로마 편에서 돌아서 자신의 편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포로들을 모두 양분한 뒤 로마인들을 끌고 왔는데 로마인들은 모두 '이제 죽었구나'생각했다.

그런데 로마인들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한니발은 그들에게 꽤 친절하게 대해주며 로마인들에게 몸값을 받으면 풀어주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로마인 포로들로 구성된 사절을 꾸리고, 자신의 장교를 동행하게 한 뒤 그들을 로마로 보냈다.

로마의 원로원은 한니발이 보낸 장교는 협박해 돌려보낸 뒤 로마인들만 맞아들였다.

여기서 원로원은 한니발이 제시한 몸값을 지불하고 이들을 데려올지 말지에 대해서 굉장히 열띤 토론을 벌였다.

토론에서 중대한 문제는 로마 역사에서 몇 번 몸값을 지불한 선례가 있었으므로, 이 선례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새로이 병사를 모집할 돈도 없는데 여기서 또 추가 지출을 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였다.

민중들은 포로의 많은 수가 자신의 지인들이었으므로 몸값을 지불하고 포로를 데려오라고 원로원을 압박했고, 원로원 의원 중 몇 명이 이를 비판하면서 민중들과 원로원 사이에 불온한 기운이 감돌았다.


원로원은 한니발이 몸값을 받으면 로마를 공격하는데 쓸 군자금으로 쓸 것이 뻔하고 몸값을 주면 로마의 돈으로 로마를 공격하라고 한니발을 도와주는 형태가 되는 것이라 생각해, 마침내 이어진 투표에서 원로원은 몸값 지불을 거부하기로 결정한다.




이 소식을 들은 사절로 온 로마 포로들은 절망해 몇 명은 목숨을 끊기도 하였고, 어떤 이는 자신의 집으로 몰래 숨어 들어갔는데 원로원은 그를 체포해 감시병을 붙여 한니발에게 압송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바로가 돌아왔는데 이때 많은 로마인들이 그를 마중 나온 뒤 그에게 로마를 위한 노고에 대해 감사해했다고 한다.

이런 시민들의 모습은 바로가 칸나이에서 저지른 행동을 보면 앞 뒤가 맞지 않기 때문에, 현대의 학자들은 파울루스가 패전의 원인이었지만 역사를 기록할 때 바로가 평민출신이라는 이유로 모든 책임을 바로에게 전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는 중이다.

단, 이를 기록한 로마인 역사가들은 "우리는 패배한 장군에게도 관대했다"라며 자화자찬했다.


이 시기에 로마의 동맹 도시들은 포로들을 조건 없이 석방한 한니발의 관용적인 태도와 칸나이 전투 이후 로마의 생명이 꺼져간다는 생각, 거기에 더해 평소 각 도시의 반 로마파 정치가들의 거세진 발언권에 의해 많은 남부 이탈리아의 도시들이 한니발과 동맹을 맺게 된다.


전열을 재정비한 한니발은 현재의 나폴리라는 도시를 공격했는데 그 이유는 카르타고의 원조를 받으려면 항구 도시가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니발은 누미디아 기병을 보내 적의 기병을 유인해 격파하긴 했지만 나폴리의 성벽이 높아서 점령이 어려웠다.

이때 카푸아라는 도시에서 한니발을 찾고 있다는 전령이 도착했고 그는 곧바로 카푸아로 이동했다.

카푸아는 이탈리아에서 로마 다음으로 큰 도시로서 로마에 견줄만한 인구를 자랑하는 대도시였는데, 카푸아의 시민들은 자신들이 왜 로마의 휘하에 있는 것이 항상 불만이었다.

그런 불만이 쌓여가던 중 로마가 칸나이에서 패배하자 이 불만은 친 로마 파였던 그들의 원로원으로 향했고, 카푸아 원로원은 몹시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때 파큐비우스 카라비우스라는 카푸아 원로원 의원이 불안에 떠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자신에게 모두를 구할 방법이 있다고 말한 뒤 원로원 의원들을 회의장에 감금해 두었다.

그 뒤 민중들을 불러 모아 내가 원로원 의원들을 가둬놨으니 이 기회에 그들을 심판하라고 말한 뒤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렀다.


이름이 불려질 때마다 민중들은 욕설을 퍼부으면서 그 의원은 죽어 마땅하다며 당장 처형하자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파큐비우스는 그렇다면 방금 호명된 의원을 처형하고 난 다음 대신할 새로운 원로원의 추천을 받겠다고 말했다.

