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사

카르타고의 한니발(3) - 트레비아 전투, 트라시메누스 호수의 전투

MeRCuRyNim 2022. 12. 30.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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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정관 샘프로니우스는 전투를 하고자 하는 의지가 매우 강했다.

그리고 이것을 파악한 한니발 역시 서둘러 전투를 하려고 마음먹었다.

사실 전투를 서두를수록 한니발에게 유리했던 것은 갈리아인들이 한니발 군대를 지원하고는 있지만 한니발 군이 로마를 상대로 얼마나 잘 싸워줄지는 미지수였다.

한니발이 로마와의 전투에서 패해버리면 지금까지 식량과 자원만 낭비한 것이고, 한니발의 능력이 로마와 대적할 정도의 우수한 장군이면 로마와 대적하고 있는 그들에겐 천군만마인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니발은 이들 갈리아인들에게 전투의 성과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속히 전투를 벌이고 싶어 하였다.

그리고 샘프로니우스도 전쟁을 하고 싶어 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한니발에게 승리한다면 자신은 로마군의 영웅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집정관 임기도 끝나가고 있었으므로 지금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병력도 한니발의 병력을 웃돌았고, 전투능력으로는 최고라고 일컬어지는 로마군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니발과 1대 1로 대결하면 자신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장군은 각자의 입장에서 신속한 전투를 원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두 장군은 트레비아강을 사이에 두고 병력을 배치 후 숙영지를 지어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트레비아 강의 모습


사진에서 보이듯이 강은 그렇게 깊지 않고 어느 정도 흐름이 있는 강이었는데, 양 군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강을 건너서 공격할 수 있는 상태였다.

고대 전투를 보면 대부분의 전투지에 강이 나오는데 그 이유는 몇만에 이르는 병사들의 식수를 해결하려면 강가에 진을 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며칠 동안 한니발 군과 로마군은 사이좋게(??) 강물을 식수로 사용하며 대치중이었는데 드디어 한니발은 집정관 샘프로니우스를 도발하기로 결심을 했다.

한니발의 계획은 아침 일찍 누미디아 기병을 보내 강 건너 로마군의 숙영지를 공격한 다음 퇴각하는 것이었다.

만약 이에 반응한 로마군이 누미디아 기병을 쫓아오면 전투가 벌어질 것이고, 전투가 벌어진다고 해도 승리를 확신할 수가 없었던 한니발은 또 한 가지 묘책을 세운다.

한니발이 데려온 친동생 마고네에게 전투지 옆에 있던 작은 숲에 2천 명의 병사와 함께 숨어있게 한 것이다.

2천의 병사들은 어느 정도 전투가 치열해졌을 때 로마군의 후방으로 뛰어들어 배후를 공격하는 책략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전투가 아침 일찍 벌어질 것을 대비해서 병사들을 일찍 취침시켜 피로를 충분히 풀게 하였고, 또한 계절이 겨울이었기 때문에 전투를 대비해 일찍 일어나 모닥불로 몸을 녹여두고 몸에 기름을 발라두라고 명령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계획대로 누미디아 기병은 로마군의 숙영지에 투창과 돌멩이를 마구 던졌다.

로마군들의 시각에서 보았을 광경


전투에 숙련된 로마군은 이들의 기습에도 대비가 잘 되어 있었고 금방 반격에 나섰다.

로마군이 반격하자 누미디아 기병은 퇴각을 개시하였고 샘프로니우스는 전군을 동원해 추격에 나섰다.

이것은 한니발이 계획한 대로의 전개였다.

누미디아군이 강을 건너 달아나자 로마군도 이들을 추격해 강을 건넜다.

그런데 막상 겨울의 차가운 강을 건너자 병사들의 체온이 급격히 떨어졌고 병사들은 추위에 벌벌 떨었다.

이때 한니발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진영에서 나와 이들 앞에 등장하게 된다.


