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 양

이슬람의 '무함마드'

MeRCuRyNim 2023. 4. 21.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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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그는 전쟁광, 정복자이지만
이슬람인들에게 그는 예언자, 선지자라고 한다.

영국 통계청의 발표 자료에 따르면 영국의 가장 흔한 아기 이름이 '무함마드'라고 한다.

위의 조사 결과를 참고하면 영국에서 늘어나는 이슬람인의 수가 체감이 될 것이고, 자기 자녀에게 무함마드라는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무함마드를 신성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무함마드를 숭배하더라도 그를 동상으로 만들거나, 영화로 각색하는 행위는 금지하고 있는데, 이슬람의 교리인 '코란'에서 우상숭배를 금지하기 때문이다.

'무함마드'의 탄생

무함마드는 A.D 570년, 중동 지역의 '메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했고, 어머니도 그가 6살 때 사망했지.

그러다 조부에게 맡겨져 양육되다 2년 뒤 조부도 사망하는 등 무함마드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급사하여 그의 유년기는 매우 불운하고 암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무함마드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전해지며,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역사적 기록도 거의 전무한 상태이기 때문에 유년기, 청년기를 자세히 파악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고된 유년기

무함마드가 태어난 환경에서는 '가족'이나 '부족'이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 부모를 모두 잃은 무함마드의 유년기는 상당히 고통스러웠을 것이라 추측되는데
특히 사막이라는 지리적 환경과 당시의 거친 풍습이 무함마드를 더욱 힘들게 했을 것이다.

그는 삼촌과 함께 생활하며 갖은 노동을 하며 쉬지 않고 일했지만, 가난을 벗어날 순 없었어.

이렇게 노동으로 점철된 어린 시절이었지만, 무함마드는 지속적으로 영성에 관심이 있었고, 이 세상은 무엇이고, 나는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또한 당시 그가 살던 '메카'에는 종교 간 다툼, 우상 숭배, 다신교 등이 성행했는데 무함마드는 이러한 행위들을 상당히 증오했다고 한다.

첫 번째 아내

무함마드는 삼촌 밑에서 무역 노동자로 열심히 일하던 중, 25살 무렵에 15살 연상이자 그의 첫 번째 아내인 '카디자'라는 여성과 결혼을 한다.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던 그녀와의 결혼으로 무함마드는 가난에서 벗어나게 되었는데, 그녀는 무함마드를 최선을 다해 내조하였고 '이슬람 첫 신자'가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법령으로 한 남성이 네 명의 아내와 함께 할 수 있었지만, 무함마드는 약 15년 가까이 카디자만을 바라보며 사랑했다고 한다.

검소하고 신실한 성격

청년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신실한 사람으로 정평이나 있었다.

그는 '알-아민'(믿을 수 있는 자)라는 별명이 생겼을 만큼 주변인들에게 성실했고, 검소했으며, 영성적이었다.

사람들은 다툼이 생기면 그를 찾아가서 중재를 요청할 정도로 그를 신뢰하였다.

그는 유대교, 기독교에 대해서도 탐구하면서 진정한
'진리'를 찾기 위해 기도하며 노력했다고 한다.

첫 계시

결혼을 통해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그는 본격적으로 영성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동굴에서 명상을 하거나 각 세계에서 벌어지는 종교 간의 불화에 대해 깊이 고민했는데, 가끔 영적인 현상을 보았으며 미묘한 목소리도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15년을 명상에 정진했더니, 천사 '가브리엘'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무함마드는 천사의 계시를 받고 너무 놀라 오히려 당황했다고 한다.

계시를 받은 이후 무함마드는 자신이 생각한 적도 없는 문장의 구절이 떠오르고, 문맹이었음에도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생겨 당시 가장 뛰어난 시인들도 쓰기 어려운 글을 술술 써내려 가며 주변 사람들에게 신 '알라'를 전파했다.

신의 말씀 '쿠란' 저술

그 시기에 '신의 말씀'이라 불리는 이슬람교의 경전 '쿠란'도 함께 쓰였다.

