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하고 호탕한 우리의 조상들

방랑 시인 김삿갓

MeRCuRyNim 2023. 6. 14.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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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김병연

선생은 선생 내불알(先生 來不謁)이다.

 

- 떠돌이 시인 김삿갓 - 

 

풍자와 해학에는 통쾌한 카타르시스가 있지만, 억눌린 자의 분노와 슬픔인 페이소스도 있다.


조선은 유학을 치도의 이데올로기로 삼은 나라로, 예(禮)가 사대부의 정신세계를 지배했으며 예에 벗어나면 강상의 죄가 되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유학이 이처럼 지나치게 교조적이다 보니 그에 따른 폐해도 적지 않았는데 조상을 받들지 않으면 예에 어긋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하고, 효를 실행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았다.


향리의 백일장에서 자신이 할아버지를 비판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는 하늘을 볼 수 없다며 평생 동안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金笠)이라는 별호로 불리는 김병연(金炳淵)은 자신을 예의 울타리에 가둬 정신이 황폐해진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의 파격적인 기행과 허위에 찬 양반을 풍자하는 해학에는 웃음이 넘치지만, 방황하는 지식인의 눈물과 슬픔이 얼룩처럼 곳곳에 묻어 있다.

김삿갓은 안동 김씨의 후손으로 1807년(순조 7년)에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을 아버지 김안근과 어머니 함평 이씨 슬하에서 평범하게 보냈다. 

 

홍경래의 난

 

그러나 그가 다섯 살이 되던 1811년, 평안도 지방에서 홍경래가 중심이 된 농민전쟁이 일어나면서 김삿갓의 앞날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홍경래는 평안도 용강 출신으로 과거에서 낙방하자 서북 출신을 멸시하는 현실에 불만을 품고 상인과 무인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평안도 일대를 삽시간에 휩쓴 홍경래의 농민군은 기세가 사나웠다. 

 

당시 선천부사(府使)를 지낸 김삿갓의 할아버지 김익순은 곧장 검산성(劍山城)으로 이동하여 방어선을 구축했다.

 

"홍경래가 관북(關北) : 함경도 지방을 휩쓸고 도성으로 내달리고 있습니다. 

 

천명이 홍경래에게 돌아간 듯하니 투항하여 목숨을 보존하십시오."

 

검산성의 진영에 있던 김응종이 말했다. 

 

사방에서 관군이 무너져서 검산성도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김삿갓은 두 얼굴의 사나이다.  파격적인 기행과 허위에 찬 양반 사회를 풍자하는 해학은 세상을 통쾌하게했지만, 시대와 불화하는 지식인의 내면은 자신을 고독하게 만들었다. (강원도 영월의 김삿갓유원지에 있는 김삿갓동상)

 

'천명이 바뀌었는가?'


김익순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반군에게 투항했다가 그들이 토벌되면 대역모반죄를 뒤집어 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도처럼 사납게 밀어닥치는 반군의 기세에 곳곳의 관군이 무너지고 있었고 김익순에게는 반군을 방어할 만한 군사력이 없었다. 

 

검산성의 군사들은 언제 성이 함락될지 알 수 없어 불안에 떨었다.


"속히 투항해야 합니다. 적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김응종이 망설이는 김익순을 재촉했고 김익순은 홍경래의 농민군이 파죽지세로 관북 지방을 휩쓸자 어쩔 수 없이 농민군에 투항하고 홍경래의 사령장을 받아 농민군에 가담했다. 

 

김익순의 투항은 즉시 조정에 보고되었는데 성을 지켜야 할 부사가 난군에 투항하자 조정은 벌집을 쑤신 것처럼 들끓었다.


"전 부사 김익순은 그때 검산성에 있었는데 향소(鄕所) 김응종이 힘써 투항할 것을 권하자 마침내 항서(書)를 써서 보냈고, 이어 고을로 내려와 여염집에 거처하였습니다. 

 

다음날 적장이 불러들여 대청에 앉히고 술과 고기로 대접하며 군관 전령에 제수 하였습니다."

 


조정 대신들은 무인 출신의 선천부사 김익순이 투항하자 대노하여 대역모반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김익순이 홍경래 군에 가담한 상태라 당장에는 처벌할 수 없었다.