한니발 군과 만나게 된 로마군은 재빠르게 그들의 자랑인 체크무늬식의 레기온 포진을 펼쳤다.

이때 로마군은 체온저하와 공복의 상태에서 전투력이 저하되어 있었는데 이 또한 한니발이 계회한 대로였다.

전투가 임박한 양 군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맞서게 된다.

노란색이 로마군, 파란색은 카르타고군


로마군의 양익엔 기병이 포진하였고 카르타고군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한니발의 부대에는 코끼리 부대가 있었다.

한니발은 즉시 기병과 코끼리 부대에게 로마군의 기병이 버티고 있는 양익을 향한 돌격을 명령한다.


이 공격으로 로마군의 기병은 코끼리의 거대한 크기에 압도되어 두려움도 생겼고, 카르타고 기병에 비해 수적으로도 불리해 무너져버리게 되었다.


양익이 붕괴된 로마 중보병은 양익과 중앙에서 협공을 당했다.

열세의 상황에서도 로마군은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했지만, 이때 한니발이 숨겨두었던 마고네의 2천 병력이 숲에서 뛰쳐나와 로마군의 후방을 향해 돌진한다.


결국 로마군이 사방에서 공격당하는 형태가 돼버렸고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오갈 곳이 없어진 샘프로니우스는 자신의 보병으로 하여금 정면을 향해 돌격명령을 내렸다.

정면을 돌파해 퇴각하려고 한 것이었다.

전멸당할 위기에 처한 로마군은 사력을 다해 공격을 감행했고, 전투에 숙련된 로마의 중보병은 한니발의 중앙에 배치된 병력들을 뚫고 돌파하는 데 성공한다.

포위망을 탈출한 전방에 있던 1만여 남짓의 로마 중보병과 지휘관인 샘프로니우스는 퇴각해 버렸고 후방에 남겨진 병사들은 모두 카르타고군에 의해 죽거나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 전투는 후에 '트레비아 전투'라고 불리며, 이 싸움에서 3만의 카르타고 군 중 전사자는 5천여 명, 로마군은 4만 2천 명 중 3만 2천여가 전사하였다.

카르타고 군의 6배에 달하는 로마군이 전사해 버린 것이다.

샘프로니우스와 남은 패잔병들은 근처 숙영지에서 쉬고 있었던 스키피오에게로 달아났다.

이제 북이탈리아에서는 더 이상 전투에서 승산 할 가망이 없어져버렸는데, 그 이유는 그 지역의 갈리아 세력이 한니발의 지휘능력을 보고 모두 로마를 배신하고 한니발 편에 붙어버렸기 때문이다.

북이탈리아가 가망 없어지자 스키피오는 자신의 병력과 원로원에게서 받은 추가병력과 함께 스페인을 공격하러 떠났고, 샘프로니우스는 남은 병력과 함께 마침내 북이탈리아에서 철수하였고, 이로써 로마는 북이탈리아 전역을 전부 상실하게 된다.

한편 스페인으로 출발한 스키피오는 아들을 로마로 돌려보내고 원군을 이끌고 온 동생과 함께 스페인에 상륙했다.

이때 스페인을 통치하는 사람은 한니발의 동생 하스두르발이었다.


기존 스페인 통치자는 한니발이었으나, 한니발이 이탈리아로 출정을 나가면서 하스두르발이 위임을 받았는데, 스키피오가 쳐들어오니 하스두르발도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하스두르발이 병력을 이끌고 스피키오를 상대했지만 지휘 능력이 형인 한니발에 비해 부족했던 하스두르발은 스피키오에게 완패해 버리고, 승리를 거둔 스키피오는 그 자리에 숙영지를 설치하고 주변 지역을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다.

한편 로마 본국은 장장 15년에 걸쳐 정복전쟁을 펼쳐오던 북이탈리아를 한니발 한 사람에 의해 단시간에 빼앗겨버렸으니 엄청난 충격에 휩싸여있었다.

