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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의 한니발(5) - 칸나이 전투

MeRCuRyNim 2023. 1. 9.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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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을 구상중인 로마 사령부


서로의 적과 마주한 양측 사령관들은 대책 없이 전투에 임하려 하지 않았고, 전투 벌어지기 전 어떻게 전술을 구사할 것인지 작전을 세밀하게 세워두었다.

작전을 구상중인 한니발


바로와 파울루스 그리고 원로원들이 모인 지휘부에서는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의 약점이 바로 중보병이라고 판단하였다.

한니발의 중보병은 로마군에 전력이 많이 부족하였다.

한니발의 중보병은
8천 아프리칸 보병 + 8천 이베리안 보병 +
1만 6천 갈리아 + 기타 용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위의 구성에서 1만 6천의 아프리칸과 이베리안 보병은 한니발이 직접 스페인에서 데리고 온 데다, 알프스를 넘는 등의 고난을 이겨낸 병사들이라 매우 뛰어난 전력이긴 하지만 나머지 1만 6천 갈리아 + 기타 용병은 로마군에 비해 전투력이 꽤 많이 떨어지는 군인들이었다.

한니발에게는 보병 전력 중 로마군과 맞설 수 있는 전력은 단 1만 6천이었고, 남은 1만 6천은 어떻게 유용할지가 고민이었다.

어디에 어떻게 배치해야 할 지 고민인 전력들


이에 반해 로마 측에서 동원한 보병 전력은 총 8만으로 8만의 중보병 vs 약한 1만 6천 + 강력한 1만 6천의 구도가 형성되어 보병의 대결에서 로마 측의 패배를
기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로마 군단병


로마 측 사령관들도 자신들의 이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중보병을 중앙에 배치하는 것이 전술의 추세였으므로 로마 측에서는 한니발이 중앙에 중보병을 배치할 것이라 생각하여, 바로와 파울루스 그리고 원로원 의원들은 보병과 보병이 맞붙는 중앙 싸움에 모든 것을 걸기로 결정했다.

로마 측에서는 한니발과 이전에 치렀던 전투들을 면밀히 분석하며 한니발 군이 실패했던 사례들도 연구했다.

여기서 그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전투는 샘프로니우스와 한니발의 전투였다.

샘프로니우스는 포위된 위급한 상황에서 소수의 전력으로 중앙을 돌파해 빠져나온 경험이 있었다.

이 전투에 대해 분석한 로마 지휘부는 "한니발 군은 중앙 돌파에 취약하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이번 전투는 처음부터 로마 중보병을 동원해 한니발 군의 중앙을 맹공격해서 뚫어버린다면 전열이 흐트러진 한니발 군은 무너져 내릴 것이라 판단했다.

문제는 한니발 군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던 로마군의 기병이었다.

한니발은 1만 기병, 그리고 로마군은 6천4백 기병이 있었고, 로마의 사령부는 한니발이 기병을 주 무기로 삼아 포위 전을 벌일 것이라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로마군은 기존의 편제상 한 군단에 300 기병, 8개 군단이면 2천4백의 기병이 배치되어야 하지만 이번에는 기존의 세 배 정도 되는 기병을 배치하여 기병 전력 강화에 신경을 많이 썼다.



기존보다 세 배의 수로 기병을 늘렸지만 기병전력이 한니발 군에 비해 부족했기에 로마 장군들은 이를 보완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전투의 장소가 강을 끼고 있었는데 강가와 로마보병 사이에 2천4백의 로마 기병을 위 배치도의 빨간 네모 친 부분처럼 배치하였다.

이런 식으로 배치해 두면 강과 로마 중보병에 의해 기병의 양익은 보호되고 따라서 기병들은 정면의 적만 상대하며 오랜 시간 동안 대적할 수 있었다.

기병이 무너지지 않고 오랫동안 대적하는 것이 중요했던 만큼 집정관인 파울루스가 직접 기병을 지휘했으며, 이는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효과도 있었다.