 

홍경래 군은 약 5개월에 걸쳐 평안도 일대를 휩쓸었으나 농민군의 한계 때문에 결국 관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군관 전령을 하던 김익순은 농민군이 패하고 홍경래가 사로잡히자 조문형을 사주하여 1000냥을 주기로 약속하고, 그에게 농민군의 참모 김창시의 목을 베어 김익순이 죽인 것처럼 위장하여 조정에 바치도록 계책을 꾸몄다. 

 

대역모반죄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선천의 전 부사 김익순이 적과 김창시의 수급을 가지고 진의 앞에 왔으므로, 순무 중군이 잡아들여 공초를 받은 뒤 칼을 씌워 영문으로 압송하였습니다."


평안병사가 조정에 아뢰었다. 

 

조문형은 김익순과 약속한 대로 김창시의 목을 베어 조정에 바쳤으나 토벌군의 영문에 갇힌 김익순은 돈을 지불할 여력이 없었다. 

 

이에 조문형이 김익순의 음모를 조정에 고발하여 모든 사실이 밝혀지고 김익순은 의금부로 압송되었고 의금부는 김익순을 철저하게 추국 했다. 


"김익순은 적병이 처음 일어났을 때 방어하는 계책을 본받지는 않고 적의 선봉이 도착하기도 전에 홍경래에게 항서를 보냈
습니다. 

 

날뛰는 마음을 품고 홍경래를 만나기를 청하여 공손히 문안 인사를 나누고 대청에 올라가 술잔을 주고받기까지 했다니 신하 된 자로 어찌 이와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김익순은 홍경래에게서 돈과 쌀을 받았을 뿐 아니라 나라를 배신하고 적을 따르는 일을 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또 죽음을 면할 계책을 내어 적의 수급을 사서 수기(手記)를 꾸며주었으니 흉악하고 패려한 뱃속이 남김없이 드러났습니다. 

 

김익순을 대역모반죄로 다스릴 것을 청합니다."

 


의금부에서 김익순을 추국 하여 아뢰자 순조는 법대로 처리하라고 영을 내렸고 이에 김익순은 참수되고 그의 집안은 멸문의 화를 당했다. 

 

김삿갓의 할머니 전주 이 씨는 광주의 관비로 축출되었고, 아버지 김안근은 남해로 귀양을 갔다. 

 

어머니는 어린 동생 김병호를 데리고 여주로 피신하였고 여섯 살 김삿갓은 노비로 끌려가야 했으나 충직한 종 김성수의 도움으로 형 김병하와 함께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했다.

 

김삿갓은 부모와 헤어져 김성수의 도움으로 공부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조부 김익순의 죄로 멸족의 위기에 처했으나 평안도와 황해도의 백성을 위무하려는 조정의 노력으로 그들은 폐족(廢族, 자손이 벼슬을 할 수 없는 형 처분)을 받았다. 

 

그 후 김삿갓 형제는 비로소 어머니에게 돌아갔지만, 귀양을 갔던 아버지 김안근은 화병으로 죽은 뒤였다.


김삿갓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조부가 역적 김익순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학문에 전념하도록 하였는데 사람들의 괄시와 천대가 심해지자 어머니는 가족을 데리고 강원도 영월군 삼옥리로 이주했다.


김익순이 역적이 되긴 했으나 김삿갓의 집안은 선천 부사를 지낼 정도로 명문이었으니, 김삿갓의 어머니는 남편이 없어도
자녀를 서당에 보내 학문을 가르쳤다.


김삿갓은 스무 살 때 한 살 연상인 장수황 씨와 결혼했다.

 

 

그리고 그 해 영월 관풍헌에서 실시된 백일장에 참가한 김삿갓은 시제 '논정가산충절사김익순죄통우천'이 발표되자, 가산 군수 정 씨를 예찬하고 선천부사이자 방어사를 지낸 조부 김익순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글을 지어 장원했다.