로마인들은 이 절망감을 달래기 위해 야만스러운 종교의식을 거행했는데 이것은 바로 인신공양이었다.


9일간의 희생제전이 선포되고 여러 명의 성인이 제물로 바쳐진 뒤 집정관 선거를 했는데 여기서 플라미니우스와 제미누스가 당선되었다.

플라미니우스는 점차 발언권이 커지고 있는 평민 계급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원로원에 항의하는 일종의 반부폐 인사였다.

원로원이 그들의 권력으로 경제력 상업 활동 등 모든 면을 좌지우지하자 이것을 법으로 금지시킨 것도 플라미니우스였다.

다만 군사적 재능이 탁월해 한니발이 쳐들어오기 이전 북이탈리아에서 갈리아인들을 제압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워 개선식을 거행했으며, 로마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북이탈리아와 로마를 잇는 플라미니아 가도를 건설한 장본인이다.

하지만 플라미니우스는 원로원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플라미니우스가 집정관에 당선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원로원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한니발을 상대하기 위해 편성한 군단의 지휘권을 주는 시기를 늦추어버린다.

한니발 같은 적을 상대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이권에 따라 내분을 벌이는 행동을 로마의 고위직이었던 원로원 의원들이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원로원이 못마땅했던 플라미니우스는 집정관의 취임식 등을 모두 생략해버리고 몰래 로마에서 야반도주해 자신의 군단이 머무는 곳으로 가서 군단을 인솔한다.

이 소식을 들은 원로원은 길길이 날뛰며 소환을 명령했지만 플라미니우스는 무시해 버린다.

이런 소동이 있었지만 새로운 두 집정관은 그들의 군대와 함께 한니발을 상대하기 위해 북상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두 집정관은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중부를 방어하며, 날씨가 조금 풀리면 두 집정관이 함께 북이탈리아로 공격을 감행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한니발은 북이탈리아에서 로마군과 싸울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중부 이탈리아로 쳐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북부이탈리아를 수비하다간 로마에서 진군해오는 엄청난 인원의 군사들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차라리 선제공격으로 로마군의 병력을 격파하는 것이 좀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니발은 남쪽으로 공격해 내려갈 결심을 했는데 남쪽으로 내려갈 루트는 모두 로마군이 점거하고 있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이번에도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는 것과도 같은 상식을 뛰어넘는 행동을 하기로 결심한다.


바로 위의 화살선과 같은 루트를 이용해 남하하기로 했다.

저 루트가 얼마나 험난한 곳이었냐면, 저 지역은 늪지대였다.

위의 사진과 같은 지형이었는데, 저 루트를 통과하려면 한니발의 병력은 배꼽까지 차오르는 물이 있는 늪지대를 기약 없이 걸어 다녀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로마인들도 '설마 이곳으로 진입할까'라는 생각에 저 늪지대의 수비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데 한니발은 군대를 이끌고 진입한 것이다.

이곳의 행군은 정말 험난했는데, 병사들은 모두 무거운 군장을 들고 행군하면서 늪지대를 계속 걸어야 했다.

그런데 늪지대이다 보니 야간이 되어도 숙영 할 곳이 없고, 앉아서 쉴 수도 없었다.

병사들이 가끔씩 짐수레에 몸을 기대는 것이 휴식의 전부였고 행군하는 내내 서있어야 했으며, 앉아서 쉬지도 수면 시간을 가지지도 못한 상태로 3박 4일 동안을 배까지 물이 차오르는 늪지대를 걸어갔다.


얼마나 험난한 행군이었던지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고 지휘관인 한니발 조차 이곳에서 눈병을 앓아 결국 한쪽 눈을 상실하게 돼버린다.

이러한 고생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는데 얼마간의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전투를 치르지 않고 이탈리아 중부로 진입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한니발의 의도대로 카르타고군은 이탈리아 중부로 진입하는 데 성공한다.