로마 보병의 좌익에는 집정관 바로의 지휘를 받는 4천 명의 동맹 도시의 기병을 배치해두었는데 이 정도의 기병과 배치라면 한니발 기병 전력과 대등한 승부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는 한니발이 평소처럼 기병을 50대 50으로 나눠 양익을 공격한다면 오른쪽은 강의 보호를 받으면서 2천4백대 5천의 공격을
오랫동안 버틸 수 있고, 왼쪽은 4천대 5천이니 대등한 승부가 될 것이란 예상으로부터 나온 생각이다.

로마 사령관들은 이렇게 작전을 계획하고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전투가 벌어지기 이전 시점으로 본다면 로마 사령관들의 전술은 한니발의 약점인 중앙을 정확히 노리고 있는 데다 자신들의 취약점을 최대한 보호하는 형태로 전술이 짜였으니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전략가 한니발의 전술이었다.

한니발은 로마군의 약점은 역시 기병이라고 판단했다.

적의 기병을 아군의 기병으로 격파해야 하는데 시간이 조금만이라도 지체되면 전투의 승패에 크게 영향을 끼칠 것이라 생각한 한니발은 어떻게 하면 적의 기병 전력을 최대한 신속하게 격파할 수 있을까를 연구했다.

앞서 말했듯 로마군의 우익에 배치된 기병이 있는 곳은 옆으로 강을 끼고 있어서 적과 맞서기에 유리한 지형이었고, 그곳에 로마군은 소수의 기병을 배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2천4백 명의 기병)

그런데 이런 로마의 계획을 한니발은 '강가는 소수의 기병으로도 우리의 군대와 맞서기에 유리한 곳이니 틀림없이 로마의 사령관들은 소수의 기병을 배치할 것이다' 라며 로마군의 계책을 정확히 꿰뚫어 버렸다.

한니발은 로마가 강가에 소수의 기병을 배치할 것이니 자신은 로마군의 기병을 압도하기 위해 기병을 모두 투입하겠다고 결심했다.


즉, 한니발에겐 3천5백의 경기병인 누미디아기병과 6천5백의 중기병이 있었는데 이 6천5백의 중기병을 모두 강가의 로마 기병이 배치될 곳에 투입하겠다는 것이다.
(위의 배치도에서 붉은색 한니발 진영의 좌측 파란색 네모 부분)


그리고 3천5백의 경기병으론 로마군의 좌익에 있는, 정예 중기병과 대치하도록 배치하였다.
(위 배치도에서 붉은색 한니발 진영의 파란색 네모 부분)

하지만 우익의 3천5백 경기병이 로마의 4천 중기병을 상대하면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할 테니 한니발은 경기병에게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되 투창만 던지며 근접전은 피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좌익의 6천5백의 중기병이 강가의 로마군을 격파하면 곧장 배후를 우회하여 누미디안 경기병이 상대하는 로마 정예 중기병의 배후를 공격하면 로마군의 중기병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예상했다.


이렇게 기병 전투의 전술을 결정한 뒤 한니발은 보병 전술을 구상했다.

한니발은 로마군이 중앙을 공격해 들어올 것이라 예상했고, 한니발 역시도 중앙을 돌파당하면 전투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최대한 중앙 돌파의 저항력을 키우려고 생각해낸 것이 바로 초승달 형태로 로마군을 향해 볼록 튀어나오게 중앙 군대를 전진 배치하는 것이었다.
(위 배치도의 붉은색 한니발 진영의 파란색 네모 부분)

중앙 군대의 전진 배치가 왜 돌파에 저항력이 있는 이유는 바로 중앙이 밀렸을 때 뒤로 물러날 공간이 훨씬 확보된다는 것이다.

