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하고 호탕한 우리의 조상들

신용개(申用漑)

MeRCuRyNim 2023. 5. 31.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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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대작하며

 

달빛과 노닐다

 

- 주신 신용개 -

 

세상이 어지러울 때 가뭄에 내리는 한 줄기 소낙비처럼 막힌 곳을 통쾌하게 뚫어주는 사람을 쾌인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하는 것에는 권력자의 비리를 캐내어 진실을 밝히는 일도 있고, 권력을 남용하는 관리를 응징하거나 권위와 명분만 내세우면서 허위에 가득 찬 양반을 조롱하는 일도 있다.

 

성리학이 발달한 조선은 근엄한 유교의 나라지만, 한편으로는 풍자와 해학이 넘쳐났으며 양반이나 천민, 남자와 여자 할 것 없이 풍자와 해학을 즐겼다.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는 《성수패설》《파수록錄》《기문총화記話》 등 많은 문집들이 우스갯소리만 전문적으로 기록했고, 《고금소총古今笑叢》은 옛날과 현재의 우스운 이야기를 망라했다.

 

이러한 문집들에 기록되어 세인을 통쾌하게 웃긴 사람들이 쾌인이다.

 

옛 선비들은 재물을 멀리하고 청렴한 것을 미덕으로 삼았으며 학문을 하면서 세상의 명리에는 초연하고 주색에는 관대했다.

 

조선 좌의정 문경공(文景公) 신용개(申用漑)

 

조선 시대에 청렴한 관리면서 호주가로 이름 높은 선비들이 적지 않은데, 중종 때 좌의정을 지낸 신용개(申用漑)도 그러한 사람이다.

학문이나 경륜에서 흠 잡을 데 하나 없으나 술을 너무 좋아하는 것이 유일한 흠이었던 신용개는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말술을 마시고 쓰러져 수

레에 실려 다니는 일이 많았다.

 

"찬성 신용개, 참찬 이계맹 등은 지위와 명망이 높은데도 술을 많이 마셔 모범이 될 만한 실상이 없어서 정부에 적합하지 않으

니 체직하소서."

 

중종 9년, 장령 박이관과 정언 이청이 신용개가 술을 많이 마신다고 탄핵하였는데 이에는 다른 이유가 전혀 없었다.

 

신용개는 비리에 연루되지도 않고 무능하지도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헌부와 사간원은 조정 관리를 탄핵하는 것이 주요 업무고, 탄핵을 하지 않으면 임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기 때문에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는 흠을 잡아 신용개를 탄핵하였는데 술을 많이 마신다는 이유로 탄핵을 당했으니 그가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짐작할 만하다.

 

※ 신용개는 조선 중기의 뛰어난 문신이다.

성종이 그의 높은 학덕을 사랑하여 어의를 벗어 입혀주었을 정도였으며 학식뿐만 아니라 활쏘기 등 무예도 뛰어났으며, 무엇보다 인품이 곧고 범상치 않아 당대 선비들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중종은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근무를 마치고 술 마시는 것이 어찌 죄란 말인가"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조정 고위 대신으로서 품위 손상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그러나 품위를 손상시켰다고 해서 조정 대신을 파면하는 것은 가혹한 일이다.

 

“신용개와 이계맹은 재상 중에서도 쓸모 있는 사람인데, 술 마시기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탄핵을 당했다.

이들은 경륜이 뛰어나 조정에 필요한 인재다.

허물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니 체직할 필요는 없다"

 

중종은 신용개의 탄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품위 손상을 굳이 허물이라고 한다면 술 마시는 것을 삼가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대간들은 신용개의 호주를 더는 거론하지 않았다.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공론을 일으킬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는 죄는 명분을 내세우기에도 너무 약한 것이었다.

 

 

신용개는 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난을 일으킨 공로로 영의정까지 오른 신숙주의 손자이며 신숙주는 세조 이후 여러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고, 그의 아들 신면은 함길도 관찰사로 재직 중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을 때 죽었다.