대대로 임금을 섬겨온 너 김익순아

一爾世臣金益淳


정공(鄭公)은 경대부에 지나지 않았으나

鄭公不過卿大夫

 

농서의 장군 이능처럼 항복하지 않아

將軍桃李陵西落


충신열사들 가운데 공명이 으뜸이다
烈士功名圖末高

조부가 역적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자란 김삿갓은 첫 행부터 김익순을 신랄하게 비난했는데 그는 중국 한나라의 명장 이능이 열 배나 군사가 많은 흉노와 싸우다가 부득이 투항한 일까지 거론했다. 

 

사마천

 

이능은 한나라 무제 때의 유명한 장군으로, 사마천(司馬遷)은 그를 비호하다가 궁형을 당했다.

 

사마천은 이 때문에 <사기(史記)>를 남겨 중국 최고의 역사학자가 된다.


가문은 김 씨들 중에 첫째가는 장동(壯洞)김 씨요

家聲壯洞甲族金


이름은 장안에서 드높은 순淳자 항렬이구나

名字長安行列


가문이 이처럼 성은을 무겁게 입었으니

家門如許聖恩重


백만 대군 앞이라도 의를 저버려선 안 되리라

百萬兵前義不下


청천강 맑은 물에 병마를 씻고

淸川江水洗兵波


철옹산 나뭇가지로 만든 활을 메고

鐵甕山樹掛弓枝

 

임금의 어전에 나아가 무릎 끓듯이

吾王庭下進退膝


등을 돌리고 서쪽의 흉악한 도적이 되었구나

背向西城凶賊脆


너의 혼은 구천에 갈 수 없으니

魂飛莫向九泉去


지하에 선대왕들께서 계시기 때문이라

地下猶存先大王


임금을 저버리고 육친을 잊었으니

忘君是日又忘親


한 번 죽음은 오히려 가볍고 만 번 죽어야 마땅하리

一死猶輕萬死宜


너는 춘추필법을 아느냐?

春秋筆法爾知否


네 일을 동국의 역사에 기록하여 천추에 남기리라

此事流傳東國史

시의 마지막 구절에는 한 번 죽는 것도 모자라 만 번을 죽어야 마땅하며, 동국의 역사에 기록하여 천추만대에 전하도록 하겠다고 호언을 했는데 역적인 할아버지를 신랄하게 비난한 것이다.

 

어찌 되었거나 김삿갓의 시는 호탕하고 강개 하여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김삿갓을 위해 영월 사또가 술을 하사했고, 그는 문우들과 함께 취하도록 마신 뒤 집으로 돌아와 백일장에서 장원한 일을 어머니에게 자랑했다. 

 

어머니는 김삿갓의 시제를 듣고 깜짝 놀라 시를 외워보라고 말했다. 

 

김삿갓이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외자 어머니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김익순이 누구인지 아느냐?"


어머니가 침울한 표정으로 김삿갓에게 물었다.


“대역모반죄인이 아닙니까?"


김삿갓이 술에 취하여 반문했다. 

 

김삿갓의 어머니 이 씨는 비로소 김삿갓의 조부가 김익순이며, 폐족이라 평생 동안 과거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순간 김삿갓은 벼락을 맞은 것 같았고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으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는가? 할아버지는 어찌하여 대역모반 죄인이 되었는가?'


김삿갓은 눈앞이 캄캄하여 절망했다. 

 

전도가 양양하던 청년이 한순간에 천 길 벼랑으로 굴러 떨어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역적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넋을 잃은 듯이 우두커니 앉아서 하늘만 쳐다보았다. 

 

할아버지가 홍경래에게 투항하여 대역모반 죄인이 되고, 그 때문에 참수되었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았고 마음이 너무 괴로워 매일같이 술에 취해 살았다.

 

할아버지가 대역모반죄인이라는 사실보다 자신이 과거조차 볼 수 없는 폐족이라는 사실이 더 고통스러웠는데 그것은 사실상 폐인이 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길 떠나는 김삿갓


김삿갓은 스물두 살 때 아들 학균을 낳았다. 

 

자신이 폐족 신분이라는 사실이 괴로웠으나 아버지로서 책임감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김삿갓은 상경하여 이름을 김란, 자를 이명, 호를 지상으로 바꾸고 안응수의 문객으로 들어가 공부하면서 권문세가의 후광으로 출세하려고 했다. 

