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 양

WORLD WAR(3부)-파시즘의 비상

MeRCuRyNim 2023. 5. 8.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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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스탈린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국가를 이끌지만 이들은 치열한 내란 속에서 공산정권을 지키기 위해
계속해서 싸워야만 했다.

레닌이 1924년에 사망하면서 권력의 공백이 생기자 스탈린은 재빨리 그 공백을 매웠다.

스탈린은 발 빠르게 경쟁세력을 밀어내고 경쟁자들에게 그에 개인적인 권위에 복종할 것을 강요했다.

한편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나치즘과 파시즘 그리고 공산주의의 위협이 커져가고 있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처칠의 주장은 무시되고 그는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간다.

지난 갈리폴리의 참패는 처칠을 몇십 년 동안 괴롭혀왔다.

한편 미국은 축제분위기였다.

1차 대전 이후로 산업의 호황 속에서 축제분위기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1929년 10월 29일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주가가 대폭락 하였다.

하루 만에 140억 달러에 이르는 손실이 발생한다.

검은 화요일로 알려진 바로 그날이었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은 미국 내에서 만이 아니라
전 세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전 세계가 대공황의 시대를 맞았다.

3천만 명이 실업자로 전락했으며 유럽과 미국전역의 경제가 줄줄이 무너져 내렸다.

일본도 타격을 받는다.

전국에 있는 공장들이 원자재 부족으로 문을 닫으면서 전국적인 혼란이 발생했다.

독일은 충격이 특별히 컸다.

하지만 이런 대공황은 히틀러에게 좋은 기회였다.

대공황이 히틀러를 만든 것이다.

히틀러는 새 당원들을 모집하고 전국을 누비며 열정적인 연설을 쏟아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벽보와 전단지를 배포하는 선전활동을 도입한다.

히틀러는 특유의 언변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불과 몇 년 만에 나치당은 작은 비주류 사회단체에서 떠오르는 정치운동단체로 급성장하게 된다.

폭넓은 지지층을 등에 업은 히틀러는 이제 자신의 꿈에 한발 더 다가서게 된다.

1932년 루스벨트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루스벨트는 젊었을 때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게 되었는데, 바로 소아마비였다.

39세 나이에 루스벨트는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수년간 끈질기게 재활치료받은 결과,

마침내 다시 정계로 돌아왔다.

그리고 미국 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시기에 루스벨트는 대선에 뛰어들었고 선거에 승리한다.!!

루스벨트는 절망적인 불운을 딛고 당당히 일어났다.

그리고 이제 절망 속에 미국을 끌어올리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신체적 장애를 극복한 루스벨트 대통령의 이미지는 국민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한편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는 독일의 총리직에 임명되었다.

히틀러의 투표율은 37%을 얻었지만 커다란 영향력이 있었던 군부의 지지를 받아 총리가 되었다.

히틀러는 나치내부에 정적들을 제거할 때가 되었음을 판단하고 대담하고 무자비한 계획을 실행한다.

이를 피의 숙청사건이라고 부른다.

이날 200명에 가까운 히틀러의 추종자들이 살해되었다.

히틀러는 정권정악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세력을 제거하고 독일 최고 지도자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폭군은 히틀러뿐만이 아니었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자행한 숙청보다 훨씬 더 거대한 숙청을 감행한다.

스탈린은 정적들을 지구상에서 가장 춥고 험한, 외딴지역에 있는 시베리아 포로수용소로 보내버렸다.

1930년대 말까지 천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스탈린의 적으로 분류되어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거의 절반의 사람이 사망했고 백만 명은 처형당했다.

히틀러 자신도 스탈린의 방법을 사용한다.

히틀러는 독일 전역에 강제 수용소를 세우고 유대인과 정치적 반대세력 그리고 불순세력으로 보이는 모든 사람들을 수용소에 가두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뉘른베르크법을 만들어 유대인의 재산과 시민권을 박탈했다.

그렇게 절대 권력자가 된 히틀러는 이제 유럽의 유대인들을 탄압할 준비를 시작한다.

미국에서는 루스벨트가 대공황의 깊은 늪에서 미국을 구해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계획은 뉴딜정책이라고 한다.

루스벨트는 대규모 공공사업정책이 붕괴직전의 미국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책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고, 루스벨트는 다른 부분의 예산 삭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뉴딜정책의 비용마련을 위해서 군비를 대폭 삭감하기로 결정한다.

삭감폭은 51%였다.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맥아더는 이 결정에 대해 거세게 반발한다.

강한 군대만이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맥아더였다.

이렇게 맥아더는 루스벨트에게 한마디 하고 나간다...

