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사

카르타고의 한니발 - 알프스 행군

MeRCuRyNim 2022. 12. 28.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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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원로원에 대한 카르타고 원로원의 행태를 알게 된 로마는 카로타고에 선전포고를 하였는데 그때까지 로마의 전쟁 전적을 본다면 보통의 일이 아니었다.

6세기 : 2개 전투 - 1승 1패

5세기 : 10개 전투 - 9승 1패

4세기 : 10개 전투 - 9승 1패

3세기 : 24개 전투 - 18승 6패

총전적 : 37승 9패 (승률 80%)

덧붙여 패배한 전투마저도 소소한 전투에서의 패배였다.

이처럼 로마 군대가 전장에서 승전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의 예를 몇 가지 들자면 다음과 같다.


실력 있는 지휘관

고대 전쟁에선 지휘관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는데, 로마는 지휘관의 자질이 모두 우수했다.

로마의 지휘관이 우수한 이유는 로마내부에서 지휘관이 되기 위한 자격의 경쟁이 매우 치열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는 젊은이들이 출세를 하려면 선거를 통해 공직에 선출되어야 했다.

공직의 첫 번째 관문은 바로 대대장을 뽑는 선거에 당선되어야 하는 것이었으며, 선거에 당선되는 로마시민은 해마다 20명 정도였기 때문에 모두 유능하기로 소문난 젊은이들 뿐이었다.

그 이후의 공직 선거의 경우 대대장 역임 - 재무관 - 호민관(평민) - 안찰관 - 법무관 - 집정관의 순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이 선거에서 선출되는 인물들은 대부분 전장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들이었다.

그 이유는 선거에 출마하는 인물들이 모두 군인 출신이었고, 어떤 인물이 공적을 세웠으며, 유능한 장교였는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위직 선거로 올라갈수록 장교들 중에서도 정말 우수한 인물들로만 추려지고 집정관쯤 되면 그 누구도 반박이 어려운 훌륭한 장교가 선출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제도 덕분에 집정관은 기본적인 지휘능력조차도 아주 우수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로마 군단병(Roman legion)


보조병의 존재

보조병(auxilia)

보조병 제도는 로마가 창안했고, 로마만이 가지고 있었던 특징이었는데, 로마는 정복한 도시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지 않고 전쟁 시 보조병의 차출을 요청했다.

그래서 로마가 전쟁에 임했을 때 병사를 로마에서 징집하고, 같은 숫자를 동맹으로부터 징집했다.

그리고 로마시민병을 로마 군단병이라고 부르고 동맹의 병사들을 보조병이라고 불렀다.

이 제도가 중요하게 여겨진 이유는 보조병의 존재로 인해 로마는 전쟁 시에 항상 대군을 편성하는 것이 가능했다.

즉, 로마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닌 절반의 병력이 동맹으로부터 지원되니 그만큼 로마 본국의 병력의 낭비와 희생이 절감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전쟁에 특화된 로마가 카르타고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로마는 곧바로 카르타고에 공격을 감행하지는 못했는데 그 이유는 북이탈리아의 문제 때문이었다.


위의 지도에서 빨간 동그라미 친 지역을 로마가 정복 중이었고, 기존에 이곳에 살고 있던 갈리아족과 로마는 해마다 사생결단의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래서 막상 한니발에게 선전포고를 먼저 했지만,
저 지역에 두 명의 집정관과 그들의 군대가 모두 묶여있었기 때문에 군사행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니발이 20대의 젊은 장수였고, 상대적으로 로마에 비해 카르타고의 군사력이 약하니, 당장은 군대를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로마에서 20대면 가장 말단인 장교 정도의 직책밖에 얻지 못하였고, 총사령관의 지휘를 가진 집정관은 최소 40대 이상에 50대 정도인 경험 풍부한
베테랑들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니발이 갑자기 뜻밖의 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한다.

이베리안 보병

아프리칸 보병

누미디안 기병

코끼리 부대


위의 네 가지 병과로 구성된 9만의 병력을 이끌고 북상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 진군 루트는 위 지도의 검은 선과 같다.

한니발이 병사들에게 처음엔 이탈리아로 가는 것을 비밀로 했는지, 행군에 지친 병사들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자, 그들을 귀국시켜 버렸고 또한 행군 중에 사망하거나 탈영하는 병력과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병력이 9만에서 5만 정도로 줄어버린 것이다.