여기서 민중들은 누굴 추천해야 할지 몰라 혼란에 빠졌고, 어떤 사람이 용기를 내어 누군가를 추천하면 민중들은 "그 사람은 원로원 의원이 될 자격이 한참 부족한데 무슨 근거로 추천을 하는 것이냐??!"라며 거부의 의사를 밝혔다.

결국 민중들은 한 명도 새로운 원로원 의원을 추천하지 못했고 그 결과 모든 원로원 의원들이 목숨을 구했다.

민중들은 해산하면서 "차라리 구관이 명관이야. 오늘 새로이 추천된 사람들은 의원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들뿐이었어"라며 서로 이야기했다.

이 일을 겪은 후 파큐리우스는 원로원의 대표가 되어버리고 간신히 살아남은 원로원 의원들도 친로마파에서 태도를 바꿔 반로마 파였던 민중과 영합하기로 하였다.

결국 카푸아는 로마에게서 돌아서서 한니발 편으로 붙는
분위기로 흘러갔지만 확실한 결정은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카푸아의 지도계층 중 로마의 지도계층과 혼인으로 얽힌 자들이 많은 데다 귀족자제로 구성된 300명의 기병들이 시칠리아에 파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카푸아인들은 어느 편에 설지 저울질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로마 독재관이 베누시아라는 도시에 내려가서 머물고 있었는데 그곳에 카푸아의 사절이 도착했다.

사절들은 로마 독재관에게 그들이 로마에 얼마의 병력을 제공해야 하냐고 물어보았고, 카푸아의 정세를 알지 못했던 로마의 독재관은 카푸아가 여전히 로마의 동맹 도시라고 생각했으므로 그들에게 로마의 위기가 곧 그들의 위기라고 말하며 카푸아의 전 병력인 3만 중보병과 4천 기병의 제공을 요구했다.


상당량의 병력 제공의 요구를 듣고 돌아가던 카푸아의 사절단들은 로마의 요구를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며 불만을 표출했고, 한니발과 연합하여 로마를 몰락시키면 이탈리아의 제2의 도시인 그들이 로마를 대신해 이탈리아 전체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얘기했다.

그 사절단들은 카푸아 원로원 의원들이었으므로 카푸아 원로원으로 돌아가 로마의 요구와 그에 따른 자신들의 의견을 얘기했다.

하지만 카푸아 원로원은 당장 로마와의 동맹을 끊어버리는 것은 불안했는지 로마에 사절을 파견하여 로마의 요구대로 병력 제공을 할 수도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카푸아인을 로마 집정관으로 임명해 준 다음 그 군대를 지휘하게 해 준다면 병력을 제공해 줄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발언을 들은 로마 원로원은 카푸아가 자신들과 대등한 위치에 서겠다는 의도로 받아들여 사절을 내쫓아버렸는데, 자신들이 몇 번의 전투에서 한니발에게 패배하자 카푸아가 로마를 만만히 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로마의 행태를 지켜본 카푸아 역시 로마의 태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기에 한니발에게 사절을 보내 협상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한니발과 동맹을 맺는 조건으로 그들의 완전한 자치, 300명의 로마인 포로와 시칠리아에 파견되어 있는 카푸아 귀족들의 자제로 이루어진 300 기병과 맞바꾸는 것을 요청했고 한니발은 이를 승낙했다.

이렇게 한니발과 카푸아의 동맹이 맺어진 뒤, 카푸아인들은 친로마 인사들에게 자결할 것을 강요했다.

이때 몇 명의 의원이 자결을 했는데, 자결을 요구받은 의원 중 원로원에서 명망 있었던 친로마파 인사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강경한 기세에 눌려 어찌하지 못하고 있던 중 한니발이 그 의원과 면담을 원한다며 자신의 숙영지로 올 것을 요청했다.

그 의원은 한니발에게는 카푸아인에게 명령할 권한이 없다며 가지 않고 버티자, 성난 카푸아인들이 그 의원을 체인에 묶어서 한니발에게 보내려고 했지만, 그런 모습을 원치 않았던 한니발은 자신이 직접 카푸아를 방문해 그 의원을 만나겠다고 했다.