쿠란의 놀라운 점은, 책에 적힌 모든 글자가 시의 운율을
지키고 있으며, 이슬람에 비판적인 학자들조차도 '운율만큼은 아름답다'라고 평가한다.

당시 무함마드가 문맹이었음을 생각하면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첫 번째 아내의 죽음

무함마드는 자신의 아내부터 시작해서, 가까운 지인들에게 포교 활동을 했다.

그는 배우지도 못한 사람, 문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사의 계시 이후 달변가가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메카에서의 설교 활동 자신의 생각처럼 순탄치 않았고, 첫 번째 아내인 '카디자'가 세상을 떠나, 무함마드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고 한다.

그리고 깊은 슬픔에서 벗어난 그는 포기하지 않고 무슬림 공동체를 더욱 강하게 만들겠다는 다짐을 한다.

무함마드는 친구의 허락하에 그의 딸인 '아이샤'와 결혼을 했는데 그때 무함마드 나이 50살, 그의 두 번째 아내 아이샤는 6살이었다.

이후에도 그는 수많은 여성을 아내로 두었는데, 그가 가장 사랑했던 아내는 아이샤였다고 한다.

메디나로 이주

메카에서의 선교활동 중 갖은 멸시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생명의 위협까지 받게 되자, 무함마드는 그들을 이끌고 메카를 떠나게 된다.

메카에서 가까운 지역이었던 '메디나'로 이주한 그들은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다시 시작했는데 농업지역인 메디나는 메카에 비해 설교가 훨씬 수월하였다.

그리고 막대한 자산이 있었던 무함마드는 재력을 함께 동반하여 그곳에서 권력자의 위치에까지 오르게 된다.

참고로 이 메디나로 이주한 것을 이슬람에서는 '히즈라'(이주)라고 하는데, 무함마드가 이주한 해를 이슬람력의 기원으로 삼고 있으니 이슬람 교인들에게는 의미가 클 것이다.

메디나에서 '선지자'의 권위를 확보한 그는 아라비아 부족의 통일을 꿈꾸었고, '유일신만을 섬기는 세계'를 만들기로 다짐을 한다.

그의 첫 번째 목표는 자신이 도망쳐온 '메카'였다.


"문을 열어줘. 공격하지 않을게."

무함마드는 자신의 세력이 약할 때는 '평화적'이었지만, 자신의 세력이 커지자 폭력 및 강압적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자신을 반대했던 '메카'도 무력을 이용해 개종시키려 했다.

그는 메카를 향해 세 차례나 전쟁을 일으켰고, 메카는 지속적으로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나 무함마드도 확실한 점령은 어려웠고, 결국 둘은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이 끔찍한 전쟁이 끝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AD 630년, 무함마드는 '카바 신전 제사'를 이유로 메카 성문을 열어달라 요구한다.

평화 협정을 맺었으니 약속대로 폭력을 쓰지 않을 것이며, 무함마드와 그가 이끄는 메디나 사람들도 무기를 들고 입성하지 않을 것이라 약속했다.

전쟁 때문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한창 복구작업 중이던  메카는 계속 전쟁을 이어갈 수도 없는 상태였고
이를 계기로 무함마드와 '평화를 지속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판단에, 성문을 열어주게 된다.

이렇게 무함마드와 메람 1만 명이 메카 안으로 무혈입성하게 된다.

"알라 후 아크바르!"(신은 가장 위대하시다)

메카에 입성하자 무함마드와 추종자들은 조약을 깨고 돌변해 버린다.

그는 메카에 존재하는 모든 우상숭배와 다신교의 상징들을 부수며 '알라'를 외쳤다.

무함마드에게 대적하면 죽음뿐이었기에 메카의 사람들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무함마드는 자신의 고향이었던 메카를 이슬람화 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일화로 인해 그는 '선지자'라기보다 '정복자'라 불리기도 하는데, 많은 종교학자들은 현대의 이슬람 전략이 무함마드의 전략과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숫자와 영향력이 적을 때는 온건적이며 눈치를 보지만, 세가 늘어나면 대단히 폭력적이고 과격한 성격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어느 시대, 어느 세력에서나 공통적인 것 같다)

정복자의 삶

메카를 점령한 후 이슬람을 포교하려면 국력이 강해야 한다고 생각한 무함마드는 무력 및 정복 전쟁을 지속하며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런 면모로 '전쟁광, '살인광' 등으로 비판받지만, 이슬람 사람들은 무함마드를 위대한 선지자로 생각하고 있다.

