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 양

고대문명의 심볼-기원을 찾아서

MeRCuRyNim 2023. 5. 24.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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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문명에 있어 상징(심볼-symbol)이란 것은 표식, 소리, 말, 문자, 그림 등을 포괄하는 사회구성원 간
의미 전달의 매개체로서 숫자와 수식기호 그리고 언어도 하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인류문명은 수많은 상징들과 불가분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흥미가 있는 것은 여러 상징 중에 인류역사상 거의 모든 문명, 국가, 문화, 사회, 민족, 종교 등을 초월해
범세계적으로 사용되어 왔던 것이 존재하는데

그 대표적 심볼 중의 하나가 바로   스와스티카(swastika-만)이다.


이 부분에 대한 자료가 상당히 방대한 이유는 아주 오래전부터 세계 각국의 많은 학자들에게 있어 매우 흥미로운 주제였기에 발표된 자료도 엄청나며
상징학이라는 한 분야만으론 단순하게 정의될 수 없는
포괄적이고 다양한 분야의 전문성을 함께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주제는 특정 신앙의 관점이나 문화관습적 신념과 매우 밀접하게 작용한다.

스와스티카(만)를 보면 증오와 대량 학살로 대표되는 나치의 상징이 떠오르며 또 하나는 불교나 힌두교 등의 종교적 상징을 떠올리게 된다.

동일한 상징을 놓고 하나는 증오와 학살이라는 악의 이미지로 또 하나는 행운과 행복이라는 선의 이미지로 받아들여지는 이 극단적 대조는 매우 이례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나치의 스와스티카에 대한 부정적 기억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이 표식은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백인우월주의, 인종주의, 반유대주의 등의 혐오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잘 사용되지 않고 있다.

실제 ‘스와스티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불교나 힌두교의 상징을 보고 히틀러의 표식이나 악마의 표식이라는 잘못된 수식어까지 붙이고 있다.

하지만 이 표식이 본디 나치의 상징 또는 부처의 상징 이전에 그 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전 인류역사 과정에서 빈번히 사용되어 왔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에게 덧씌워진 이 불편한 고정관념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스와스티커와 나치와의 연관성


나치의 스와스티커는 나치의 아리안 민족우월주의 이론정립을 위한 도구로서 고대로부터 전 세계 문명권에서 공용으로 사용되어 온 이 스와스티카(만) 심볼을 차용한 것으로써 아리안 민족이 우월하다는 생각조차 실상은 허구라고 할 수 있다.

아리안 민족우월주의 역사는 독일의 고고학자였던 하인리히 슐리에만(Heinrich Schliemann)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어린 시절 목사였던 아버지로부터 고대 호메로스의 설화를 들으며 자랐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 설화가 미신이나 신화라고 믿었지만, 그는 그 설화가 진실된 것이라 믿었고 언젠가 성인이 된 후 기회가 된다면 설화와 관련된 유적을 발굴하겠다는 고고학자의 꿈을 품게 된다.


상업을 통해 성공한 후 충분한 자금력을 확보한 그는 1868년 마침내 어린 시절의 꿈이었던 트로이 유적을 발굴하기 위해 터키 히사를리크라는 언덕으로 달려가 첫 발굴을 하게 된다.

간절한 그의 소망을 설화 속의 신들이 들어준 것인지
그곳에서는 많은 양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슐레이만은 금화가 묻혀있던 지층보다 더 깊게 파 내려가는 바람에 고대금화를 많이 발견하지는 못했다.

슐레이만의 노력으로 인해 모두가 신화로만 생각했던
호메로스 설화가 트로이의 유물들로 인해 그것이 진실로 밝혀진 것이다.

이후 슐레이만은 트로이 시대보다 훨씬 이전인 기원전 14세기 유물까지 발견하게 된다.

그의 고대유물에 대한 발굴은 그리스에서도 계속되었으며 그의 이러한 열정은 당시 대부분의 서양문명의 시발점이 그리스 문명이라고 믿고 있던 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다 주었고 그리스 문명보다 훨씬 이전에 찬란한 에게 문명의 존재에 대한 고고학적 업적을 남긴다.