행군로도 험난했는데 그 이유는 한니발이 진군하면서 거쳐가는 영토는 엄연히 주인이 있는 땅이었다.

게다가 한니발의 목적이 로마를 침공하는 것인지 아니면 갈리아가 그 대상인지가 극비였기 때문에 갈리아인들의 저항이 대단했다.

이 중에서 가장 큰 사건은 한니발이 강을 건너려고 하자 갈리아 인들이 강 건너편을 점거하고 도하를 막으려고 했다.

그런 모습을 본 한니발은 기병들을 강 상류로 보내어 강을 건너게 한 뒤 갈리아인의 마을을 불태워버렸다.

당황한 갈리아인들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 강에서 떠났고, 그 기회를 틈타 한니발은 강을 건넜다.

한니발이 갈리아로 진입한 사실을 로마에서도 이미
첩보를 통해 파악하고 있었지만, 한니발의 병력규모라던지 그의 의도를 정확하게는 판단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로마는 한니발이 갈리아인과 동맹을 맺은 뒤 이탈리아 북부를 교란시키고, 혼란을 틈타 카르타고 본국이 시칠리아로 침공할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 가설에 기초하여 로마인들이 세운 전략은 다음과 같았다.


저 붉은색 동그라미 친 두 곳에 집정관을 한 명씩 보내서 지키게 한 것이다.

즉 로마는 한니발이 단독으로 싸우겠다고 덤비리라고는 상상 조차 하지 않았고, 카르타고 본국이 한니발을 이용해 북쪽을 교란케 하고, 시칠리아를 재점령하려는 것이 진정한 의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정관들을 북쪽과 시칠리아 섬으로 각각 보내고 양쪽을 수비하게 한 것이다.

로마가 한니발의 군대에 대한 대처방안이 집정관 한 명의 병력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위 지도의 지형도를 보면 알겠지만 알프스라는 거대한 장벽이 있기 때문에 알프스와 바다가 접하는 저 해안가 지역만 군대로 막고 있으면 한니발도 어쩌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게다가 저 지역은 마르세유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그 도시를 점령해야만 행군이 보장되었다.

그래서 마르세유를 한니발이 공격할 경우 성벽과 집정관이 이끄는 대군이 안팎에서 호응하기 때문에 한니발이 이곳을 돌파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이렇게 대책을 세운 후 로마인들은 안도감에 젖어있었는데, 여기서 한니발이 그 시대의 사람들이 상상하기 힘든 행동을 감행한다.


바로 알프스를 넘는 것이었다.

알프스 산맥을 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예를 들면 한니발의 동생도 나중에 알프스를 넘었고, 나폴레옹도 알프스를 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니발과 이들의 결정적인 차이는 한니발은 최초로 시도한 사람이며,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갈 때는 계절이 겨울이었다.

즉 한니발 이후의 두 사람은 여름에 넘었기 때문에 알프스라고 해도 그렇게 춥고 험하지 않았지만, 한니발이 넘은 시점은 이미 겨울이라 모든 것이 얼어붙어 있을 때였다.

겨울에 알프스를 넘는 것은 로마인들조차도 미친 짓이라 했는데 한니발은 이것을 감행했고, 이로 인해 군대의 절반이 줄어들어 버린다.

근데 한니발이 이렇게 한 것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그것은 바로 이탈리아에서 로마와 싸운다는 것이었다.

한니발의 부대는 이탈리아로 진입하는 순간부터 본국의 모든 보급이 끊긴 상태에서 자신의 부대만으로 로마와 상대해야 했다.

즉 한 부대 VS 한 국가의 싸움이었다.

이 싸움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냐면 한니발의 많지도 않았던 병력이 알프스를 넘는 과정에서 많은 수가 사망해 2만의 보병, 6천의 기병 정도가 남아 있었다.

아무리 한니발 군이 정예라 하더라도 이 병력으로 인구 50만이 넘는 로마와 로마가 거느린 수없이 많은 도시에서 공습해 오는 전력을 감당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런데도 한니발이 믿는 것은 하나였다.

위에서 설명한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서 갈리아인들이 로마와 해마다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고, 갈리아인들이 한니발을 도와서 물자와 병력을 제공해주길 기대한 것이었다.

즉 로마를 상대로 공동으로 대항하길 바란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세운 전략을 바탕으로 한니발은 북이탈리아에 진입했다, 휘하의 3만 병력과 함께.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마르세유에 있던 로마 집정관 스키피오도 얼른 철수해서 한니발을 상대하러 군대를 이끌고 왔다.