 

그러나 조정은 썩을 대로 썩어 그 모습이 매우 혼탁했고 매관매직이 성행하여 보잘것없는 서리(書吏) 자리조차 그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세상이 썩었으니 홍경래가 봉기한 것이다. 그를 대역모반 죄인이라고만 할 수 있는가?'

 

조정의 부패와 무능에 크게 실망한 김삿갓에게는 오히려 홍경래의 봉기가 정당하게 여겨졌고, 조부 김익순에게 더욱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김삿갓은 조정에 대한 불만과 조부에 대한 죄스러움, 평생 벼슬을 할 수 없는 신분이 되었다는 좌절감을 안고 영월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월로 돌아가는 길은 전쟁에 패한 군사처럼 비참하고 괴로웠지만 어머니와 아내는 김삿갓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그러나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과거를 볼 수 없으니 학문을 해도 소용이 없고, 학문을 하던 그가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다. 

 

김삿갓은 그 해 둘째 아들 익균을 낳았다.


'대역모반죄인의 자손이 무엇을 하겠는가? 나는 천하에 가장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구나.'

 

김삿갓은 맏아들 학균을 형에게 입양시키고 처자식을 남겨둔 채 방랑길에 올랐는데 그는 하늘을 바라볼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져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고 전국을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울적한 심사를 달래기 위한 가벼운 여행이었으나 발길 닿는 대로 걸음을 놓기 시작하자 새로운 마을, 새로운 사람
들을 만나는 기쁨과 고단한 세상살이의 슬픔을 가슴속에 새기는 방랑이 계속되었다.

돈을 가지고 출발한 방랑 길이 아니었기에 김삿갓은 서당에서 끼니와 잠자리를 해결했다. 

 

책 읽는 거지

 

부유한 집안이나 행세깨나 하는 양반을 찾아가면 문전 축객을 당하기 일쑤여서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많았지만 그래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았다.


김삿갓 방랑을 하던 19세기 조선은 민초들에게 고통스러운 시대였다. 광작(廣作 : 조선 후기 지주들이 경작지를 확대하여 토지를 경영하던 현상)으로 많은 농민들이 이동을 하고 유리걸식하다가 굶어 죽었다.


흉년과 질병으로 굶주린 민초들은 찬 바람이 불면 낙엽처럼 쓰러져 뒹굴었으며 들판을 배회하다가 얼어 죽고, 산속을 지나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이 무렵 조선의 여행 시인들은 참혹한 현실을 시로 남겨 민초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반영했다. 

 

궁핍한 백성들에게 떠도는 나그네는 귀찮은 존재일 뿐이었다.


날이 저물어 두어 집 문을 두드리니

斜陽印立兩榮雇


잠옷 차림 주인이 손을 내저어 가라고 하네

三被主人手却揮


두견새마저 야박한 인심을 알아

杜宇亦知風俗薄


숲을 떠나 돌아오지 말라고 우네

隔林啼送不如歸


해가 기울고 날이 저물어 사방이 어두운데 나그네가 문을 두드리지만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한 마을 주민에게 나그네는 반가운 손님이 아니다. 

 

따뜻한 밥 한 그릇, 피곤한 육신을 누일 방 한 칸 내어주지 않는다. 

 

잠자리를 얻지 못하고 돌아 나오는 방랑객에게 두견새 울음소리는 더욱 처량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의 방랑은 멈추지 않았는데 그것은 철저한 자학이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의 방랑은 계속되었지만 방랑길에서 얻고자 하는 것도 없이 그저 정처 없이 길을 따라갈 뿐이었다.


스무 나무 아래 앉은 서러운 나그네에게

二十樹下三十客


망할 놈의 마을에서는 쉰밥을 주는구나

四十村中五十食


인간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는가

人間豈有七十事


내 집에 돌아가 선 밥을 먹느니만 못하다

不如歸家三十食

김삿갓이 부유한 집 대문을 두드렸으나 억지로 동냥을 주듯 쉰밥 한 덩어리를 내어줄 뿐 잠자리를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부자의 인심이 사나우니 마을의 인심도 야박할 수밖에 없다.