이렇게 투스카니라는 지역으로 진입한 한니발은 행군에 지친 피곤한 군대에게 3일 동안의 휴식을 취하게 하고 그 뒤 주변 지역을 무차별적으로 약탈하고 불태우기 시작한다.

위의 지도에서 왼쪽에 주둔한 로마군의 사령관 플라미니우스는 한니발의 진입으로 인해 굉장히 초조해졌다.

원로원이 플라미니우스의 독단적인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고 엄포를 놓은 데다가 군사적으로도 한니발의 진입을 막지 못했으니 플라미니우스로서는 정말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한니발은 이러한 플라미니우스의 상황을 어떻게 파악했는지 플라미니우스가 보일만한 곳이면 무조건 불을 크게 질러 연기를 자욱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한니발의 게릴라성 공격이 되풀이되자 플라미니우스는 이성을 상실하였고 한니발의 군대를 앞뒤를 가리지 않고 추격하기 시작했다.

기존 플라미니우스의 계획은 동쪽에 주둔하고 있는 집정관인 제미누스와 합류하여 두 집정관이 함께 한니발을 상대할 생각이었지만, 한니발의 도발에 넘어가 자신의 군대만으로 추격하기 시작했다.

한니발은 플라미니우스 추격에 반격은 하지 않고 계속 퇴각만 하다가 트라시메누스 호수 북쪽을 행군하게 되었는데 이곳이 매복하기에 정말 좋은 곳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위의 사진과 같은 지형에 저 호수와 산 사이가 행군로였다.

한니발은 로마군이 이 행군로를 지나갈 때 산속에 매복해 있던 병사들이 기습 공격을 한다면 로마군을 다방향에서 공격해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니발은 이 행군로에 한밤중에 병사들을 숲 속에 매복ㆍ 배치했는데 자신이 직접 데리고 온 정예군은 동쪽에서 진격로를 막을 수 있게, 갈리아군은 중앙, 기병으로는 서쪽에서 후방을 차단하도록 배치했다.

혹시나 노련한 지휘관인 플라미니우스가 매복 작전을 파악할 것을 걱정한 한니발을 한 가지 더 책략을 세운다.

자신의 병력의 일부를 멀리 떨어진 곳에 보내 야영을 하면서 최대한 크고 밝게 불을 피우게 하였다.

그 불빛을 보고 플라미니우스가 한니발 군이 사실은 더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플라미니우스는 한니발의 책략에 넘어가버린다.

먼 곳에서 불꽃이 크게 피어오르고 있는 한니발 군의 야영지를 확인한 플라미니우스는 안심하고 전군과 함께 한니발의 병사가 매복된 곳으로 진격한다.

플라미니우스의 모든 군대가 트라시메누스 호수 북쪽의 행군로에 진입했을 때 갑자기 군용 나팔이 울린다.


이것을 신호로 숲에서 카르타고군이 밀물처럼 쏟아져 나와 로마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고전하는 로마군들


한니발 군의 기습으로 인해 미처 전투태세도 갖추지 못하고, 뒤는 호수이고 사방에서 병력이 단숨에 쏟아져 나와 덮친 것이기 때문에 로마군에게는 참으로 참담한 상황이었다.

전열을 유지한 채로 싸우는 카르타고군과 전열이 조각조각 나버려 후방이 노출된 상태의 로마군은
이렇게 가혹한 상황에서도 4시간 동안이나 백병전을 벌이면서 저항했다.

붉은색이 로마군


이런 상황에서도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는 위엄 있는 모습으로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쳤다.

"제군들이여 이 상황에선 신들에게 기도나 간청은 소용없다.

오직 제군들의 용기와 힘만을 의지해야 한다.

제군들의 무기로 적의 포위망을 뚫어나가야 한다.

그리고 침착할수록 생존의 길은 열릴 것이다"


이런 지휘관의 간곡한 외침은 사방에서 요동치는 무기의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병사들의 고함 소리에 묻혀버려 제대로 들을 수 조차 없었다.