즉 중앙을 밀리고 밀려 라인이 붕괴되면 로마군에게 돌파당해 버리지만, 중앙의 군사들이 뒤쪽으로 회피할 수 있는 공간이 많을수록 돌파당하는 시간은 늦춰지게 된다.

그리고 정중앙에 배치되어 로마군과 가장 먼저 부딪히게 될 곳의 병사는 한니발 자신의 1만 6천 보병 중 8천의 이베리안 보병을 많이 배치시켰다.

이 이베리안 보병은 자신과 함께 알프스를 넘는 등의 고된 행군도 견딘 정예부대라서 로마군의 맹공도 충분히 견딜 수 있는 군대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베리안 보병이라면 집중공격을 당해도 패주 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또한 한니발 자신이 직접 그 중앙 부분에서 지휘하기로 결정하였다.

최고 사령관이 직접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병사들의 사기는 높아질 것이고 따라서 패주를 막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중앙 배치의 구상을 끝낸 한니발은 전쟁사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획기적인 전술을 세우는데, 우선 아프리칸 중보병을 양익에 배치시킨다.
(위 배치도 붉은색 한니발 진영의 양쪽 파란색 네모 부분)

이 아프리칸 중보병들은 정중앙에 배치된 이베리안 중보병, 한니발과 함께 알프스를 넘어온 정예 부대였다.

이 아프리칸 보병들은 중앙의 모든 보병들이 뒤로 밀리더라도 그들 만큼은 자신들이 처음 배치된 위치를 끝까지 지켜야 한다.

로마군의 공격은 자연스럽게 저항이 약한 부분, 즉 중앙 쪽으로 공격이 집중될 것이고, 중앙은 잠점 뒤로 밀리지만 자신들의 위치를 지켜야 하는 양익의 보병들은 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로마군은 자연스럽게 한니발군의 전열에 깊숙이 들어간 상태에서 감싸지게 되는 것이다.

만약 전술이 성공하여 한니발군의 기병들이 로마 기병을 처리하면 곧바로 비어있는 중앙의 로마중보병의 후방을 공격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양측 사령관들이 전술을 계획한 다음 드디어 평원에서 맞붙게 되었다.

한니발은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에 또 한 가지 기지를 발휘하는데, 로마군이 도착할 전쟁터의 동쪽에 군대를 배치해놓고 기다린 것이다.

평원 전투의 시작은 아침이었고, 태양은 동쪽에서 위치하고 있었다.

한니발은 자신의 병력을 동쪽에 배치해 자신의 군대는 태양을 등지고, 로마군은 태양을 보면서 전투에 임하도록 전장의 전체적인 판을 짰는데, 태양 빛 때문에 눈이 부시면 전투력이 저하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전부터 로마군이 강가에서 물 긷는 것을 방해하여 갈증도 나게 만들었으며, 모래먼지가 자욱한 바람이 심하게 부는 때를 선택하여 시야가 가려진 병사들의 공포심을 유발하게 하였다.

이러한 공포심은 한니발 휘하의 산전수전 다 겪은 병사들보다는 갖 징집된 병사가 많은 로마군에 더 효력이 좋을 것이었다.

한니발은 이번 전투를 위해 기후와 태양의 위치, 전투 이전부터 사소하게 시비를 거는 듯 물 긷는 것을 방해해 갈증도 심하게 만들어 전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자신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만든 후 전투를 시작했다.


이 두 군대가 배치된 이후 서로 함성을 지르면서 우선 경보병들이 달려 나가 투창을 시작하였고, 그와 동시에 기병이 서로를 향해 돌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강가에 배치된 로마기병은 예상을 뛰어넘는 자신들의 3배에 달하는 기병의 공세에 고전해 버리고, 결국 로마군의 기병들은 버티지 못하고 바로 격퇴되어 버렸다.

로마 기병이 무너짐과 동시에 중앙에서 중보병의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때 로마 중보병은 전진하면서 여느 형태와는 다른, 자신들을 향해 뾰족하게 튀어나온 형태로 배치한 적군을 만났다.