카푸아 시민들은 한니발의 방문 예정에 그 유명한 장군이 어떠한 모습을 했는지 궁금해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도시의 온 가족이 나와서 한니발을 볼 수 있는 곳에 대기하였다.


한니발은 그를 보러 온 수많은 시민의 환호를 받으며 카푸아에 입성함과 동시에 카푸아 원로원의 소집을 요청했는데 카푸아 원로원은 한니발에게 하루는 쉬어달라며 애청하였다.

한니발은 그날 내내 도시를 구경하거나 연회를 벌이며 휴식을 가졌는데 이때 연회에서 한니발의 초대를 받은 귀족들 중 카푸아의 한 젊은이는 배짱 좋게 한니발을 암살하려고 칼을 숨기고 들어갔다가 그것을 눈치챈 청년의 아버지가 "네가 온 이탈리아가 두려워하는 한니발의 얼굴을 배짱 좋게 쳐다볼 수나 있겠느냐"라는 식의 설득을 듣고는 암살 계획을 단념했다고 한다.

한니발

다음날 한니발은 원로원 회의석에서 연설을 하였고 한니발에게 대항했던 친로마파 의원을 비난하며 그를 자신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그를 한니발에게 넘기기로 하였고 한니발은 원로원의 결정이 내려진 직후 그를 배에 태워 카르타고 본국으로 송환하였는데, 그를 죽이지 않은 이유는 카푸아 원로원들에게 자신이 독재자로 인식되길 원치 않아서였다.

한편 카푸아까지 한니발에게 넘어가자 절망한 로마 원로원은 델포이에 사신을 보내 신탁을 받으려 했다.

델포이 신전에서 로마가 이길 것이라는 신탁을 받았다는 사신의 말에 로마 원로원은 이를 듣고 매우 기뻐하여 그날을 축제일로 삼는다.


한편 카르타고에선 한니발의 동생 마고네가 카르타고 원로원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형의 업적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며 20만의 로마군이 죽고, 5만의 포로를 생포했으며 이탈리아 대부분을 점령했다고 말했다.

이 소식을 듣고 흥분한 카르타고 원로원에게 마고네는 자신이 한 말의 증거를 보여주겠다고 이야기한 뒤 로마인들 시체에서 수거한 금반지를 산더미처럼 쌓아 보여주었고, 그 뒤 즉각 추가 병력을 이탈리아에 파견해서 자신의 형을 도와야 한다며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카르타고를 양분하고 있었던 두 정치세력, 즉 한니발이 속한 바르카 가문과 한노 가문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바르카 가문의 수장인 하밀코는 한노에게 아직도 전쟁을 반대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한노는

"아직 전과가 충분치 않으니 알 수 없다.

로마에게 강화 사절단을 파견해 놓고 로마를 자극하지 않도록 군대 보내는 것은 보류하자"


라며 트집을 잡았다.

그러나 한노의 제안은 한니발의 업적을 듣고 흥분상태에 놓여 있던 카르타고 원로원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니발에게 4000 누미디안 기병, 40 코끼리, 500 탈렌트의 군자금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마고네를 스페인으로 보내 2만 보병, 4천 기병을 추가로 편성하도록 결정하였고, 거기에 더해 한니발에게 보낼 보병을 편성하는데 착수하였다.


이때 한니발은 이탈리아의 항구도시인 놀라를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놀라 역시 이전에 한니발이 공격한 바 있었던 나폴리와 같은 항구도시였는데 한니발은 로마 해군의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로마 휘하의 항구 도시들을 점령하고 싶어 했다.

마르켈루스

놀라 시민들 역시 카푸아처럼 한니발과 동맹을 맺고 싶어 했기에 놀라의 친 로마파 원로원은 즉시 로마의 법무관인 마르켈루스에게 사절을 보내 원군을 파병하지 않으면 한니발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다고 전하였다.

마르켈루스는 즉시 놀라로 군대와 함께 이동해 한니발과 대치하였다.

마르켈루스라는 인물은 한니발이 로마에 오기 전부터 이미 로마에서 명성을 떨치던 장군이었다.

법무관이라는 직책 때문에 집정관보다 젊은 사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법무관 직책을 맡게 된 것은 군단 지휘권을 가질 사람이 급하게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마르켈루스는 52세의 베테랑이었고, 법무관 이전에 이미 2번의 집정관을 역임한 사람이었으므로 일반적인 법무관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의 한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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