 

철종


철종 시대는 삼정의 문란으로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김좌근의 첩 나합은 민초들이 굶어 죽어가는데도 방생을 한다고 쌀 몇 가마니로 밥을 지어 한강에 던졌고 그 밥을 건져 먹기 위해 강물로 뛰어들었다가 죽은 이들도 있었다.

 

굶주린 백성이 여기저기서 죽어갈 때 떠돌이 시인에게 먹을 것과 잠잘 곳을 주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김삿갓은 가난한 백성이 아니라 부유한 자가 먹지 못할 음식을 준 것을 탓했다.


방랑객은 하늘을 지붕 삼아 한두 달을 떠돈 것이 아니다. 

 

그는 10년, 20년에 걸쳐 장구한 세월을 풍찬노숙하면서 떠돌았는데 떠돌이 시인의 눈에 비친 조선은 여전히 궁핍했다. 

 

조선의 경제가 양극화하면서 유리걸식하는 백성이 더욱 많아졌고 길에는 거지 떼들, 들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널려 있었다.

 

유배객 시인으로 유명한 김려는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 가면서 얼어 죽은 시체를 둘이나 발견했고, 방랑객 김삿갓도 굶어 죽은 시체를 발견하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시 한 수를 남긴다.


그대의 성과 이름을 알지 못하니

不知汝性不識名


어느 곳 청산이 그대 고향일꼬

何處靑山子故鄕

 

파리는 썩은 살에 파고들어 아침 식사를 하고

蠅侵腐肉喧朝日


까마귀는 외로운 혼을 불러 석양에 조상하네

烏喚孤魂弔夕陽

흉년에 죽는 것은 가난한 민초들이다.

 

흉년으로 굶주리고 질병으로 마을 곳곳에서 사람들이 죽었으나 시신을 미처 수습하지 못해 썩어간다. 

 

18세기 말엽에서 19세기 초반 조선을 휩쓴 호열자(虎列刺 : 콜레라)는 한 번 창궐하면 수많은 인명을 빼앗고 찬 바람이 불어야 물러갔다. 

 

천연두 또한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다산 정약용은 자녀 여섯을 모두 천연두로 잃었을 정도다. 

 

기아와 질병으로 조선의 백성은 아프리카 난민처럼 살았다.

 

금당 박행보 산수도

 

그러나 가난하다고 인심이 모두 야박한 것은 아니었다. 

 

산촌에 이르러 하룻밤 묵을 것을 청하자 지나가는 길손이라고 상을 들였는데 죽 한 그뿐이었다.

 

네 다리 소반에는 달랑 죽 한 그릇

四脚松盤粥一器

 

푸른 하늘 흰 구름이 물속에 잠겼구나

天光雲影共徘徊

 

주인이여 무안하게 여기지 마시라

主人莫道無顏色


나는 청산이 거꾸로 물에 들어오는 것을 사랑하오

吾愛靑山倒水來

조선의 백성은 가난을 숙명으로 생각했고, 김삿갓은 오히려 이 가난한 집에서 마음의 평화를 느꼈다.

김삿갓은 전국을 떠돌다가 함흥에 이른다. 

 

이곳에서 그는 한 선비의 배려로 3년 동안 훈장을 하는데, 이때 가련(可憐)이라는 기생을 만난다. 

 

가련의 어머니는 과부인데 김삿갓을 하룻밤 재워 주면서 자식을 열두 명이나 둔 사연을 이야기했고, 김삿갓은 과부인데 어찌하여 그렇게 많은 자식을 두었느냐고 물었다.


“있는 줄 알고 달라는데 안 줄 수가 없었다."


노파가 된 과부의 대답이다.

 

혜원 신윤복(1758~?)의 풍속화


노파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낸 김삿갓은 함흥으로 들어가기 위해 반룡산 골짜기를 지나다가 선비들이 기생까지 부르고 시회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김삿갓은 마침 출출하던 참이라 그들에게 술 한잔을 청했지만, 선비들은 김삿갓의 남루한 행색을 보고 조롱하면서 시를 읊어보라고 말했다. 