이것을 본 로마군은 자연스럽게 정중앙에서 가장 먼저 맞닥뜨린 적을 공격하였고, 하니발의 작전대로 중앙의 부대가 점점 뒤로 빠지자 로마군은 이들을 쫒는 형태로 진격하였다.

로마군이 중앙 쪽으로 계속해서 진격하게 되자 한정된 공간에서 로마군은 점점 그들끼리 모아지는 형상이 되었고, 무기조차 제대로 휘두르기 힘든 상황까지 가게 되었다.

하지만 뒤쪽에서 밀려오는 같은 로마군에 의해 선두의 부대는 그대로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

전진해 오는 로마군을 한니발군 역시 결사적으로 저항했고, 로마군의 엄청난 무게감에 의해 한니발군은 뒤쪽으로 점점 밀려나는 모습을 보였다.


중앙의 한니발군이 계속 밀리자 로마군은 점점 한니발군을 움푹 패이는 형태로 만들었다.

하지만 한니발군 최강의 보병전력이라 불리는 아프리칸 중보병은 로마군의 공세에도 꿈쩍도 하지 않은 채 한니발의 명령대로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양 끝의 아프리칸 중보병이 위치를 지키고 있었고, 중앙의 한니발군이 뒤로 밀리다 보니 어느덧 로마군은 아래 배치도의 형태와 같은 삼면으로 포위된 형태가 되었다.


한니발은 이때 움직이지 않고 있던 아프리칸 중보병에게 전진하여 로마군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위치만 고수하던 이들은 무기를 가지고 앞으로 전진한 뒤 로마군의 양 측면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로마군은 다소 지쳐있었지만 아프리칸 보병은 체력을 비축한 상태인 데다, 이들의 막강한 전투력으로 인해 로마군은 갑자기 맹공격을 받으며 전사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도 로마군의 좌익에서는 누미디안 경기병과 로마 중기병이 싸우고 있었다.

로마 중기병은 누미디안 기병에게 여러 차례 돌진했지만 누미디안 기병은 조금씩 뒤로 빠지면서 투창을 던졌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때 강가에서 승리한 뒤 로마 중보병의 배후를 우회하여 도착한 한니발의 중기병이 후방에 나타나자 당황한 로마기병이 서둘러 말을 돌려 이들을 상대했고, 적이 등을 보인 때를 놓치지 않은 누미디안 기병들이 로마기병에게 접근해 투창을 던져서 죽였다.

이렇게 앞ㆍ뒤에서 협공당한 로마의 기병은 무너져 내려 달아나 버렸고, 기병을 처리한 한니발의 기병들은 별다른 방해 없이 중앙에서 싸우고 있던 로마 중보병의 배후로 돌아가게 된다.


기병들은 배후에 도착하고 나서도 한동안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면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때 로마군이 벌써 삼면의 공격을 받아 고전하고 있었고, 한니발의 아프리칸 중보병이 로마군을 밀어붙이는 광경이 눈에 들어오자 공격을 개시하였지.

이제는 중앙의 로마군이 완전히 감싸져 버린 형태가 되었다.


앞쪽에서는 퇴로가 막혀버리고, 뒤쪽에서는 기병들이 말을 타고 달리며 동료들을 죽이기 시작하니 로마군은 집단 패닉과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로마군 일부가 탈주를 감행했는데 카르타고 기병의 대장이었던 하스두르발은 누미디안 기병을 따로 뽑아 내보내 탈주병을 보이는 대로 죽이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이젠 전투가 아닌 살육이 돼버렸고 한니발의 아프리칸 보병은 칼은 맞대는 전투보다는 일방적인 살육으로 인해서 지친 상태가 되었을 정도였다.


전장에는 집정관 파울루스가 남아있었고, 그는 강가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기병들과 함께 아직도 근처에서 고전 중이었다.

