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 양

WORLD WAR(4부)-In To The Fire

MeRCuRyNim 2023. 5. 9.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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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데텐지방을 무혈로 얻은 히틀러의 지지율은 급상승한다.

그리고 다시는 침공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히틀러는 6개월 후 체코슬로바키아 전체를 점령한다.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계획을 세운다.

베르사유조약 당시 연합국에게 빼앗긴 폴란드 일부지역은 마땅히 독일의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폴란드를 점령하고 유럽정복을 계속하려면 소련을 중립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히틀러는 스탈린에게 제안을 한다.

히틀러의 제안은 양국 간에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폴란드 영토를 분할해서 나눠갖자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히틀러의 솔깃한 제안을 받아들인다.

양국 간의 조약으로 세계는 충격에 빠진다.

스탈린 문제를 해결한 히틀러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은 폴란드를 침공한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독일군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전투방식을 선보이는데 바로 전격적이었다.

한마디로 속전소결로 적의 약점을 파고드는 것이었다.

나치군이 서쪽에서 침공한 지 2주 후 동쪽에서는 스탈린의 붉은 군대가 밀려 들어왔다.

독일군과 소련의 협공으로 폴란드는 함락됐다.

이로써 히틀러는 세계정복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처칠의 악몽은 현실이 됐다.

나치세력과 공산세력이 손을 잡은 것이다.

그간 처칠이 경고해 왔던 바로 그날이 오고 만 것이다.

1939년 9월 3일 체임벌린 총리는 선전포고문을 서명한다.

영국을 포함한 연합국은 히틀러와 스탈린의 도발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체임 벌린 총리는 전쟁을 선포한 후에도 7개월이나 히틀러에 진격을 저지하는데 소극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이 기간은 후에 '전투 없는 전쟁'으로 불리며 조롱받게 된다.

이러한 대책 없이 답답한 체임벌린의 소극적 태도는 독일에게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셈이다.

답답한 체임벌린에게 단단히 화가 난 처칠..

히틀러는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하여 그 땅을 점령하였다.

상황을 감당키 어려웠던 체임벌린 총리는 결국 사퇴한다.

1940년 5월 10일 윈스턴 처칠이 영국의 새로운 총리로 임명되었다.

1940년 5월 10일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한다.

독일군을 막는 프랑스군 중에는...

기갑사단의 사령관 샤를 드골이 있었다.

독일군은 프랑스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마지노선을 우회하여 계속 진격했고,

결국 마지노선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히틀러의 전격전으로 인해 프랑스군은 완전히 제압당해 버렸고 백만명의 병력과 탱크 1500대가 영국해협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그런 와중에도 샤를 드골의 기갑사단은 막강한 독일군에게 대항하는 저력을 입증해 보였다.

드골은 프랑스군 중에 유일하게 독일을 상대로 승전보를 울렸다.

프랑스에 있던 영국의 원정군이 덩케르크 해안에서 포위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제 막 총리 자리에 오른 처칠은 그들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처칠은 대규모의 함대를 보내어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병력을 포함한 총 33만의 병사들을 영국으로 수송한다.

히틀러는 1918년 독일이 항복을 선언했던 바로 그 열차에서 프랑스가 항복선언문에 조인하게 함으로써
마침내 지난날의 수모를 갚고야 만다.

독일이 1차 대전에서 하지 못했던 일을 히틀러는 단 6주 만에 끝내 버렸으며, 프랑스의 점령과 동시에 벨기에와 네덜란드까지 점령했다.

히틀러는 이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은 것이다.

런던으로 피신한 샤를 드골은 모병 방송을 통해 독일에 맞서 싸울 자유 프랑스군을 창설하게 된다.

그는 프랑스 영웅으로 등극한다.

처칠은 하원 의사당에서 영국국민들 향해 연설을 시작한다.

처칠의 연설은 국민들의 환호를 받는다.

히틀러는 영국의 수도 런던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

영국은 세계최강의 해군을 보유한 나라였고 침공을 예상한 처칠은 영국의 연안일대를 함대를 이용해 요새화하였다.