호주 주변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있어 병사들의 시야는 겨우 자신이 마주한 상대만 볼 수 있는 정도였고,
전장의 모든 상황을 오로지 청각에 의존하며 싸워야 했기 때문에 병사들의 공포는 극대화되었다.

이에 더해 로마군의 지휘체계는 이미 붕괴되어 장교들까지 지휘 대신 칼을 빼들고 백병전을 벌이는 상황이 되었고, 제대로 된 명령의 하달이 없으니 전투 중에 도망가거나 아군의 뒤에 숨어 목숨을 보존하는 등의 전투를 회피하는 병사들이 속속들이 등장하며 로마군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로마군의 진영으로 파고드는 카르타고 군으로 인해 사방으로 포위되어서 싸우는 대대들도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소동 중 큰 지진이 일어났는데 양군 모두 땅이 흔들리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다.

세 시간이 경과되면서 로마군의 수는 점차 줄어들었고 가장 치열한 전투가 집정관 플라미니우스 주위에서 벌어졌다.

집정관은 붉은 망토와 화려한 장식이 달려있는 투구에 12명의 릭토르의 호위를 받기 때문에 눈에 확 띄었고,
카르타고의 병사들은 앞다투어 로마의 집정관을 죽이거나 생포하여 전과를 올리고 싶어 했다.

전투 내내 플라미니우스는 자신이 거느린 몇몇 친위대를 대동하고 다니며 아군을 지원하고 다녔는데 로마군의 수가 줄어들자 이젠 자신이 표적이 된 것이다.


플라미니우스의 주위에 있었던 로마군은 자신들의 집정관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이들도 하나둘씩 전사해 버렸고, 마침내 두카리우스라고 불리는 갈리아 기병이 돌격 창으로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를 꿰뚫어 죽였다.


사령관이 전사하면서 로마군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해가 중천에 뜰 때쯤 전투는 종료되었다.

이때 4만의 로마군 중 살아남은 병력은 1만이었다.

카르타고군은 3만의 병력을 동원해 2천5백 명의 전사자만 냈으니 한니발의 완벽한 승리였다.

이 전투의 결과가 로마에 전달되었고 로마인들은 크나큰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이들은 법무관 (집정관 부재 시엔 법무관이 도시의 최고 행정관이었다)의 집에 몰려가 소식의 진위를 재차 물어보았고 법무관은

"우리 군은 대패했다"라고 공표했다.

로마 역사상 집정관이 사망한 전투는 몇 차례 없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집정관 레굴루스가 전사했을 때 로마인들이 두고두고 회자할 정도의 대사건이었는데 이번은 로마 본토에서 집정관과 그의 군대가 몰살당한 것이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집정관 제미누스가 플라미니우스를 지원하기 위해 서둘러 보낸 4천 기병이 합류하려고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플라미니우스는 이미 전사했고, 4천의 기병들은 카르타고군의 추격을 받아 모두 생포되어 버렸다.

이때 로마는 기병 전력이 항상 부족했기 때문에 4천 기병이면 정말 엄청나게 큰 손실이었다.

이 소식을 접하게 된 로마 원로원은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고 판단하여 독재관을 임명하기로 결정하였다.

독재관

집정관 보다 한 단계 위의, 단독 집정관 같은 직책으로 집정관보다 권한이 컸으며, 국가가 안위가 위태롭다고 판단되는 비상 상황에서만 임명되는 직책.

시민들은 이전에 카르타고에 사신으로 갔던 원로원 의원의 대표였던 퀸투스 파비우스를 선출하였다.


퀸투스 파비우스는 독재관으로 임명된 즉시 로마 성벽을 수리하며 한니발의 공격을 대비하였고 귀환한 제미누스의 군대에 2개 군단을 추가로 편성하였다.



그렇게 로마 본국을 제정비한 후 원로원의 승인을 받고 내정 문제를 처리한 퀸투스는 한니발과의 전투를 위해 출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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