전투 중에 파울루스는 투석병에 명중당해 말을 탈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부상을 입게 된 파울루스는 말에서 내리게 되었고 그를 호위하던 기병도 말에서 내렸다.

그 모습을 본 한니발의 병사가 한니발에게 "파울루스가 기병들에게 말에서 내려서 싸우라는 명령을 했다"라고 전달하자 한니발은 다음과 같은 농담을 던졌다고 한다.

"그는 그런 명령보단 차라리 그들의 팔다리를 결박해 나한테 항복하라는 명령을 하는 게 더 나을 텐데."

파울루스의 군대는 계속 공격을 받았는데 (아마도 이들을 공격한 한니발군의 기병은 일부 남겨진 전력이며, 주력은 이미 로마군의 배후를 공격 중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안 파울루스는 자신의 부하장교를 불러 자신의 말을 건네면서 즉시 로마로 가 원로원에게 패배는 확정적이니 적의 공격에 대비하라는 마지막 유언과 함께 명장으로서의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집정관 바로는 이미 50명의 기병과 함께 전장을 떠나 탈출한 상태였다.


로마군은 적이 사방에서 둘러싸인 상태로 계속 전사하고 있었다.

로마군은 앞의 서있던 병사가 죽으면 뒤에 있던 병사가 나와 다시 죽으며 쓰러져갔다.

동그랗게 포진해 사방에서 공격당하고 있던 로마군 전열의 크기는 계속 줄어들고 있었고, 이 살육 행위는 땅 위에 발을 딛고 있던 병사들이 모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전장에서 장교로 참여한 베테랑 원로원 의원들도 모두 전사하였는데 이들 파비우스와 함께 등장한 기병장관과 플라미니우스와 함께 집정관으로 등장했었던 제미누스도 전사해 버렸다.

칸나이 전투를 연구한 하버드대 박사 출신의 역사학자 카울리는 이 전황을 이야기하면서 1분에 6백 명의 로마군이 계속 죽었나 갔다고 설명했다.

그것은 완전무장을 갖춘 로마군이 일초가 흐를 때마다 10명씩 전사했다는 것과 같다.

이런 상황에서는 나오는 병사들의 고통스러운 비명과 시체 무덤은 병사들의 공포심을 극한으로 올려놓았고, 공포를 이기지 못한 로마군 중 어떤 이는 싸움을 포기하고 자신의 얼굴을 땅에 파묻어 버릴 정도로 공포에 질렸다고 한다.

이 전투는 로마군 모두가 전멸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전투가 종료되었을 때는 대략 5만이 넘는 로마군 전사자의 시체가 남게 되었고, 1만 명 정도가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종전 후 한니발의 전사자는 7-8천 정도였고 이들의 과반수는 주전력이 아닌 용병과 갈리아 인들이었다.

한니발은 압도적으로 다수인 로마군을 맞이해서 역사적으로 보기 드물 정도의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는 후대에 '칸나이 전투'라고 불리며, 매우 불리한 상황에서도 훌륭한 전술로써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하나의 걸작품으로 평가를 받는다.

이 전투는 로마인들조차도 사상 최악의 참사라고 불리면서 한니발을 경외하게 되었고, 치열했던 전투를 제2의 칸나이라며 빗대어 불렀으며, 로마 시대 이후로도 모든 학자들의 칭송을 받는 전투이다.

칸나이 전투가 오랜 세월 동안 학자들의 토론에 주제가 되는 이유는 한니발이 구상한 지휘 방식에 의해 보병과 기병을 유기적으로 활용하여 적을 사방으로 포위한 전투의 형태는 칸나이 전투 이전에는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니발의 이전 전투에서 기병을 활용해 로마군의 양익을 협공해서 승리하긴 했지만, 칸나이 전투의 것과는 다른 전술이었다.

전술의 차이점은 칸나이에서는 아프리칸 보병이 포위전술에 동원된 것이었다.