 

김삿갓이 시회에 참석한 선비들의 통성명을 청하자 원생원, 문첨지, 서진사, 조석사라고 대답했다. 

 

김삿갓은 시 한 편을 휘갈겨 쓰고 도포자락을 펄럭이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


해 뜨니 원숭이가 들로 나오고

日出猿生員


날 저무니 모기가 앉은자리를 쏘네

黃昏蚊添至


고양이 지나자 쥐는 모조리 죽고

猫過鼠盡死


밤이 되자 벼룩이 나와 무네

夜出童席射

시회에 참석한 원생원, 문첨지, 서진사, 조석사를 원숭이, 모기, 쥐, 벼룩으로 묘사하여 농락한 시다. 

 

이때 양반들 사이에 앉아 있던 기생 가련은 김삿갓이 네 선비를 신랄하게 농락하자 곧장 그를 뒤따라가서 집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때부터 애틋한 사랑을 나눈다.

 

신윤복의 미인도

 

가련한 행색에 가련한 몸으로

可憐行色可憐身


가련의 문전에서 가련을 찾노라

可憐門前訪可憐


가련아! 이 뜻을 가련에게 전하면

可憐此意傳可憐


가련은 능히 가련한 내 마음 알아주리라

可憐能知可憐心

위는 김삿갓이 가련이라는 기생을 만나 사랑을 고백하면서 지은 시다. 

 

시의 애절함을 떠나 가련이라는 글자를 두 번씩 넣어 지은 시는 절묘하기까지 하다.


창가에 마주 앉아 쉬지 않고 농을 하니

對月紗窓弄未休


반은 아리땁고 반은 수줍은 모습일세

半含嬌態牛含差


낮은 목소리로 사랑하느냐고 물으니

低聲暗問相思否


금비녀 매만지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네

手整金釵笑點頭

가련은 시와 문장에 뛰어났다. 

 

커플

 

그녀는 김삿갓이 선비들을 농락한 시에 감탄하여 사랑을 나누었다.

 

하루는 김삿갓이 가련을 희롱했다.

털이 무성하고 속이 넓으니

毛深內閣


반드시 다른 놈이 먼저 지나갔구나

必過他人

김삿갓은 가련의 처녀성을 의심하는 듯한 말로 희롱한 것이었는데 그러자 가련이 대뜸 시를 지어 반박했다.


후원의 누런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벌어지고

後苑黃栗不蜂坼


앞 시내의 버드나무는 비가 오지 않아도 잘 자라요
前川楊柳不雨長

 

 

당대의 방랑 시인 김삿갓과 꽃처럼 아름다운 스물세 살 여인은 3년 동안 깊은 사랑을 나누었지만, 그러나 김삿갓은 한 곳에 정착하는 인물이 아니다. 

 

함흥을 떠나려 하자 가련과 헤어지는 것이 안타까워 시 한 편을 남긴다.


가련의 앞에서 가련과 이별하려니

可憐門前別可憐


가련한 나그네가 더욱 가련하구나

可憐行客尤可憐


가련아! 가련한 자 떠나가는 것을 슬퍼 마라

可憐莫惜可憐去


가련을 잊지 않고 가련에게 다시 오리라

可憐不忘歸可憐

4년 동안 전국을 떠돌아다니던 김삿갓은 귀향하여 1년 동안 집에서 지냈다. 

 

그러나 다시 집을 떠나 한양, 충청도, 경상도를 돌았고, 경상도 안동의 도산서원 아랫마을 서당에서 몇 해 동안 훈장 노릇을 하다가 다시 전라도, 충청도, 평안도를 거쳐 어릴 때 자란 황해도 곡산의 김성수 아들 집에서 1년쯤 훈장 노릇을 했다.

 

그리고 다시 역마살이 도져 길을 떠났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작품


어느 추운 겨울날, 김삿갓이 옛날부터 알고 지내던 시골 서당을 찾아가자 훈장은 내다보지도 않았는데 김삿갓은 인심이 옛날과 다르자 실망했다. 

 

서당에서는 아이들이 글을 읽고 있었으나 그를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김삿갓은 훈장의 행위가 괘씸하여 벽에 시를 한 줄 써놓고 나왔다.


