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 양

WORLD WAR(6부, 최종화)-세계의 평화

MeRCuRyNim 2023. 5. 19. 15:42
728x90

처칠과 루스벨트는 연합국이 전쟁을 이기기 위해서는 스탈린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43년 11월 28일 루스벨트와 처칠은 스탈린에게 이란의 테헤란에 있는 소련 대사관에서 
전례 없던 회동을 제안한다.

공동의 적을 대항하기 위해 모였지만 그들은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스탈린은 스탈린그라드의 승리로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는 상황이었고,

처칠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규모 침공 전은 피하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있는 영국의 식민지를 지키고 싶어 했다.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전후 평화적 공존을 필요성을 강조하며 스탈린이 일본에게 전쟁을 선포하도록
유도할 생각이었다.

스탈린의 요구는 분명했고 연합국이 그의 요구를 거절할 경우 독일과 평화를 맺을 상황이었다.

결국 스탈린은 연합국에 서유럽 침공을 약속받는다.
 
반대로 루스벨트는 독일을 격파한 후에 일본을 침공하기로 스탈린에게 약속받는다.


세 국가는 공식적으로 프랑스 침공일을 확정한다.

시기는 1944년 6월 작전명은 '오버로드'였다.

영국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사기지로 탈바꿈된다.

6개월간 맹렬한 기세로 히틀러가 버티고 있는 유럽에 대한 침공을 준비한다.

100만 명의 미군이 보급품 900백만 톤을 싣고 대서양을 건너왔고,

11개국에서 파견된 군사들도 도착했다.

연합군 최고 사령관 아이젠하워가 세계 각지에서 모인 병력들을 이끌며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작전의 성공을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비밀의 유지였다.

처칠은 히틀러를 따돌리고 연하분이 앞서나가게 하기 위해 비밀스러운 작전을 계획한다.

이른바 보디가드 작전은 가짜 무선신호와 기발한 속임수로 연합국의 가장 중요한 기밀을 히틀러가
알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그 기밀의 내용은 연합군의 상륙지점이었다.

그 작전의 지휘관은 병사 폭행사건으로 배재된 조지 패튼이었다.

1944년 봄 연합국은 패튼을 은밀히 영국의 도머로 보낸다.

그곳에는 탱크와 전투기가 수천 대가 있었다.

말 그대로 엄청난 기계화 대군이었다.

하지만 그 대군의 정체는 풍선이었다.

히틀러는 병사를 때렸다는 이유로 미국 최고의 장군 패튼이 경질됐을 리가 없다고 여겼다.

히틀러는 도머와 가까운 프랑스 칼레항을 연합군의 상륙지점으로 굳게 믿었다.

히틀러는 칼레항에 예비부대와 전차사단을 보냈고,
총 100만 명의 독일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하지만 연합군이 이끄는 지휘관은 패튼이 아니었고, 그들이 향하는 곳 또한 칼레가 아니었다.

연합군의 상륙지점은 바로 '노르망디 해안'이었다.

12개국에서 지원한 병력 15만 6천 명과 함선 7천 척, 전투기 만 2천대가 투입된 작전이었다.

이 작전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라고 부른다.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펼쳐지던 새벽 시각 히틀러는 잠을 청하고 있었다.

독일의 장군들은 예비탱크와 병력을 노르망디에 보내기 위해 애타게 히틀러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연합군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숨 막히는 혈전 끝에 마침내 연합군은 해안을 접수한다.

히틀러는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했다는 보고를 들었지만, 그는 칼레의 독일군 이동을 거부했고
중요한 3일을 흘려보내게 된다.

그 결과 연합군은 유럽에 근거지를 마련했고 히틀러는 예비부대를 적절히 활용하지 못한 탓에 역습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

연합군은 프랑스 내륙으로 진격하며 소도시를 하나씩 탈환해 나갔다.

결국 독일군은 후퇴를 거듭했고 수천 명의 프랑스 국민들은 자유를 되찾았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주인공들은 미국, 영국, 캐나다, 프랑스, 폴란드, 그리스, 벨기에, 네덜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호주, 뉴질랜드에서 파견된 병사들이었다.

이로써 전쟁의 판도는 역전되기 시작했지만,

히틀러의 본성은 절대 바뀌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미드웨이 해전의 참패로 큰 타격을 입은 도조 히데키가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러나 연합군의 섬 단위 점령전력과 공군과 해군의 우의로 인해 전세는 이미 뒤집혀 있었다.

연합군은 노르망디 작전 이후 몇일만에 태평양의 섬 사이판을 점령했다.

굶어 아사하려거든 차라리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라는 도조

사이판에서 참패를 당하자 도조의 지도력을 문제 삼는 비판여론이 힘을 얻었기 시작했고, 결국 도조는 총리직에서 사퇴한다.

비록 도조는 사라졌지만 미국과 일본의 전쟁은 사라지지 않았다.

맥아더는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준 일본에게 설욕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5개월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맥아더는 마침내 필리핀을 탈환한다.

필리핀을 탈환한 맥아더는 더욱 큰 목표를 세우는데
바로 일본 본토를 향한 공격이었다.

1944년 12월 연합군은 프랑스를 가로질러 진격했는데
빠른 진군속도를 고려하여 파리를 우회하기로 결정한다.