슐레이만은 트로이 유적지 발굴과정에서 스와티카(Swastika)의 상징을 발견했고 이를 근거로
고대 인도 - 유럽인의 이주를 연관시켰다.

그는 독일의 고대 화분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한 모양을 스와스티카와 연관 지었고, 게르만계, 그리스계, 인도 - 이란 문화를 연결하는 '오래전 조상들의 중요한 종교적 상징'이라고 이론화시켰다.


슐레이만의 이론은 곧 보리키쉬(독일민족주의-volkisch) 운동과 얽히게 되는데, 이는 알프레드 로젠버그(Alfred Rosenberg)와 같은 이론가들에 의해 북유럽에서 노르딕 북방민족 즉 '아리아 인종' 우상화가 태동하는 계기가 된다.

슐레이만이 트로이 유물에서 발견한 스와스티카는 트로이나 에게문명만이 아닌 전 세계 문명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된 것임에도 그것을 자신의 조상인 아리안 민족의 기원으로 주장했다.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증거로서 스와스티카 상징을 내세웠던 것이다.

그것이 의도적이었는지 아니면 지식의 편협함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만약 그가 전 세계 곳곳을 더 돌아다니며 계속 발굴을 했더라면 그런 단편적 주장을 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세계 곳곳의 수많은 유적지에도 스와스티카가 심볼이  발견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위의 그림처럼 다양한 문화권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렇게 단편적이고 궁색한 아리안 민족과 스와스티카의 연계설은 훗날 나치의 민족우월주의의 사상적 토대가 됨으로써 인류에게 엄청난 불행을 야기시키게 된다.

독일 중세시대의  프로이센 민족기사단도 위와 같은 스와스티카를 심볼로 사용했다.

훗날 이 민족기사단은 20세기에 다시 부활하여 나치당의 모태가 되는데 스와스티카가 세계 곳곳의 많은 문명에서 워낙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기에
어린 시절의 히틀러도 우연히 그것과 조우하게 된다.

히틀러는 어린 시절 오스트리아의 람바흐(Lambach-am-Traum) 수도원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그 수도원의 네 구석에 새겨진 만자(swastika)를 그때 처음 접하게 된다.

그것은 히틀러가 수도원에 머무르기 오래전 이곳의 성직자이자 대목장이었던 테오도리치 하겐 (Theodorich Hagen)의 명령에 따라 조각된 것으로써
그는 점성술과 신비로운 과학현상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지닌 인물이었다.

성서 요한의 신약 전서와 Cathars와 Bogomils를 포함한 몇몇 다른 중세 이교에 대한 전문가이기도 했던 그는 1856 년 페르시아, 아라비아, 터키, 코카서스 등 근동 지역을 오랫동안 방문했다.

그때 수많은 스와스티카 표식을 접하게 되었고 이후 1868년 람바흐 수도원으로 돌아오자마자
건물의 네 구석에 있는 만자 (swastika)를 조각하게 된다.

젊은 히틀러가 Lambach 수도원에 머무르고 있었을 때 하겐 신부는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지만
그가 새긴 벽면의 스와스티카는 남아있었다.

당시 히틀러가 수도원에 있는 동안, 란쯔(Lanz Liebenfels)라는 수도사도 그곳에 머물렀는데 그는
수도원 도서관에서 하겐의 개인 논문을 철저히 연구했다.

그 후 란쯔는 비엔나로 돌아와 1907 년 12 월 25일 비밀결사대인 새로운 민족기사단(New Templars)을 설립한다.


민족기사단 상징 노란 깃발과스와스티카.

결국 쉴리만의 스와스티카 발견과 알프레드 로젠버그와 같은 민족주의 이론가, 그리고 란쯔에 의한 민족기사단이 출범하면서 스와스티카는 나치 태동 이전부터 독일 민족주의 운동 (Volkische Bewegung)
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이 즈음에 독일 청소년운동인 Wandervogel의 상징으로도 사용되었으며 이때부터 스와스티카는 아리안 인종의 공식 엠블럼이 되었다.

그들은 스와스티카를 하켄크로이츠라고 명명하고 칼과 함께 그들의 상징으로 삼았어.