 

신면은 난군이 들이닥치자 갑자기 대처할 방법이 없어서 대청 위에 있는 작은 다락 틈에 몸을 숨겼고 이시애의 부하들이 샅샅이 수색했으나 신면을 찾지 못하고 가려 할 때 소리(小史 : 아전) 그가 숨은 곳을 가르쳐주었다.

 

신면은 결국 이시애 앞으로 끌려가 반군에게 죽음을 당했고, 신용개는

 

"아버님이 역적의 손에 돌아가셨으니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라고 다짐했다.

 

나이 90에 아들을 얻은 홍유손(어우야담)

 

신용개는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전해 듣고 어릴 때부터 복수를 맹세한 그는 성품이 활달하고 재물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성종과 중종 시대의 기인이자 죽림칠현으로 불리는 홍유손과 친교를 맺고 여러 번 함길도에 가서 그 아전의 얼굴과 이름을 자세히 알아두었다.

 

"공의 원수가 도성으로 온다고 한다."

 

하루는 홍유손이 신용개에게 원수가 도성으로 온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신용개는 홍유손과 함께 원수가 유숙하는 주막으로 달려갔다.

 

홍유손이 원수를 불러 관청의 일을 묻는 체할 때 신용개가 뒤에서 원수를 도끼로 찍어 죽였다.

 

그러나 원수와 동행한 사람은 그가 누구에게 죽음을 당했는지 전혀알지 못했다.

 

신용개는 마음이 간사하지 않고 너그러우면서도 솔직하여 대절大節)을 지키고 세목(細木)을 따지지 않았는데, 집에 있어서나 나라에

벼슬을 하거나 안팎이 한결같았다.

 

묘당에 들어가서는 강기(綱紀,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인 삼강오륜과 기율)만을 제기하고 절목(絕目,세부 조항)은 따지지 않았으며, 경연에서는 중론이 혼잡하게 나오면 늘 공이 홀로 의리를 들어 한 마디로 결단하였다.

 

평생에 명예나 행실에는 구구하게 얽매이지 않았으며 성색(聲色, 음악과 여자을 좋아하는 버릇)이 자못 있었으나 남들이 이를 흠잡지 않아서 물망이 절로 높았다.

 

 

<조선왕조실록>의 <졸기>에는 신용개가 성색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도 바른 정치를 하고 탐욕스럽지 않아 비난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해지는데 사람이 평생 살면서 비판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는 큰일만 결단하고 사소한 일들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으며 명예나 행실에도 초연하여 일생을 호방하게 살았다.

 

호방한 사람 주위에는 호방한 벗들이 있다.

 

신용개는 평생을 벗으로 사귄 지인들이 많은데, 판중추부사를 지낸 최숙생이 그러한 사람이다.

 

최숙생은 1457년세조 3년에 태어나 1492년 성종 23년에 진사로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 유능한 문신을 뽑아 휴

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일)를 마친 뒤 수찬, 지평, 헌납 등 청직을 두루 역임했다.

 

 

1504년 연산군에 의해 유배되었다가 중종 반정으로 풀려나 대사간과 대사헌을 지내고 우찬성까지 올랐으며 기묘사화로 파직된 후 《충재집,盅齋集》을 남기고 죽어 영의정에 추증된 강직한 문신이다.

 

신용개가 병조판서일 때 휴가를 청하여 호(湖西)로 가다가 천안군에서 관비 사덕(四德)이란 여자와 동침을 하였는데 이때 최숙생이 충청관찰사로 있었는데, 사덕을 대신하여 속필(速筆) 계(啓, 관청이나 벼슬아치가 상관이나 임금에게 올리는 글)를 지어 신용개에게 바쳤다.

 

"천안의 관비 사덕은 삼가 두 번 절하고 병조판서 나리께 아룁니다.

하늘의 기운은 아래로 내려오고 땅의 기운은 위로 통하여 두 뿌리가 서로 밀치매 이것이 변하여 정액(精液)이 되었습니다.

비록 상국과 천비의 신분이 높고 낮은 것은 하늘과 땅과 같으나 두 몸이 하나가 되었을 때, 진실로서로 좋아하여 밀착하니 간격이 없

었습니다."

