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하고 호탕한 우리의 조상들

송도 기생(妓生) 설매(雪梅)

MeRCuRyNim 2023. 6. 8. 04:40
728x90

후원의 기생 놀이 풍경을 담은 <청금상 련, 부분, 신윤복작, 간송미술관 소장

왕씨도 섬기고 이씨도 섬기는


대감이야말로


※노류장화(路柳墻花)가 아니더냐


- 송도 기생 설매 -


조선의 풍속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생이다. 

 

남자에게 술과 웃음을 팔기 위해 제도적으로 만들어진 신분이다 보니 그에 따른 애환과 이루지 못할 사랑 때문에 몸부림친 여인이 적지 않다. 

 

※ 조선 시대의 기생은 아무나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이라는 뜻으로 노류장화라 했으며 이 남자 저 남자 품을 떠돌며 애환을 쌓는 게 그들의 인생이었다.

 

기생은 양수척(楊水尺: 후삼국과 고려 시대에 떠돌아다니며 사냥을 하거나 고리를 결어 팔던 무리)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나 문헌 속에 뚜렷하게 등장한 것은 고려 건국 이후이며 조선 시대에는 제3의 계층을 이룰 정도로 많은 여자들이 기생으로 생활했다.


기생은 연회를 돕기 위해 가무를 제공하는 입부기(立部伎)와 술자리 시중까지 드는 좌부기坐部妓로나뉘며 조선 후기에는 기생의 등급이 일패, 이패, 삼패로 분류되기도 했는데 일패는 기생, 이패는 은근짜(隱君子), 삼패는 탑앙모리(搭仰謀利)라고 불렀다. 

 

기생은 가무를 익혀 국가와 상류사회의 각종 연회에 참석하던 관기의 전통을 계승했으나, 집에서 사사로이 접객을 하여 돈을 벌기도 했다. 

 

이패는 기생보다 수준이 떨어지지만 대체로 기생 출신이 많았는데 그들을 은근짜라고 부른 것은 남몰래 은근하게 매춘을 했기 때문이다.


삼패는 매춘 자체가 직업으로, 흔히 작부라고 부르는 여인이며 가무를 하는 일패의 기생이나 술자리 시중을 들고 몸을 파는
삼패의 작부나 사내들의 유흥을 돕는 신분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선비에게 기생은 노류장화에 불과했으나, 기생에게 선비는 목숨이었다. 

 

기녀 생활을 하다가 선비의 첩이 되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기생들이 선비에게 선택되어 신분상승의 꿈을 이루려고 했다. 

 

명대(明代) 화가 사환(謝環)의 <금기서화도( 琴棋書畵圖)> 수권( 手卷 )

 

이들은 조선의 지배층인 선비의 노리개가 되기 위해 교방에서 금기서화(琴棋書畵 : 속세를 떠난 경지에서 거문고, 바둑, 글씨, 그림을 즐기는 것을 다룬 동양화 화제)를 익히고 학문을 배웠다. 

 

그러한 기생들 중에는 당대의 내로라하는 선비보다 학문과 지조가 월등한 여인도 많았는데 조선 초기 송도의 유명한 기생 설매도 그러한 여인 중 한 명이다. 


설매는 악사(樂詞: 시를 노래하는 것)를 잘해서 송도에서 명기로 이름이 높았다. 

 

개국공신 조준( 趙浚)

개국공신 조준(趙浚)이 처음으로 재상에 오르자, 모든 국가 원로들이 그를 축하하기 위해 서쪽 교외에서 연회를 열고 기생들을 불렀는데 송도 제일의 명기 설매도 연회에 불려 가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술자리가 무르익기도 전에 대궐연회에 참석하라는 영이 내려졌고 그 자리에 참석한 대신들이 다투어 축하하며 설매에게 악사를 청했다.


서쪽 동산에서 꽃놀이가 아직 하지 않았는데

 

西園未罷看花會


임금님의 영이 내려 상양에서 연회를 즐기게 되었도다


又被宣招宴上陽

 

설매가 고운 목소리로 악사를 읊자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찬탄했다. 

 

상양은 임금님이 계신 궁궐 뜰을 말하는데 설매는 어느 장소에서든 즉흥적으로 악사를 지을 정도로 문재가 출중했다.

 

하륜( 河崙)


얼마 후 하륜(河崙)이 서도(西道, 평안도)의 순찰사가 되어 도성을 떠나자 성문 밖에 장막을 치고 고관들이 모여 전송했는데 이 자리에서도 설매가 악사를 읊어 흥을 돋웠다.


그대에게 다시 술 한잔을 권합니다

勸君更進一杯酒


서쪽으로 양관을 나서면 술 권할 사람도 없을 것이니

西出陽關無故人

 

 

설매의 노래에 하륜을 전송하던 고관대작들이 무릎을 치면서 칭송했는데 이는 조선 중기의 학자 권별(權鼈)이 지은《해동잡록(海東雜錄)>의 기록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신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을 때의 일이다. 

(조선을 건국한 공신들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고려 왕조의 신하들이기도 했다)

 

임금이 베푼 잔치라 많은 기생들이 참석하여 춤과 노래로 한껏 흥을 돋우고 있었는데 기생들 중에서 한 여인이 유달리 자태가 빼어나고 아름다워 뭇 남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너울너울 춤을 출 때는 요염한 기운까지 느껴져 대신들이 넋을 잃고 있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한 정승이 기생을 불러서 그윽한 눈매를 살피며 물었다. 

 

한 떨기 아름다운 꽃처럼 그녀는 나부시 절을 하며 대답했다. 


“설매라고 하옵니다."


“눈 속에 핀 매화라····…… 이름처럼 용모 또한 아름답구나."


"감사합니다."


"듣자니 기생은 아침에는 동쪽에서 밥을 먹고 저녁에는 서쪽에서 잠을 잔다(家食西家)고 하는데, 오늘 밤 이 늙은이에게 수청을 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정승은 설매가 보잘것없는 기생이라고 생각하여 거들먹거렸는데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개국공신이니 기생을 하찮게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의 화술은 상대방의 상처를 건드렸고 설매의 눈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비수가 되어 날아왔다.


“동쪽에서 밥을 먹고 서쪽에서 잠을 자는 것은 노류장화의 본분입니다. 

 

왕씨(王氏)도 섬기고 이씨(氏)도 섬기는 대감과는 유유상종이 아니겠습니까? 모시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설매의 가시 돋친 대답에 정승은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들지 못했고, 좌중은 갑자기 숙연해졌는데 고려왕조왕씨를 섬기던 대신들이 부귀영화를 위해 이씨를 섬긴다는 설매의 반격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이다.


조선을 창업할 때 이성계 일파는 고려의 많은 충신들을 살해했다. 

 

우왕과 창왕까지 신돈의 아들이라고 하여 귀양을 보낸 뒤 살해하고, 왕씨 성을 가진 고려 왕족들을 강화도 앞바다에서 수
장했을 때 고려 백성은 안타까워하고 비통해했다.

 


정재륜鄭載崙은《한거만록閑居漫錄》에서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고 기록하여 설매의 한마디에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토로하고 있다. 

 

정승의 '동식서가숙' 운운은 상대방을 야유한 것이지만, 설매의 반격은 조롱이어서 격조를 달리한다. 

 

설매는 기생이라고 업신여기는 개국공신을 촌철살인의 기지로 통쾌하게 반박한 것이다.

728x90

'유쾌하고 호탕한 우리의 조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정한 야인 김시습  (0) 2023.06.18
방랑 시인 김삿갓  (3) 2023.06.14
신용개(申用漑)  (4) 2023.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