1918년 8월 18일 루돌프 폰 제보텐도르프 남작(Rudolf von Sebottendorf)에 의해 게르만기사단의 뮌헨 지부로 설립된 것이 툴레 협회인데  아리아인 민족주의와 신비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비밀결사로서
이들이 주축이 돼서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당 이른바 나치당이 창설된다.

이때에도 역시 그들의 상징은 스와스티카였다.

1920년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당은 자체 휘장과 깃발을 필요로 한다'라고 주장했으며 이 새로운 깃발은 '포스터처럼 매우 효과적'일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투쟁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드디어 1920년 8월 7일, 잘츠부르크 총회에서 하얀색 원과 검은색 만발한 붉은 깃발이 나치당의 공식 상징이 되었다.


히틀러는 그의 자서전인 ‘나의 투쟁’에서

"국가 사회주의자로서, 우리는 우리의 계획을 우리의 깃발에서 본다.

우리는 붉은색으로 사회적 혁명의 아이디어를, 흰색에서는 민족주의적인 생각을, 그리고 스와스티카는 우리 아리아인의 승리를 위한 투쟁의 사명이며
이것은 창조적인 일에 대한 사상의 승리다”

라고 하며 반 셈족(반 유태인) 사상을 주장한다.


또 그는

"그것은 영광스러운 과거에 대한 우리의 경의를 표현하고 과거 독일 국민에게 영예를 가져다준 색이다”

라고 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1차 세계대전까지만 해도
독일은 스와스티카 심볼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독일의 표장은 아이언크로스(철십자)를 사용했다.

오히려 미국과 자유진영에서 긍정적 의미로 이 스와스티카를 폭넓게 사용했는데 종종 담배 케이스, 엽서, 동전 및 건물을 장식하는 일반적인 상징으로 사용했다.

제 1차 세계 대전 동안 미국 제 45 사단의 어깨 표장

1936년 코카콜라가 판촉을 위해 배포한 스와스티카 악세사리

1908 Yukon Oklahoma USA 행운의 상징 Swastika 엽서

당시 미국의 다른 주에서 사용되었던 상징

1908년 샌프란시스코 보이즈 스와스티카 농구팀

미국 콜로라도 강에서 건설된 최초의 댐인 아리조나 yuma에 있는 라구나 브리지 (Laguna Bridg)의 장식

당시 히틀러와 나치 이론가들은 스와스티카 상징이 사실은 지구상 모든 문명권에서 사용되어 왔으며
그 기원이 동일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상징이 세계 공통적으로 사용되었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받아들여지게 된다면 자신들이 내세운 선민 아리안 혈통의 우월성이 정당화되지 못하므로 진실을 감추었고, 그 심볼이 오로지 아리안들만의 상징이라 주장하며 반유태인 사상을 확산시켰다.

그런데  유태인들도 그 상징을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하고 있었다.

고대 아리안들은 실제 인도 지역에서 수천 년간 거주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나치주의자들은 서구문명을 이끌었던 고대 문명의 후손이 바로 자신들 아리안들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당시 나치당의 핵심 사상 리더 중 한 명인 Savitri Devi(실제로 Maximiani Portas라는 원래 이름을 가진 프랑스 여성)는 히틀러가 힌두 신인 Vishnu의 현세 아바타라고 주장하며 그를 우상화시켰다.

당시 나치는 스와티카 상징 외에도 철십자가 와, 독수리를 같이 사용했는데 이는 나치당의 모태였던
툴레협회와 신민족기사단 그리고 그 이전인 프로이센 민족기사단의 상징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나치는 그렇게 독일인들을 민족주의로 결집시켜 한동안 유럽을 휩쓸었지만 결국 그들의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히틀러의 나치가 사라진 지 7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유럽인들의 뇌리 속엔 '스와스티카 = 나치'라는 인식이 트라우마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쉽사리 이 심볼을 사용하지 않는다.

아래 그림은 전 세계 각국에서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고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사례이다.

그렇다면 과연 스와스티카의 기원은 어디서부터일까?

4대 종교가 태동하기 훨씬 이전부터 거의 모든 국가에서
동일하게 사용된 이유와 그리고 스와스티카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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