독일해군이 영국해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던 히틀러였지만,  그에게는 7년 동안 양성한 대규모의 공군부대,

루프트바페가 있었다.

히틀러는 루프트바페의 출격시켜 전략적 폭격 전을 펼친 후 처칠을 굴복시킬 심산이었다.

당시 런던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도시였고, 900만 명의 시민들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대도시의 수많은 시민들 중 어느 누구도 곧 벌어질 재앙을 예상하지 못했다.

1940년 9월 7일 런던의 60%이상이 처참하게 파괴된다

런던 전역에 걸쳐 200만 가구가 소실되었고,

갈 곳을 잃은 시민들은 피난처를 찾아 지하철로 모여들었다.

처칠은 이 광경을 보았고,

시민들을 격려하고 위로하였다.

처칠은 영국 해군에서 공군으로 눈을 돌린다.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더 작고 빠른 전투기를 대량 생산하는데 집중하도록 하였다.

이후 3개월 동안 런던의 하늘에서는 역사상 가장 큰 공중전이 펼쳐진다.

최신기종의 영국 전투기가 3천대에 가까운 독일의 전투기를 격추시켰고, 마침내 독일군은 퇴각했다.

영국은 미국 도움 없이 자국의 힘으로 독일을 물리쳤다.

처칠은 히틀러에게 처음으로 참패를 안겨주게 된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중국을 침공한다.

일왕은 새로운 총리를 임명하는데

그의 이름은 도조 히데키.

일본은 아시아 정복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전략적 요충지에 작전기지를 설립해야만 했다.

그곳은 바로 필리핀이었다.

하지만 필리핀은 미국령에 놓여있었다.

일본 해군이 필리핀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자 루스벨트는 즉각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맥아더를 사령관으로 임명한 후 그를 필리핀으로 보냈다.

루스벨트는 이작전의 적임자가 맥아더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시아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은 200만이 넘었지만 맥아더의 병력은 고작 2만 2천 명에 불과했다.

만약 일본이 공격해 온다면 맥아더의 부대가 승리는 고사하고 버틸가능성 조차 희박하다는 것을 루스벨트는 알고 있었다.

별다른 장애물 없이 순조롭게 유럽을 정복해 오던 히틀러는 영국을 공격하던 과정에서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하지만, 영국과의 전투에서 패한 뒤에도 히틀러의 자만감은 커져만 갔다.

그리고 나치의 군사력은 어느 누구와 상대하더라도 이길 수 있을 만큼 강하다고 믿기 시작했다.

그 상대가 스탈린이라 할지라도...

1941년 여름 히틀러는 소련을 침공한다.

스탈린은 갑작스러운 독일군의 침공 속보를 듣고 몹시 당황스러워했다.

하지만  스탈린 역시 히틀러로부터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전쟁을 원한다면 상대해주겠다는 생각이었다.

히틀러의 나치군은 모스크바의 관문까지 진격해 온다.

스탈린이 수도를 등지고 도피해야 할 상황까지 히틀러의 손길이 뻗치기 시작했다.

일본은 필리핀을 공격할 수 있는 거리에 병력을 배치하였다.

루스벨트는 이를 두고 일본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에 대한 금수조치를 단행했다.

일본에 대한 석유수출을 중단해서 일본경제에 타격을 줄 계획이었다.

도조 히데키는 이에 대한 신속한 대처가 필요했다.

일본은 미국을 설득하기 위해 외교단을 보내는 등의 노력을 하였다.

일본은 새로운 석유조달을 방법을 찾으려고 애썼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필리핀을 경유해야만 했다.

1941년 12월 7일 마침내 일본군의 대대적인 선제공격이 시작된다.

치명적인 대형폭탄 수천 발을 적재한 수백 개의 전투기가 대양을 가로질러 출격한 것이다.

그들의 임무는 단 한 번의 공격으로 해군기지에 주둔 중인 미 태평양 함대를 섬멸해 버리는 것이었다.

일본이 목표로 한 해군기지가 위치한 곳은 바로...

'진주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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