샤를 드골은 이 결정에 격분한다.

샤를드골의 자유프랑스군과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연합군의 합세로 파리를 탈환했다.

파리를 파괴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독일군 파리 사령관이 이행하지 않은 것이 탈환에 큰 도움이 되었다.

시민 수천 명이 거리에 모여 환호하는 그 순간..

독일군 저격수가 드골의 암살을 시도하면서 거리는 혼란에 빠지지만,

드골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프랑스에서의 전세가 불리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항복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남아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어

벨기에의 남부로 향해 필사적인 반격에 나섰다.

히틀러의 기습공격으로 연합군은 크게 허를 찔리고 만다.

연합군병력이 바스토뉴에서 독일군에게 포위당하자 연합군은 판단력이 빠른 사령관을 호출한다.

그리고 기갑부대를 이끈 조지 패튼에게 히틀러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1944년 12월 16일 패튼이 이끄는 연합군은 나치군과 전면전을 벌인다.

그리고 무리하게 확장한 나치군을 격파한다.

마침내 독일군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히틀러의 병력은 독일로 퇴각하게 된다.

연합군이 베를린으로 압박해 왔고 결국 히틀러는 지하벙커로 피신한다.

히틀러의 제국은 800만 평방킬로미터에서 45평방미터로 줄어들고 말았다.

1945년 4월 12일 조지 패튼은 공장처럼 보이는 여러 채의 대형건물을 발견한다.

그리고 패튼이 본 것은..

부헨발트 수용소였다.

패튼은 완전히 쇠약해진 생존자 2만 명을 찾아냈는데
그들은 기아와 질병 그리고 고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건물밖에는 수천구의 시체가 있었는데 패튼이 해방시킨 수용소는 히틀러가 세운 수용소 중 한 곳에 불과했다.

이 홀로코스트에서 총 천백만 명이 살해되었고 이중 600만 명이 유대인이었다.

200만 명에 가까운 폴란드인과 300만 명의 소련인 그리고 수십만 명의 집시와 장애인, 동성애자와 정치범들이 살해되었다.

패튼은 병사들은 동원해 독일인들은 최대한 많이 모이게 했고, 그렇게 모인 수천 명의 독일군과 평범한 시민들에게 히틀러의 극악무도한 만행을 직접보게 하였다.

1945년 4월 12일 연합국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오던 어느 날, 루스벨트 대통령은 갑작스러운 뇌졸중으로 생을 마감한다.

부통령에 오른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은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위임받았다.

이제 2차 세계대전의 종지부를 찍는 일은 트루먼의 몫이었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북부에 은신하며 스페인으로 도피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피신하는 도중에 포로가 된 그는 이탈리아의 저항세력에 의해 살해당한 후 밀라노에 버려졌다.

무솔리니의 사망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진 히틀러..

히틀러는 결국 자살해 버린다.

1945년 5월 8일 히틀러가 자살하자 독일은 결국 항복한다.

20세기에 들어서 두 번째 패전이었다.

한 달이 채 안 되는 기간에 루스벨트, 무솔리니, 히틀러가 연이어 사망했고,

유럽에서는 그렇게 전쟁의 막이 내린다.

하지만 아직 하나의 전쟁이 남아있었다.

일본은 마지막 동맹국이 무너져도 절대 항복하지 않았다.

점점 더 궁지에 몰린 일본은 가미가제 공습으로 연합군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맥아더는 일본 본토를 공략하자고 제안했는데 노르망디 상륙작전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수륙합동작전을 펼쳐 일본 본토를 과감하게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일본이 점령하던 만주를 침공한다.

스탈린은 미국이 아시아를 독식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1945년 7월 승전국 지도자들은 포츠담에 모여 유럽의 향방을 논의한다.

처칠은 스탈린을 히틀러만큼이나 위험한 인물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에 관한 문제에 대해 스탈린에게 도움을 얻고자 했지만 트루먼은 스탈린이 먼저 일본을 공격해
주도권을 잡기 전에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 했다.

트루먼은 이 엄청난 비밀을 스탈린에게 공유한다.

하지만 스탈린도 이미 미국이 신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스탈린도 비밀리에 새로운 무기를 개발 중이었다.

처칠은 회담 중에 뜻밖에 소식을 듣고 귀국했는데
자신이 총선에서 졌기 때문에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 것이었다.

트루먼은 일본에게 경고를 한다.

하지만 일본은 트루먼의 경고를 무시했다.

1945년 8월 6일 첫 번째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투하된다.

원자폭탄 하나로 일본인 8만 명이 죽었다.

하지만 아직도 일본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3일 후, 1945년 8월 9일 두 번째 폭탄이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추가로 8만 명의 시민이 더 죽었다.

일본은 항복하고 이로써 마지막 추축국도 무너졌다.

당시 원자폭탄 사용을 두고 아직까지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로 인해 역사상 가장 끔찍한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세계대전이 간신히 마무리되자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을 자랑했던 연합국은 빠르게 적으로 돌아섰다.

국제 정세는 새로운 역학관계로 재편성됐다.

다음은 종전 후 처칠의 연설이다.

하나 그 휴식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