 

최숙생의 계는 절묘하게 외설스러우면서도 풍자적이었는데 천기와 지기가 합하여 정액이 되고, 남녀가 꼭 끌어안아 하나가 된 정경을 묘사한 것이다.

 

장관급의 신용개가 가장 천한 관비와 동침하는 것을 희롱하면서도 천박하게 표현하지 않았다.

 

"삼가 생각하건대, 상국 각하께서는 활 쏘는 재주가 묘하여 버들잎을 뚫고, 웅장한 양경(陽莖)의 힘은 수레바퀴를 꿰었습니다."

 

여불위

 

웅장한 양경은 중국 진시황 때의 태후 조비를 유혹하기 위해 여불위가 성기로 수레바퀴를 돌렸다는 노애를 찾아내어 정부로 들여보낸 고사를 빗댄 것이다.

 

신용개의 음경이 수레바퀴를 꿰었다는 말도 근엄한 조선 시대에는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헌칠하기는 군계일학이요, 용맹하기는 인중지입니다. (중략)밤중에 두 번 방사한 것을 생각하니 실로 천고에 만나기 어려운 인연이었습니다. "

삼가 바라건대, 상국 합하께서는 정력이 더욱 왕성하고 영근(음경)이 더욱 튼튼해져서 피리와 노래로무미건조한 생활을 하지 마시고, 동산의 거문고와 퉁소로 길이 풍류를 즐기는 재상이 되소서".

 

최숙생은 신용개를 한껏 치켜세운 뒤에 관비와 두 번이나 방사한 것을 거론하는 것도 모자라, 정력이 왕성하고 음경이 더욱 튼튼해져서 성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라고 축원하고 있다.

 

이러한 계는 조선 시대 어떤 문집에도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노골적이지만 천박하지 않다.

 

남녀상열지사는 아름다운 것이다.

 

겉으로 군자인 체하면서 속으로 색을 탐하지 말고 마음껏 즐기라는 최숙생의 축원에서 조선의 유쾌한 해학을 엿볼 수 있는데, 최숙생이 지은 계를 읽은 신용개는 호탕하게 웃고 탓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사덕과 최숙생을 불러 대취하도록 마셨는데, 그날도 일어나지 못했다.

 

 

마음속에 불평스런 생각이 있으면 취하도록 술을 마셔 혹 정신을 잃고 거꾸로 실려 가기도 하였는데, 사람들이 '헐후한 재상'이라고는 하였으나 그 속에 반드시 무슨 비난의 뜻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실록에 술을 마시면 정신을 잃고 거꾸로 실려 간다고 기록했을 정도니 얼마나 술을 좋아했는지 알 수 있다.

 

영의정 정광필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또한 최숙생만큼이나 신용개의 절친한 벗이었으며 신용개와 정광필은 문경지우와 같은 교분을 나누었다.

 

정광필은 1462년세조 8년에 태어나 1492 년성종 23년에 진사에 오르고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직제학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다.

 

연산군이 사냥을 너무 자주 다닌다고 직간을 올렸다가 아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 후 부제학에 올랐고, 예조판서와 대제학을 거쳐 전라도 도순찰사가 되었으며, 삼포왜란을 수습한 공로로 병조판서에 올랐다.

 

이어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으나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구하려다 영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가 1527년 다시 영의정에 오른 인물이며 저서로는 '정문익공유고(鄭文翼公遺稿)'가 있다.

 

“경에게 벗이 있느냐?"

 

하루는 정광필이 어전에 입시하자 중종이 물었다.

 

“신은 친구가 없고 오직 신용개 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정광필이 머리를 조아리고 대답했다.

 

"경이 진정으로 마음을 줄 수 있는 벗은 누구인가?"

 

신용개가 입시를 하자 중종이 같은 말로 물었다.

 

"정광필이 신의 벗입니다."

 

신용개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경들은 '지기지우(知己之友)'라고 할 만하도다.”

 

중종이 두 사람의 교분에 감탄하여 말했다.