포위전술에서 보병의 유기적인 움직임이 승리에 기여하는 형태를 처음 보여준 것이고, 보병과 기병이 함께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움직임을 보여줬다는 것은 전술사에서의 하나의 혁신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전투 형태는 일렬횡대로 배치하여 맞부딪히는, 전투력이 막강한 쪽이 승리하는 식의 간단한 방식이었지만, 한니발에 의해서 최초로 전투력만으로 판가름되는 승부가 아닌, 기병과 보병의 배치와 유기적인 움직임에 의한 전술의 승리라는 새로운 승리공식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로마군의 전술 역시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식에 가까웠다.

로마의 지휘부는 자신들의 전술이라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30대 초반의 젊은 지략가 한니발이 이렇게 새로운 전투의 개념을 들고 나왔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칸나이 전투 이후 한니발은 자신의 병력을 쉬게 하였고, 숙영에 남겨진 로마군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남겨진 로마군들은 양쪽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서로에게 전령을 보내 자신의 숙영지로 오라며 다투는 촌극을 보였는데 그건 서로 숙영지를 먼저 떠나는 걸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 중 정신을 가다듬은 장교 한 명이 병사들을 인솔하여 다른 숙영지로 이동한 다음, 합류하여 근처의 동맹 도시로 퇴각하였다.

한니발에겐 마하발이라는 기병 장교가 칸나이 전투에서 우익의 누미디안 기병을 지휘했고, 하스두르발은 좌익의 중기병을 지휘했었다.

마하발은 한니발에게 즉시 로마 중심지를 공격할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한니발은 그의 요청을 거부했는데, 비록 평원인 칸나이에서는 승리했지만, 공성전을 하기엔 자신의 부대에 부족함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로마는 인구가 40 - 50만의 대도시이고, 공성을 위한 무기도 충분치 않았으며, 로마를 포위해도 동맹 도시가 후방에서 지원 공격할 수도 있었으므로 4-5만의 병력으로는 부족하다고 본 것인데, 이는 현재의 학계에서도 한니발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이 대세론이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한니발의 군대는 전리품을 챙기고 아군의 장사를 지내기 위해 전쟁터로 돌아갔는데 승리한 그들 조차도 공포에 떨 정도로 참혹한 광경이었다고 한다.

한니발군이 보았던 참혹한 광경보다 더한 패닉에 빠진 로마는 원로원 의회가 긴급히 소집되어 대책을 논의했다.


의회가 소집되었지만 전쟁의 베테랑이었던 의원들이 모두 전사해 버렸으니 이들도 당황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회의의 분위기는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고, 회의 내내 바깥에서 들려오는 여자들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나라 전체가 초상이난 분위기였다고 한다.

원로원은 일단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고, 의원들은 시민들을 달래기 위해 회의장을 흩어져 빠져나왔다.

이때 전투에서 도망친 집정관 바로가 전령을 보내 자신이 생존했음을 알리고 휘하에 1만 명의 잔여병이 있음을 알렸다.

그리고 그는 추가로 한니발이 칸나이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뒤이어 또 다른 급보가 도착했는데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 카르타고의 해군이 출몰하여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로마의 원로원은 분위기를 바꿀 희생양을 찾았는데 이는 바로 여사제들이었다.

로마에는 평생 처녀 지내며 신을 모시면서 살고 있는 여사제들이 있었다.

여사제 조각상


이들에게 신의 분노가 임박한 책임을 물어 한 명 생매장시키고 한 명을 자결하게 한 뒤, 한 명의 남자 사제를 채찍질하여 죽였다.

그 뒤 다시 인신공양을 하기로 결정하여 갈리아남녀와 그리스 남녀 넷을 생매장시킨 후 주니우스란 인물을 독재관으로 선출한 뒤 칸나이 전투에서 많은 수의 병사가 전사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노예까지 국세로 무장시켜 군대를 편성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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