이 사람은 이 전쟁에서 군대 경험을 쌓게 해 주겠다고 자신의 아들도 기병으로 참전시켰는데 그 아들은 후에 굉장히 유명한 인물로 성장한다.


티키누스(Ticinus) 전투

티키누스라는 지역에 스키피오가 이끄는 3개의 군단으로 이루어진 로마군이 도착했다.

이곳에서 한니발과 스키피오는 각각 기병을 이끌고 지역을 정찰하는데 서로 만나게 된다.

이때 한니발의 기병은 6천, 스키피오의 기병은 3천 정도였다.


이곳에서 두 군대는 기병전을 벌인다.

이건 한니발이 최초로 지휘한 야전이었는데 여기서 한니발이 즐겨 쓴 전투의 형태가 나온다.

즉 중기병을 중앙에 배치하고 경기병인 누미디안 기병을 양익에 배치한 뒤 전투가 개시되자마자 넓게 펴져 로마 기병을 사방에서 포위하는 것.

이곳에서 로마군은 학살당하고, 집정관인 스키피오는 지휘 도중에 부상을 당했다.

이것을 본 스키피오(당시 18세)의 아들이 아버지를 포위하고 있는 기병을 향해 단신으로 돌격한 뒤 포위망을 뚫고 아버지를 구해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스키피오는 이때 입은 부상이 너무 심했고, 그래서 한동안 로마 캠프에서 머물면서 치료하는데 전념하게 된다.

로마군이 묶이게 되자 한니발은 재빠르게 주변 갈리아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동맹을 맺고, 동맹에 거부하는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북이탈리아의 지역이 하나씩 한니발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게 된 로마의 원로원은 가만히 있지 만은 않았다.

시칠리아에 머물던 집정관 샘프로니우스 롱구스에게 당장 북쪽으로 이동해 스키피오를 지원하라고 하였다.

샘프로니우스는 자신이 지휘하던 군대를 해산한 다음 이탈리아 북쪽에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린 뒤 북상하기 시작했고, 한 달 정도만에 북쪽에 도착해, 샘프로니우스 명령대로 집결한 군대를 재정비 후 다시 북상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샘프로니우스는 1만 8천 로마 군단병, 2만의 동맹 군단, 4천 기병, 총 4만 2천 병력을 거느렸는데 이는 한니발이 이끄는 3만 병력을 웃도는 숫자였다.

이때 원로원은 샘프로니우스에게 직접 전투에 가담하지 말고, 스키피오를 돕기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샘프로니우스는 원로원의 명령대로 군대를 배치하고 조용히 대기 중이었다.

이런 모습을 본 한니발은 자신의 병력을 보내 주변 도시를 약탈하게 하였고, 샘프로니우스는 이 도시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내보냈지만, 한니발 군은 로마군이 등장하자마자 혼비백산하며 달아나버렸다.

이것이 한니발의 전략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샘프로니우스는 스키피오를 지원만 하라는 명령을 까맣게 잊고, 자신이 직접 한니발을 무찌르겠다는 결단을 내린다.

하지만 모든 걸 혼자 시행하기에는 부담스러웠는지 스키피오를 방문해서 이 문제를 상담하기로 하였다.


이 두 집정관끼리의 만남에서 스키피오는 전투를 당장 벌이는 것을 일단 반대하였다.

그 이유가 한니발과 전투에서 뼈아픈 패배를 맛본 후의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샘프로니우스가 한니발의 적수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지는 정확하게 나와있지 않다.

그런데 샘프로니우스는 스피키오의 반대하는 의사에 매우 화가 났는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길길이 날뛰었다.

"아니 도대체 뭣 때문에 시간을 질질 끌어야 한단 말이요?

당신은 지금 세 번째 집정관이 도착하길 기대하는 거요? (로마엔 두 명의 집정관만 있을 뿐이므로 이것은 비아냥임)

지금 로마인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내쫒김을 당하고 있지 않소?

당신이 원하는 것은 캠프에서 겁먹고 숨어있겠다는 말이군."


이런 발언을 하면서 격렬하게 스피키오를 비판한 다음 샘프로니우스는 스키피오와 헤어져 당장 전투를 벌일 준비를 했다.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한니발은 샘프로니우스가 전투를 서두른다는 것을 알고 엄청난 도발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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