한편 영국 또한 국내경제를 살리기 위해 영국판 뉴딜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영국은 전국에 걸쳐 수백만 가구의 주택과 발전소를 건설하는데 막대한 비용을 투입했다.

그러나 미국과 마찬가지로 군비를 축소하는 방법으로 필요한 비용을 충당해야 했다.

처칠은 이에 대해서 강한 불만을 품는다 처칠은 1934년 다시 영국 의회에 입성했다.

히틀러도 자신만의 뉴딜을 추구하고 있었다 바로 독일군의 재건이었다.

히틀러의 비밀공장들은 전투기와 탱크를 수천 대씩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나치군의 신병들도 50만 명이나 소집되었다.

그의 야망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무솔리니가 이탈리아를 통치한 지 10년이 되었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가 로마제국의 영광을 되찾을 방법은 자신과 같은 강력한 절대 권력자가 나라를 이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몇 년간의 준비 끝에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제국을 확장시킬 준비를 마친다.

히틀러는 그런 무솔리니를 주시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자신이 바람대로 독일이 패권을 잡으려면 무솔리니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둘은 서로 만남을 가졌다.

둘은 이렇게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추축국이 형성되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무솔리니였다.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기 시작한다.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이탈리아는 탱크, 전투기, 독가스를 무기로
몇 개월 만에 에티오피아를 정복한다.

이에 국제연명은 무솔리니에게 위반행위라고 항의가 빗발쳤지만 무솔리니는 국제연명의 나약한 항의를 비웃기까지 한다.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에서 얻은 승리를 과시했다.

그는 군사정복의 성과를 경제난의 빠진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데 이용한 것이다.

한편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영향을 받아 침공을 개시한다.

그의 첫 번째 목표는 1차 대전 이후 지배권을 잃은 라인 지방이었다.

2만 2천 명의 독일군은 라인지방으로 진격한다.

그렇게 히틀러는 피한 방울 흘리지 않고 라인지방을 얻었고,

프랑스는 허무하게 영토를 빼앗겼다.

히틀러는 자신감이 생겼다.

일본은 세계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어 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를 면밀히 관찰한 일본의 지도자들은 일본에도 그와 같은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1차 대전에서 연합국 편에 서서 싸웠지만, 베르사유 조약에서는 거의 무시당하다시피 되었으며
영토 또한 얻지 못했다.

이탈리아와 독일처럼 일본에서도 군부의 영향력이 점점 커져갔다.

1935년까지 일본은 현대식 군대를 창설하는데 자원을 쏟아붓는다.

일본은 1931년 원자재확보를 위해 만주를 침공한다.
 
그리고 1937년 일본은 중국과의 휴전을 파괴한다.

이 세력의 확장에는 한 지휘관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도조 히데키다.

도조는 일왕의 충신이었고 단호한 성격 탓에 면도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도조는 일본이 세계적인 강국이 되려면 우방국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탈리아와 독일을 동맹국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로써 삼국동맹이 형성되었다.

히틀러는 다른 나라를 점령할 계획을 세운다.

1938년 봄 히틀러는 자신의 고국인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였다.

이어 체코슬로바키아 한 지역으로 눈을 돌리는데 그곳은 300만 명이 넘는 독일인이 살고 있으며 석탄과 철, 발전소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주데텐
지방이었다.

히틀러는 이 지역에 독일인이 많이 살았다는 이유로 이 땅은 원래 독일땅이었다며 강력히 주장한다.

히틀러는 마침내 주데텐지방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독일군을 주둔시킨다.

유럽은 20년 만에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체임벌린 총리는 영국이 또다시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체임벌린은 전쟁재발방지를 위해 외교적 수단을 사용하고자 생각했다.

그는 평화유지를 위해 독일로 갔다.

히틀러가 연합국 지도자와 협상에 응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체임벌린은 어떻게든 전쟁을 막아볼 생각에 히틀러의 요구를 프랑스에 전달한다.

프랑스와 영국 이탈리아, 독일의 지도자들은 뮌헨에 모여서 주데텐 지방 문제에 대해 협상을 벌였다.

그런데 정작 영토의 주권을 가지고 있던 체코슬로바키아는 회담에서 배제되었다.

히틀러는 더 이상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주데텐지방은 히틀러에게 넘어갔다.

체임벌린은 큰 실수를 한 것이다.

히틀러는 독일 내부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눈길을 돌린다.

히틀러는 돌격대원들을 동원해서 유태인들에게 테러를 가했다.

유대인들이 소유한 건물은 불에 타거나 파괴되었다.

백 명이 달하는 유대인이 살해되고 3만 3천 명이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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