 

신용개는 천품이 호탕하고 술을 좋아하여 때로는 늙은 계집종을 벗 삼아 서로 큰 잔을 기울여 취할 때까지 마셔 쓰러진 뒤에야 그만두기도 했는데 늙은 계집종이 그 집에서 유일하게 신용개와 대작할 수 있을 정도로 술을 잘 마셨기 때문이었다.

 

조선 선비는 벗을 소중히 했으며, 특히 사군자는 그들의 벗 중 으뜸이었다. 눈길을 달려와 지긋이 마주한 두 선비의 애틋함이 묻어나는 <설중방우도>, 조영석 작

 

사군자는 선비들의 벗으로 불린다. 그중에 국화는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고 하여 절개의 상징이다.

 

신용개는 국화를 좋아하여 국화 여덟 분을 정성 들여 키웠고 가을이 되자 활짝핀 국화를 신용개가 대청 가운데 들여놓으니 높이가 대들보에 닿았다.

 

그는 국화 향기를 사랑하여 틈만 나면 완상하면서 그 향기를 맡았다.

 

"오늘은 가객佳客 : 좋은 손님 여덟 분이 오실 것이니 좋은 술과 안주를 마련해놓고 기다려라."

 

하루는 신용개가 집안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 집안사람들이 부지런히 술과 음식을 준비했으나 해가 저물어도 손님이 오지 않았다.

 

"대감, 손님이 언제 오십니까? 술상을 벌써 준비해놓았습니다."

 

집안사람들이 신용개에게 물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신용개는 조금도 조바심을 내지 않고 사랑에서 책만 읽었는데 이내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밤이 왔다.

 

둥근 달이 동천에 떠올라 교교한 달빛이 대청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자 국화는 송이송이 더욱 난만하고 달빛은 청량했다.

 

국화는 절개의 상징으로 조선 선비들의 로망이었다. 신용개 또한 국화를 사랑하여 달 밝은 밤, 술상을 가운데 두고 국화와 대작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들국화>, 정조 작

 

신용개가 그제야 술을 내오라 하고 국화 여덟 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이 나의 좋은 손님들이다.”

 

신용개는 국화 분 앞에 각각 주안상을 차려놓았다.

 

“내가 은도배(銀桃杯)에 술을 따르리라."

 

신용개는 국화분 하나를 상대로 술 두 잔씩, 모두 열여섯 잔을 대작하기 시작했다.

 

집안사람들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달빛 그윽한 대청에서 국화와 함께 술을 마시는 신용개를 뒤로하고 물러났다.

 

 

중국의 8대 기서로 불리는 포송령(蒲松齡) 요재지이(聊齋志異)에 노란 국화 정령이 등장한다.

 

국화의 정령이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가난한 선비를 부자로 만들어 평생을 함께 살기로 했지만, 그러나 부득이하여 정령은 국화로 돌아간다. 

 

《요재지이》에 나오는 국화의 정령 황영에 대한 이야기에서 살필 수 있듯이 국화는 많은 선비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신용개의 대청에는 사람 키보다 큰 국화 분이 여덟 개나 되었다. 

 

그 국화 분에서 풍기는 그윽한 향기와 맑고 깨끗한 여인을 닮 은 국화와 마주하면 누구라도 취흥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중종 35년 4월, 좌의정 신용개가 병을 이유로 차자를 올려 사직을 청했을 때의 일이다.

 

"근래에 대신들이 더러는 병, 더러는 다른 일 때문에 서로 잇달아 사직하여 내가 매우 편치 못하니 경은 사직하지 마라."(ㅋㅋㅋ)

 

중종은 신용개가 사직을 청하자 윤허하지 않고 술을 하사했는데 사직하려는 대신에게 술을 하사하여 만류하는 것은 역사에

드문 일일 뿐만 아니라, 신용개가 얼마나 술을 좋아했는지 알 수 대목이기도 하다.

 

술한잔 걸친 선비가 말을 타고가다 졸았는지 낙마하는 찰나, 시종이 황급히 달려간다. 이 우스꽝스런 광경에는 풍류를 즐기던 조선 시대 선비들의 일상이 유쾌하게 담겨 있 다. <낙마도> &nbsp;윤두서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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