통치자임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의 법전'인 이슬람 기본 5개 조를 지키기 위해 본인 스스로가 검소한 모범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금식, 신앙고백, 기도, 자선, 순례를 철저히 지키면서 매 순간 '알라'를 찾았고, '알라'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죽음

아라비아 반도를 이슬람으로 통일시킨지 얼마 안 된 AD 632년.

그의 병세는 갑작스럽게 악화되었고, 결국에는 거동조차 힘들어했고, 결국 '알라여, 내 싸움에 함께하소서'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채 숨을 거두게 된다.

당대 최고 권력자임에도 불구하고, 죽는 순간까지 검소하게 살았으며 본인의 유언에 의해 장례식도 간소하고 소박하게 치른 뒤 '메디나'에 묻혔다고 한다.

잔인한 정복자 vs 선지자

지금도 무함마드의 삶에 대한 다양한 평가는 계속되고 있다.

이슬람에서는 신과 같은 존재이지만, 타 문화권에서는 비판이 상당하다.

실제로 그의 성격은 상당히 복합적이었고, 과격했으며 이중성을 띠고 있었다고 하며, 타고난 카리스마와 지도력과 언변도 상당했다고 한다.

그는 다정했지만, 이슬람이 아닌 이들에게 매우 잔인했는데 적이 항복을 선언했다고 해도 '이슬람을 믿지 않는 이들'이라는 이유로 살해했으며, 포로 여성을 억지로 자신의 아내로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여러 평가 속에서도 이슬람권에서는 무함마드를 신성시 여기며 그를 비판하는 행위는 상당히 좋지 않은 행동이다.

이어지는 '정복 정신'

무함마드가 사망한 후, 후계자인 '칼리파'가 선출되었고
그는 무함마드의 '정복 정신'을 이어받아 시리아, 이라크, 이란, 이집트를 정복했으며,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의 대서양까지, 동쪽은 중앙아시아와 인도 북서부까지 점령해 나갔다.

힘과 무력을 동원한 포교 활동에 의해, 이슬람의 기세는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현대에는 중동 지역 대다수가 이슬람이라 봐도 무방하며 이제는 이슬람인들이 유럽으로 이주해 '비교적 온건한 포교 활동'을 하고 있으나,
몇몇 학자들은 유럽의 이슬람 인구가 늘어나면 그들의 '평화적 포교'는 끝나고 과격한 모습으로 변모할 것이라며 경계심을 내포하는 의견을 주장하고 있다.

과격한 이슬람

흔히 떠올리는 ISIS가 과격한 이슬람의 모습일 것이다.

온건파 이슬람은 이들을 싫어하고, 'ISIS는 이슬람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ISIS는 이슬람을 종교로 믿고, '알라'를 유일신으로 섬기며, '무함마드'라는 선지자를 통해 그의 정신을 이어받고, '쿠란'만을 진리로 여기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명칭이 '이슬람 국가'라는 점에서 ISIS를 '이슬람이 아니다'라고 정의하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중동에서 유럽으로

무함마드로 시작한 이슬람은 최근 통계에 의하면 17억 명 이상이 되었다.

어떤 종교학자들은 '미래에는 이슬람을 막을 방법이 없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슬람은 출산율이 높은 출산율을 자랑하며 대다수가 어리거나 젊고, 이슬람 외에 다른 종교는 절대 수용하지 않는 극단성을 띄기 때문이다.

무함마드의 꿈

중동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한 남자의 꿈은
메디나와 메카를 정복한 뒤, 아라비아 반도까지 통일시켜 버렸다.

이제는 또 다른 방식으로 유럽에서 그들의 세력을 펼치고 있으며 다음 차례로 아시아와 남미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전 세계가 '알라'를 섬기게 하겠다는 무함마드의 꿈은 결코 불가능한 믿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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