서당을 일찍부터 알고 왔는데

書堂來早知


방 안에는 모두 존귀한 분들이네

房中皆尊物


생도는 열 명도 못 되는데

生徒諸未十


선생은 찾아와 보지도 않네

先生來不謁

자기를 모른 체하는 훈장에게 서운한 감정을 살포시 드러낸 시처럼 보이지만, 한자를 소리 내어 읽으면 얼마나 지독한 욕설
인지 알 수 있다.


書堂來早知(서당내조지 : 서당은 내 X이요)


房中皆尊物(방중개존물 : 방 안은 온통 개 X물)


生徒諸未十(생도제미십 : 생도는 제미십이고)


先生來不謁(선생내불알 : 선생은 내 X알이다)

 

어이가 없네;;;;


지독한 욕설로 쓴 김삿갓의 이 시가 세간에 나돌자 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김삿갓은 전국을 바람처럼 떠돌며 일생을 보냈는데 김삿갓 스스로 한 번 삿갓을 썼더니 40년이 가까워졌다고 술회할 정도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아버님께서는 어찌 이렇게 떠돌고 계십니까? 

그만 방황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십시오."


아들 익균이 충청도 계룡산까지 찾아와 권했다. 

 

30여 년을 떠도는 동안 아들은 장성해 성인이 되었고, 김삿갓의 머리에도 흰머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어미와 너희를 돌보지 않은 내가 무슨 낯으로 돌아가겠느냐?"


김삿갓에게 깊은 회한이 일었다.

 

평생을 방랑하느라 아내와 자식들을 돌보지 않아 남남처럼 서먹서먹했다.


"아버님의 쓰라린 심중은 어머님이나 저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집에서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주십시오."


"네 어미를 볼 낯이 없다."


“어머님께서는 눈을 감기 전에 아버님 한 번 보는 것이 소원이랍니다."


익균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고, 아들을 바라보는 김삿갓의 눈에도 눈물이 비쳤다.

 

생각해 보면 김삿갓의 방랑으로 누구보다 가슴에 한을 안고 산 이가 그의 아내이다.


"그렇다면 집으로 돌아가겠다. 편히 쉬어라."


김삿갓과 아들 익균은 나란히 누웠다. 

 

아들은 먼 길을 오느라 피곤했는지 이내 잠이 들었다. 

 

김삿갓은 잠이 오지 않았다. 

 

자신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아내의 얼굴이 가뭇하게 떠올랐다.


아내에게 뭐라고 변명을 하겠는가. 

 

김삿갓은 잠든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슬그머니 일어나 계룡산을 떠나고 말았다.


익균은 자신이 잠든 사이에 아버지가 떠나자 실망한 채 영월의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니가 하염없이 울었다.


"소자가 반드시 아버님을 모시고 돌아오겠습니다."


익균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자 간장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며칠 동안 집에서 쉰 뒤 아버지를 찾아 다시 길을 떠났다. 

 

그리고는 물어물어 경상도까지 찾아가 1년 만에 다시 김삿갓을 만났지만 김삿갓은 이번에는 아들에게 심부름을 보낸 뒤에 도망치고 말았다.


'아버님은 정녕 집으로 돌아오시지 않으려는 것인가?'


익균은 아버지에게 실망했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가슴이 허튼하고 걸음이 한없이 무거웠다.


3년이 더 지나 경상도 진주까지 찾아온 익균이 간곡하게 권하자 김삿갓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으나, 다시 마음이 변해 떠났다.

 

김삿갓은 끝없이 걸었고, 급기야 지치고 병들었다.

 

영화계의 제니 = 조선의 김삿갓

 

제니 = 김삿갓

 

그는 57세가 되었을 때 전라도 동복(同福) 땅에서 쓰러진 것을 지나던 선비가 나귀에 태워 자기 집으로 데려가 6개월 가까이 지냈으나, 몸이 회복되자 지리산을 두루 돌아본 뒤 3년 만에 집으로 돌아와 불우한 일생을 마쳤다.


김삿갓은 불행한 시인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많은 시는 자유로운 영혼의 정신세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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